광고 천재 명도혁 38화
“이 커피처럼 먹는다고. 화장품을.”
“뭐?? 명도혁, 제정신이야?”
“당연히 제정신 아니지.”
도혁이 웃으며 팀원들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샘플로 가져온 화장품 크림을 떠먹는 척했다.
“제정신인 사람이 광고를 어떻게 만드냐. 반은 미쳐야지.”
“아니, 그러니까 화장품을, 먹자고?”
“이렇게 요거트처럼 떠먹으면 좋겠다는 말이야.”
“아, 씨. 명도혁 장난하지 말고.”
“장난처럼 보이나 보지?”
조금은 짓궂은 눈빛이었던 도혁이 표정을 바꾸었다.
“받은 정보라고는 자연주의뿐이야. 그런데 우리는 강렬한 컨셉과 네이밍을 만들어내야만 하는 상황이고.”
“그렇긴 하지. 네이밍은 소비자에게 한 번에 각인하는 게 중요하니까.”
“자연주의 하면 뭐가 제일 먼저 떠올라?”
도혁의 말에 팀원들이 이것저것 단어를 말하기 시작했다.
“초록, 그린, 유기농.”
“신선하다, 새롭다.”
“자연식품, 식품?”
“맞아.”
도혁이 입매를 끌어올리며 크림 통을 다시 들었다.
“화장품을 식품에 비유해서 표현하려는 거야. 이 제품은 먹어도 좋을 만큼 친환경이다. 인체에 무해하다는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하자는 의도야.”
“와, 이거 센데?”
“과제라서 제품에 대한 상세 브리핑을 안 받아서 모르겠지만, 정말 성분이 좋아서 먹어도 될 거 같다는 느낌을 주자는 거야. 진짜 먹겠다는 건 아니지만 말이지.”
“어우, 광고에서 화장품 떠먹으면 충격적이긴 하겠다. 엽기적이라고 해야 하나?”
이지원이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내저었다.
도혁은 그런 이지원의 반응을 관찰하며 설명을 이어갔다.
“바로 지금 지원이 같은 소비자들이 많기 때문에 먹는다는 컨셉을 어떻게 표현할지는 더 고민할 필요가 있겠어. 화장품의 제품 특성상 품위를 유지해야 하니까.”
“대놓고 노골적인 방식은 화장품 광고랑 안 어울리기는 해.”
“맞아. 과하지 않으면서도 충격적이어야 하는 게 포인트야. 그래서 일단 방향성만 먹는 걸로 잡아봤어. 피부가 먹는 화장품, 이런 컨셉으로.”
“와! 피부가 먹는다. 귀에 확 꽂히는데?”
팀원들이 고무된 표정으로 도혁을 바라보았다.
“인체에 무해하다는 자연주의 컨셉을 최대한 반영해 봤어. 직관적이면서도 부드럽게.”
“맞아. 듣는 순간 바로 느낌이 왔어. 특히 도혁이가 떠먹는 포즈 취했을 때 이거구나 했다고. 대박!”
“다행이네.”
“일레라처럼 화제성도 이끌어낼 수 있겠는데?”
한수철은 소리까지 질렀다.
도혁이 여유롭게 커피를 입술에 대곤 다시 말을 이어갔다.
“식품처럼 먹는 컨셉으로 간다면 그린 색상은 포기해야 할 거야. 식감이 떨어지는 색이니까. 뭐, 그것까지 벌써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만.”
“와, 네이밍 컨셉 잡으면서 디자인에 색채까지 고민하는 거야?”
“그냥 생각이 나서. 브랜드 네임이나 카피라는 게 글자로 구현됐을 때의 느낌을 떠올려 본 거야. 어떤 색이 어울릴까.”
“우와!”
이지원이 놀라 도혁을 바라보았다.
카피라이터로서 당연한 구상이었지만, 아무래도 대학생들이 이 정도까지 생각하긴 어려웠나 보다.
도혁은 과하게 감탄하는 팀원들의 반응이 민망해 말머리를 돌렸다.
“아무튼 ‘피부가 먹는다’라는 컨셉은 마음에 들어?”
“난 너무 좋아. 한 번에 유해하지 않은 자연주의 화장품이라는 컨셉이 확 와닿잖아.”
“나도. 굉장히 마음에 들어.”
모두 도혁의 말에 찬성하는 분위기였다.
한수철은 이미 흥분해 기획 초안까지 잡고 있었고.
도혁은 말없이 구석 자리에 앉아 있는 최철우를 보며 물었다.
