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35화
회귀하기 몇 달 전 태강애드 제작국.
출근하던 직원들이 게시판 주위로 몰려들었다.
게시판에는 가을 정기 전보의 결과가 붙어 있었다.
벌써 나왔구나.
도혁은 공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인사 발령이 확정된 걸 실감했다.
-제작2팀 카피라이터 명도혁, 제작3팀 팀장을 명함
며칠 전 인사팀으로부터 미리 전화를 받았다. 이번 정기 인사에서 3팀 팀장으로 전보할 거라고.
말이 전보지, 쫓겨 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제작3팀? 지금 나한테 3팀으로 가라는 건가?
-회사 사정상 그렇게 됐습니다. 면목 없습니다. 팀장님.
-하아.
도혁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쓰디쓴 커피를 들이켰다.
프로젝트별로, 그리고 실력대로 팀을 꾸리는 건 태강애드의 전통이었다.
에이스인 제작1팀은 기획1팀과 함께 작업한다.
팀의 숫자가 커질수록, 그러니까 2팀보다는 3팀이 신입이거나 자질이 부족한 직원과 일한다는 뜻이다.
3팀으로 갔다는 건 곧 밀려났다는 말이었다.
입사 이래 10년 가까이 태강애드의 에이스 카피라이터였던 도혁이 2팀, 급기야 3팀으로 밀려난 건 최근 3년 동안의 일이었다.
하긴 3년 동안 회사 안팎으로 악재가 이어지고 있었다.
도혁은 고혈압 판정을 받았고 이혼했다. 그리고 건강과 가정까지 희생하며 평생을 바쳐온 태강애드에서 서서히 자리를 잃어갔다.
“짐 들어드릴게요. 팀장님.”
“최 팀장이 무슨 힘이 있다고. 이리 줘.”
“속이 터지니까 그렇지. 커피나 한잔해요.”
“그러지.”
위로하러 온 수석 디자이너 최민아와 자판기 커피를 뽑아 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최민아가 입술을 꾹 깨물며 분통을 터뜨렸다.
“최철우 그 자식 진짜, 아! 어떻게 밟아줘야 하지?”
“누가 듣겠다. 너도 조심해.”
“들으라지 뭐. 나쁜 놈. 아버지 빽만 믿고 들어와서 사내 정치질만 하더니 뭐? 제작국장? 참나, 어이가 없어서.”
“정치도 실력이잖아.”
“카피라이터 같은 글쟁이한테 정치가 왜 필요하냐구요! 그리고 처음부터 최철우가 오빠 견제했던 거 모르는 사람 있어? 카피도 몇 번 가로챘잖아!”
“그만해. 지난 일 들춰봐야 속만 아프지.”
“오빠는 화도 안 나?”
차분한 성격인 최민아가 직장에서 이렇게까지 감정을 드러내는 건 오랜만에 본다.
정말 화가 났는지 신입 때처럼 오빠 소리를 다 하네.
도혁은 자조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됐어. 이왕 이렇게 된 거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지. 그래도 고맙다. 나 대신 이렇게 화내주니까 속은 시원하네.”
“최철우 같은 막눈이 제작국장이라니, 솔직히 나 걱정돼. 태강애드 망할까 봐.”
“그건 나도 걱정된다. 최 국장 보는 눈이 없긴 없어.”
“어떻게 그렇게 바로 국장 소리가 나와? 진짜. 하아.”
국장 승진을 했으니 국장이라고 부를 뿐이다. 회사란 그런 곳이니까.
후배든 라이벌이든, 심지어 과거에 내 실적을 가로챈 나쁜 놈이든 간에 결과에 승복해야 하는 곳. 더러워도 직급 앞에선 고개 숙여야 하는 곳.
그곳이 바로 직장이라는 전쟁터였다.
그리고 그 전쟁이 항상 공정하지만은 않다는 걸 수없이 경험해 왔다.
도혁은 빈 커피 잔을 한 손으로 구기곤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자리로 돌아와 제작3팀의 면면을 둘러보았다.
대부분 신입 디자이너와 카피라이터, 더불어 제작3팀과 함께 합을 맞출 기획3팀 역시 눈에 띄는 기획자가 없었다. 심지어 예산도 턱없이 삭감된 상황.
그리고 며칠 뒤, 도혁은 제작3팀팀장으로서 처음으로 책임을 지고 경쟁 PT를 맡게 되었다.
도저히 현재의 인적 구성으로는 커버할 수 없는 규모의 프로젝트였다.
알아본 바에 따르면 광고주와 모 대행사 대표가 사촌 관계란다. 업계에서 암암리에 포기하다시피 한 PT였다.
도혁은 입사 후 처음으로 기획안을 받자마자 패배를 예감했다.
‘들러리 서는 PT에 일부러 넣었구나. 최철우 잔인한 놈, 진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그때 최철우에게 쫓겨나기 전에 내 발로 나갔어야 했다.
그 잘난 얼굴에 사직서를 뿌려주고 떠났어야 했는데.
도혁은 그날 태강애드의 문을 박차고 나가지 않은 걸 두고두고 후회했다.
그리고 지금 도혁의 눈앞에 그의 광고 인생을 송두리째 짓밟았던 최철우가 서 있었다.
* * *
악명 높은 이진태 학과장의 과제 수행을 위해 팀별로 모여 앉았다.
도혁은 책상을 옮기는 최철우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아직은 본인이 미래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학생에 불과했다.
