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고 천재 명도혁-37화 (37/252)

광고 천재 명도혁 37화

한국방송광고공사 코바코(Kobaco).

훗날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로 이름을 바꾸는 이곳은 한국 지상파 방송사의 미디어를 총괄하는 곳이다. TV, 라디오 등 주요 지상파 매체의 광고를 독점 공급한다.

아직 공중파에 비해 인터넷, 유튜브 등의 기타 광고의 비중이 크지 않아 독보적인 위세를 자랑했다.

어느 대행사를 막론하고 매체팀으로서는 가장 중요한 거래처였다.

“직접 광고 공사로 이동해서 매체팀이 어떤 일을 하는지 보는 게 좋겠어요.”

“첫날부터 실습이네요.”

“오전에 실컷 놀았잖아요. 그리고 혼자 가기 심심해요.”

한이수가 웃으며 신입들을 인솔했다.

태강애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광고 공사에 모두 도착해 견학을 시작했다.

자유분방한 분위기의 광고대행사와는 달리 사무적인 인상을 풍겼다.

‘광고 공사가 이렇게 생겼구나.’

카피라이터였던 도혁은 광고 공사에 방문할 일이 없었기에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공사의 연혁과 광고의 역사 등을 전시한 복도를 지나 먼저 들어간 곳은 각 광고대행사의 매체 담당자들이 모인 사무실이었다.

딱히 일을 한다고 느끼기엔 조금 모호한 분위기에 신입들이 당황했다.

매체 담당자들끼리 잡담을 나누는 모습이 아주 친해 보였거든.

신입들이 조금 당황한 기색을 느꼈는지 한이수가 웃으며 설명해 주었다.

“지금 접수한 광고 시간이 확정되기를 기다리는 중이에요. 원하는 시간대를 신청하면 공사에서 승인해 주거든요. 경쟁이 치열한 시간대에 대한 조정은 회의를 거치기도 하구요.”

“대행사의 영업력이 중요하겠는데요?”

“공사 측에서는 최대한 공정하게 진행하려고 하시는 편이죠.”

한이수가 눈을 찡긋했다. 그 의미를 눈치챈 도혁이 미소 지었다.

자본주의에서 당연한 일이지만 대행사의 영업력, 광고주의 매체비 집행 규모는 좋은 시간대를 확정받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한이수가 설명을 이어갔다.

“저는 태강애드 부산 지사 출신이에요. 그래서 부산광고공사에서 일을 처음 시작했는데 거긴 분위기가 더 가족 같았어요. 공사 직원들이랑도 친했구요.”

“서울 공사는 가족 같지 않고?”

“엇! 정 과장님!”

뒤에서 광고 공사 직원이 다가와 한이수에게 아는 척을 했다.

“젊은 친구들을 데리고 왔네. 신입?”

“네. 맞아요. 우리 회사 대학생 신입들입니다.”

“이번에 홈런 친 그 친구들인가? 광고 바닥에 소문났어. 일레라 가구 말이야. 일레라가 일냈다고.”

땅딸한 체격에 배가 나온 정 과장이라는 사람은 나이에 걸맞은 아재 개그를 하며 신입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거 잘됐네. 다음 달에 우리 공사에서 체육대회 하는 거 혹시 알고 있나?”

“아, 그렇군요.”

“젊은 신입들이 많은 태강애드가 유리하겠는데? 난 태강애드 쪽 팀으로 들어가야겠어.”

정 과장이 든든하다는 표정으로 도혁을 바라보았다.

가을이 되면 광고 공사 주관으로 체육대회를 하곤 했다. 체육관까지 대관해 친선경기를 했는데, 도혁도 신입 때 참가한 적이 있었다.

카피라이터라 대회에 자주 불려 다니진 않았지만, 체격이 좋고 키가 커서 몇 번 차출되었었지.

새삼 감회가 새로워 공사의 사무실을 둘러보던 도혁의 눈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여기서 만나는구나. 광주 공사 지사장으로 승진하기 전이니까 이맘때쯤은 서울에 있었겠어.’

도혁은 멀리 보이는 남자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이 당시 한국방송광고공사 영업 1부의 최 부장. 그는 최철우의 아버지였다.

딱히 광고인으로서 자질이 없던 최철우가 회사에서 안하무인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건 그가 광고 공사 지사장의 아들인 점이 크게 작용했다.

도혁의 속도 모르고 최 부장이 신입들의 앞으로 다가왔다.

“태강애드의 미래구만. 명도혁이 누구야?”

“네? 저입니다만.”

벌써 이름까지 아는 건가? 조금 당황해서 최 부장을 쳐다보았다.