“다른 팀원들은 찬성인 듯하고, 철우는 어때?”
“제 생각에도 좋은 것 같습니다.”
최철우가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최철우가 대답했다.
도혁이 눈썹을 찌푸리며 일침을 가했다.
“선배들 의견을 컨펌하라는 게 아니라 이 컨셉에 맞춰서 자료 준비할 수 있겠냐고 물은 거야. 설마 또 삽질할 건 아니겠지?”
“네. 열심히 준비해 보겠습니다.”
하는 꼴을 보니 다음 자료도 도혁이 준비해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못 알아듣는 표정이라고나 할까.
최철우 감 떨어지는 거 알고는 있었지만, 젊었을 때부터 이 정도였나?
‘최철우 제작국장 되는 거 보고 태강애드 망조 들었다고들 하더니, 그런 말 나올 만하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도혁은 의기소침해 고개 숙인 최철우를 내버려 두고 회의를 이어갔다.
“피부가 먹는다. 라는 대전제를 가지고 각자 네이밍을 써오도록 하자. 그걸 보고 다시 의논해 보는 게 좋겠어.”
“두 개 이상 써 오면 어떨까?”
“좋아. 영어, 한자, 한글, 중의적, 다의적 아무 상관 없어. 말이 안 돼도 좋으니까 두 가지 네임은 꼭 만들어 오기. 오케이?”
“오케이!”
메인 컨셉을 잡고 해산하기로 했다.
돌아오는 길에 한수철과 편의점 앞에서 맥주를 한잔했다.
벤치에 나란히 앉아 맥주를 뜯으며 한수철이 도혁에게 물었다.
“오늘 철우가 잘못하긴 했는데, 좀 가혹했던 거 알아?”
“지각하고, 자료 조사 거지같이 해 왔고, 말귀까지 못 알아듣는데 더 부드럽게 대해야 하나?”
“아니, 좀, 명도혁답지 않아서. 전에도 말했지만 너 좀 달라졌어.”
“나답지 않다라…….”
도혁은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켜며 입속에서 말을 굴렸다.
도대체 명도혁다운 게 뭘까.
“순하고 둥글둥글한 성격이라고 생각했거든. 아무튼 너 제대하고 분위기가 확 변했어.”
“그래서 싫으냐?”
“그런 건 아니야. 솔직히 물러 터지기만 해서 걱정이었는데, 오히려 보기 좋아.”
“무조건 열심히만 달리는 게 답이 아니더라고. 손해 보지 않는 선에서 내 거도 챙기고, 싫은 소리도 할 줄 알고 살아야지. 아부도 좀 하고 말이야.”
“크으, 요즘 보면 너 사회생활 십 년은 한 사람 같아. 친구 아니고 선배 같다고.”
“그럼 선배님, 불러봐라.”
“야이, 씨! 술이나 마셔, 인마.”
역시 순해 빠진 한수철에게 장난처럼 진담을 던졌다.
“뒤로 엎어져도 코 베어 가서 팔아먹는 게 이 바닥이야. 정신 차리자.”
아직 한수철은 이 말의 의미를 정확히 모를 것이다.
곧 사회의 쓴맛을 보면 알게 되겠지만, 오늘만큼은 편안하게 맥주의 단맛을 즐겨보기로 한다.
짠. 맥주 캔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 * *
P대 광고홍보학과 학과장실.
이진태와 전공 정교수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신학기 맞아서 인사나 나누자고 모셨습니다. 의논드릴 것도 있구요.”
“다들 잘 지내셨지요? 참, 이번에 에모라 화장품에서 우리 과로 뭘 의뢰했다면서요.”
“네. 의논할 사안이 바로 그겁니다. 그 회사 대표와 친분이 좀 있는데, 신제품 자문 좀 해줬다가 일이 커져 버렸습니다.”
일이 커졌다는 말에 나머지 교수들의 눈도 덩달아 커졌다.
“그게, 에모라 화장품에서 이번에 론칭할 브랜드가 자연주의 컨셉입니다. 젊은 여성 타깃이구요.”
“젊다면 2030 정도요?”
“네. 2030을 겨냥한 저렴하면서도 자연주의를 표방한 화장품을 만든다고 합니다.”
“새로운 시장을 노리는 건가요?”
교수들의 눈빛이 순간 번뜩였다.
나름 국내에서 광고 홍보 전문가로 이름이 높은 교수들이었다. 한때는 천재 마케터 소리 들었던 사람들이다. 그중에는 아직 현업 광고인으로 활동 중인 부교수도 있었고.