“김철준 대표가 실명으로 칭찬하는 거 처음 봐서 내 기억을 하지. 미래가 창창하다고 지난번 광고인 모임에서 말하더라고.”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억을 안 할 수가 있나. 일레라! 일레라!”

브랜드명만 외치는 일레라 광고를 슬쩍 흉내 내며 최 부장이 영업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이 최철우와 굉장히 닮아 있어 조금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웃고 있지만 간사한 인간인 걸 잘 알고 있었다.

능력 좋은 대행사를 골라 귀신같이 뒷돈 챙긴다고 매체팀에서 뒷담화하는 걸 많이 들었거든. 운이 좋아서 걸리지도 않는다고 욕했었지.

도혁은 속으로 실소하며 그와 악수했다.

‘죄송합니다. 최 부장님. 이번 생에서 아드님이 고생 좀 할 겁니다. 남의 등쳐서 꿀 빠는 거 내버려 두지 않을 생각이라서요.’

도혁은 최철우의 아버지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참교육을 다짐했다.

* * *

정확히 이틀 뒤, 과제를 위한 첫 번째 회의가 시작되었다.

도혁은 약속 장소인 학교 앞 카페, 들국화 영토에 들어서며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학교 다닐 땐 몰랐는데 여기가 진짜 마케팅 제대로 한 곳이지.’

이곳은 종합문화공간을 표방한 독특한 컨셉의 카페로 음료당 가격이 아닌 사용 시간별 요금을 지불하는 곳이다.

당시로는 파격적인 서비스였다.

이용 시간을 보장해 주다 보니 주로 대학생의 조별 모임 장소나 스터디 장소로 활용되었다.

지금도 잘나가지만 미래엔 ‘스타벅스를 이긴 최초의 대한민국 토종 카페’로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될 카페, 명도혁은 그 안으로 발을 옮겼다.

한수철은 이미 안쪽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 다 돼가는데 너밖에 안 왔어?”

“지금 오고 있데. 철우는 연락이 안 되네.”

“뭐? 그 자식, 빠져 가지고.”

도혁이 툭 가방을 의자에 내려놓고 투덜거리자 한수철이 피식거렸다.

“너답지 않게 왜 툴툴대냐? 하긴, 막내가 먼저 와서 세팅도 해놓고 하면 좋을 텐데.”

“그런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지만. 우후, 아니다.”

최철우가 늦게 올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시간 약속을 절대 안 지키는 걸로 유명했거든.

정말 한 번도 빠짐없이 회의나 마감 일자에 늦었었다.

시간 약속을 어기는 일에 상당히 민감한 도혁은 최철우의 간사함만큼이나 지각하는 습관이 싫었다.

예상대로 최철우는 15분 늦게 나타났다.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었지만.

“선배들 다 기다리는데 뭐 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길이 막혀서.”

“오는 길에 차가 좀 많더라고. 도혁이가 이해해.”

분위기가 나빠질 걸 염려한 이지원이 무마해 주었다.

도혁은 눈살을 찌푸리며 자료에 대해 물었다.

물론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일찍 일찍 다녀. 다음 회의부터 두고 볼 거다. 자료는 준비해 왔어?”

“그, 그게.”

최철우가 말을 더듬자 부드럽던 이지원의 눈초리도 매서워졌다.

“준비하긴 했는데 제대로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리 줘봐.”

최철우가 뒤죽박죽으로 구겨진 회의 자료를 가방에서 꺼냈다.

자료를 넘겨보던 한수철의 표정이 굳어갔다.

“1학년이라서 이해하고 싶은데, 후우. 이건 못 쓰겠다.”

“왜 그래? 자료에 무슨 문제라도 있어?”

이지원이 한수철에게 자료를 건네받았다.

“세상에. 교수님이 방향성을 말씀해 주시지 않았니? 자연주의라는데 럭셔리 제품만 조사해 오면 어떡해.”

“가격대가 아직 책정되지 않아서, 친환경 제품은 가격이 높지 않나요?”

“아, 머리야.”

이지원은 털썩 소리가 나게 의자에 등을 대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최철우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나름의 변명을 늘어놓았다.

“제가 화장품 쪽은 잘 모르지만, 엄마랑 누나에게 조사하니까 무조건 비싼 게 잘 팔린다고 하더라구요. 품질이 똑같아도 비싼 것에 손이 가는 게 화장품이라고…….”

“환장하겠네. 요즘은 어머니랑 누나한테 물어보는 걸 조사라고 부르나 보지?”

흥분한 이지원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한수철이 나섰다.