“이거 뭔가 촉이 꽂히는데요. 요즘 젊은 친구들 소비 성향을 보면 제품의 원재료에 민감하더라구요. 우리 때와 달리 개발보다는 환경에 관심이 많고요.”
“화장품이 특히 좀 민감하더라구요. 딸 둘까지 우리 집에 여자가 세 명 있는데 피부 타입이 저마다 달라서 각자 다른 화장품 씁니다. 엄마 화장품이 아무리 비싸도 얼굴에 안 맞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순한 자연주의 화장품이 통하나 봅니다. 기존 2030 저가 시장에서 자연 친화적 제품력을 강화한 상품이라니. 이거 느낌이 좋은데요. 안 그렇습니까?”
교수들의 말에 이진태가 끄덕이며 대꾸했다.
“맞아요. 저도 뭔가 촉이 오더라구요. 그래서 이런저런 얘기 나누면서 조언을 했죠. 타깃이 이러니 아예 대학생 쪽을 공략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시작해 보면 어떻겠냐, 그런 말이 나오던 중에 네이밍을 맡기겠다는 겁니다.”
“아, 우리 대학 쪽으로 의뢰한 게 브랜드 네이밍이군요.”
“네. 아직 제품에 대해 구체적으로 나온 건 아무것도 없어요. 크림 한 통 던져주고 제품 이름을 지으라니, 이거 원.”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나도 똑같이 애들한테 과제 던져줬죠. 크림이랑 자연주의 한마디 해주고 네이밍 해 오라고 했습니다.”
“정확히 이진태 학과장님 스타일이네요. 우리 과 학생들 난감했겠는데요?”
학생들의 반응이 그려지는지 교수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걸 본 이진태가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훅 털어내었다.
“자, 여기서부터가 좀 골치 아픕니다. 제가 에모라 화장품에 제안을 하나 했거든요. 이번에 브랜드 네이밍이 잘 나오면 대학생 공모전까지 확대 시행하라구요. 그럼 맡아서 진행하겠다고.”
“공모전이요?”
“캠페인 기획 전체를 대학생 공모를 통해서 뽑고 선정된 CF를 방영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습니다. 마케팅 비용도 줄이고 메인 타깃의 관심과 충성도도 높일 수 있지 않냐고 꼬셨죠.”
“크으. 역시 이진태 교수님. 하긴 공모전 상금 크게 걸어봤자 1억이면 충분하잖아요. 일석이조네요.”
여기까지 들은 부교수 한 명이 걱정을 내비쳤다.
“근데 어떻게 보면 우리 학교의 실력이 시험대에 오른 거 아닙니까?”
“맞아요. 일단 브랜드 네이밍 던져보고 가능성이 보인다 싶으면 공모전으로 확대한다는 거니까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이거 원. 우리 학생들이 네이밍뿐 아니라 공모전까지 꼭 수상해야겠는데요? 잘못하면 죽 쒀서 개 주겠어요.”
교수들의 우려에 이진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죽을 개한테 주고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오! 믿는 구석이 있으신가 봅니다.”
“믿는 놈이 하나 있기는 하죠. 큰 거 한 방 만들어 올 거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어떤 친구입니까?”
이진태는 예전에 도혁이 면접을 보며 앉았던 자리를 바라보며 전과 시험 보던 날을 떠올렸다.
“커피 한잔 마시면 사무실을 카페로 만들어 버리는 친구, 있어요.”
“아, 누군지 알 것 같습니다. 그, 최철우라는 1학년 학생 아닙니까?”
다른 교수의 입에서 뜻밖의 이름이 나오자 이진태가 당황했다.
“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요?”
“한국방송광고공사 부장 외아들이에요. 곧 광주지사장이 될 친군데, 제 오랜 지인입니다. 거 아들이 아주 똑똑해요. 아마 입학 성적도 차석이었을 걸요?”
그 말을 들은 이진태가 눈살을 찌푸렸다.
굳이 그런 얘기를 교수들이 알아야 하나?
이진태가 찜찜한 기분으로 팀별 명단을 뒤져보았다.
그리고 학생들이 제출한 과제 자료에서 최철우의 이름을 찾아냈다.
“명도혁이랑 한 팀이네.”
“네?”
“그런 게 있습니다. 만약에 최철우라는 학생도 그렇게 유능하다면 이번 공모전은 우리가 떼어놓은 당상이군요.”
이진태가 고개를 들어 올리며 미소 지었다.
“한 팀에 인재가 둘이나 있으니 기대를 해보도록 합시다.”
“둘이라면?”
“제가 믿는 친구는 따로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