“일단 앞에 놓인 차부터 마시고 시작하자. 이거 너무 막막해졌다. 자료가 이렇게 나와 버리면 곤란하거든.”

“미리 방향성이라도 말해주셨으면 제가 삽질을 덜 했을 텐데요.”

“아니, 무슨 방향성이야. 자연주의 하면 감이 안 오니? 미치겠네. 그런 거까지 말해줘야 하는 거야? 해외 자료는!”

“그게, 국내 광고부터 파악하느라…….”

“못 했다는 거야?”

여전히 진정하지 못하는 이지원이 냉수를 벌컥였다.

최철우는 미안해하는 기색을 비치는 듯 보였지만, 도혁은 알고 있었다.

저 자식 대충 혼나고 넘어가려고 하는구만.

“다시 조사해 와.”

“네? 시간이 별로 안 남았는데…….”

“오늘 회의하면서 귀에 딱 꽂히게 방향 잡아줄 테니까 조사 새로 해 오라고.”

“아, 진도를 나가는 게 아니구요?”

“진도?”

도혁이 날카롭게 말끝을 올리며 어이없어했다.

“진도는 자세가 된 사람들이 나가는 거야. 컨셉 잡고 난 이후 자료, 설문, 설문 취합에 통계까지 전부 최철우가 맡는다.”

“통계라고 제대로 하겠어?”

“발표 전날까지만 나오면 되니까 그때까진 맞춰내겠지. 바보가 아니면 말이지.”

“잠시만요! 선배님.”

최철우가 지금까지 보이던 미안한 표정을 싹 지우고 흥분했다.

“그럼 지금 저는 메인 회의에 참여하지 말고 잡일만 하라는 겁니까?”

“발표만 하려고 했던 거랑 뭐가 다르지? 폐 끼치기 싫어서 발표한다면서.”

도혁이 허를 찌르자 최철우가 이를 앙다물었다.

“회의는 참여해야지. 다만 자료를 조사하라는 거야. 백 데이터, 몰라?”

만날 남이 주는 열매만 따 먹을 생각하지 말고 너도 거름이 되어라, 이런 말이었다.

도혁은 차갑게 시선을 내리깔곤 최철우의 자료에서 눈을 떼었다. 더 볼 것도 없었으니까.

“시간 낭비하지 말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정리해 볼게. 가격대, 브랜드명까지 모두 미정. 우리가 아는 건 새롭게 론칭하는 자연주의 화장품이라는 것 정도야. 여자분들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네. 에모라 화장품 품질은 어때?”

“제품 좋아. 트러블도 없고 순하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자연주의 컨셉을 잡았구나. 하아, 이쯤에서 시장조사 한 자료가 나와줘야 하는데. 그래야 포지셔닝을 잡지.”

한수철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최철우는 숙인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내가 가져왔어.”

최철우 자식을 애초에 믿지 못한 도혁이 미리 준비한 자료를 꺼냈다.

“어! 이걸 다 혼자 정리했다고?”

“그렇게 많지도 않은데 뭐. 국내 화장품 회사라 해봐야 몇 개 되지도 않고, 자연주의 컨셉은 드물어서.”

“와, 꼼꼼하게 정리 잘한 것 봐. 언제 다 했대?”

한수철이 자료를 팀원들에게 나눠주며 감탄했다.

굳은 얼굴로 자료를 받아 든 최철우의 눈이 커졌다.

“네이밍 조사까지 해뒀네. 최철우 너 계 탔다.”

“그러니까. 말은 따끔하게 해도 도혁이가 조사 도와준 거나 마찬가지야, 이건. 앞으로 나올 백 데이터 정리 잘해!”

팀원들의 원성에 최철우가 알겠다고 머리를 숙였다.

도혁이 한마디 더 보태주었다.

“내가 일 덜어줬으니까 발표 시나리오나 작성하든가.”

“시, 시나리오요?”

“발표자가 잘 돋보일 수 있게 손발이 돼서 도와줘야지. 안 그래?”

도혁은 그 말에 입술을 꾹 깨무는 최철우에게서 시선을 떼고 회의를 이어갔다.

“자연주의 컨셉, 혹시 각자 생각해 둔 것 있어? 아무거나 말해보자. 브레인스토밍 해보자고.”

“그럽시다. 자, 누구부터 말해볼까?”

“진짜 아무거나 말해도 돼?”

“그럼. 도혁아. 그러려고 모인 거잖아.”

“먹으면 어때?”

“잠시만 뭐라고? 커피 마시겠다고?”

한수철의 말에 도혁이 커피 잔을 들고 대답했다.

“이 커피처럼 먹는다고. 화장품을.”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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