남의 공을 가로채서 승진하고 출세 가도를 달리며, 정치질에 로비까지. 못된 짓은 골라 가면서 하다가 명도혁의 모가지를 쳐낼 최철우였다.
그와 함께 조별 과제까지 할 상황에 놓인 도혁은 만감이 교차했다.
앞자리에 앉은 꼴이 보기 싫어 고개를 돌렸다.
어느 정도 자리가 정리된 걸 확인한 이진태가 수업을 재개했다.
“첫 과제니까 가볍게 브랜드 네이밍부터 시작할까?”
“가볍게요, 교수님?”
“그럼, 새털처럼 가벼운 과제 아닌가 말이지.”
“하아…….”
이진태가 농담처럼 무거운 과제를 떠안기자 학생들이 한숨을 쏟아냈다.
그 소리에 이진태가 크게 만족해 박수까지 쳤다.
“시작부터 즐거운 함성이 터져 나오는구만. 난 이 소리가 그렇게 좋더라고.”
“하아…… 교수님…… 우리한테 왜 이러세요.”
“제품은 내가 화장품으로 준비했어. 에모라 알지? 거기서 이번에 야심 차게 론칭하는 브랜드가 있어.”
“화장품이요?”
“이번 과제에서 1등 하는 브랜드 네이밍을 내가 에모라에 제안할 거야.”
“네??”
대학생 조별 과제로 론칭 브랜드 네이밍 제안을 하겠다니.
모두 어안이 벙벙해 이진태를 쳐다보았다.
“내가 대표랑 친해서 아직 이름도 패키지도 없는 제품을 잔뜩 받아 왔어. 조교! 조교! 들어와서 샘플 쫙 뿌려봐. 이게 내가 써보니까 좋더라고.”
“네! 알겠습니다. 교수님!”
“이게 사과, 녹차 이런 재료로 만들었다고 자랑을 어찌나 하던지. 친환경 제품이라네.”
조교가 가져온 화장품을 보고 도혁은 빙그레 웃고 말았다.
아, 이 제품 뭔지 알 것 같은데?
눈앞에 높인 제품의 패키지가 매우 낯익었다.
에모라가 중국에서 대박을 내고 이후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된 효자 상품.
‘이거 해볼 만하겠는데? 재밌겠어.’
실전 우선이라고 소문난 이진태의 수업다웠다.
하긴, 컨셉부터 제품력, 이미지까지.
네이밍 한번 해보면 브랜드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의 진수를 알 수 있긴 하지.
이진태의 속내를 알아차린 도혁이 절로 떠오르는 미소를 삼켰다.
이진태가 손바닥에 로션을 짜더니 얼굴에 덕지덕지 발랐다.
그리고 우리한테도 해보란다.
“무슨 광고를 하든 제품을 일단 사용해 봐야 해.”
“교수님 이거 여성용 아닌가요?”
“남녀 공용이라던데? 향이 없잖아. 자연주의를 얼마나 강조하던지. 참, 제품 설명해 줘야지.”
이진태가 단상에서 내려와 도혁의 팀 쪽으로 다가왔다.
책상에 기대어 비스듬히 서더니, 로션을 공중으로 한번 던지고서 잡아챘다.
“아까 말했듯이 이 화장품은 친환경이 제일 중요한 제품력이야. 녹차가 기본이고 나머지도 모두 자연 유래 성분이라고 대표가 자랑이 늘어졌어.”
“다른 특별한 건 없나요? 메인 타깃이라거나 대표 성향 말입니다.”
도혁의 말에 이진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걸 말해주면 쓰나. 명심해. 이건 숙제라고. 사실 아직 아무것도 없기도 하고. 론칭 대박 쳐야 하니까 최선을 다해서 만들어보도록.”
“……네.”
정상적인 제품 브리핑을 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모두 알아서 조사하고 챙겨보라는 말일 거다.
도혁은 물끄러미 제 앞에 놓인 로션병을 노려보았다.
이진태가 큰 소리로 회의의 시작을 알렸다.
“기간은 2주일 줄게. 너무 긴가? 자자, 바로 컨셉 회의 시작해야지?”
“네? 2주일이요?”
“팀별로 서로 인사들하고, 오늘은 팀장 정해서 제출하도록. 참, 팀명도 정하고 말이지.”
“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팀마다 회의를 시작했다.
모두 막막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수철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눈앞이 깜깜하지만 시작해 볼까요? 우선 저부터 소개할게요. 2학년 한수철입니다. 저기, 선배님이시죠?”
“맞아. 근데 난 취업해서 곧 수업 안 들어올 거거든. 면목 없지만 발표는 알아서들 하고 숟가락 좀 얹어주면 안 될까?”
“네……. 그렇게, 하시죠.”
한수철이 마지못해 대답하고 모두 그러려니 넘겼다.
취업을 했다는데 과제로 붙들 수는 없었으니까.
오늘이 마지막 수업이라는 4학년 선배를 제외하면 팀원은 총 5명이었다.
도혁과 한수철, 이지원, 김민경이라는 동기, 그리고 최철우였다.
간단한 인사가 이어지고 마지막으로 최철우가 1학년이라며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1학년 최철우라고 합니다. 이진태 교수님 수업 듣고 싶어서 동기들보다 한 해 먼저 수강했습니다.”
“풋풋하고 좋네. 1학년이라도 빠지지 말고 회의 나오고 의견도 내면 좋겠어. 선후배 따지지 않고 아이디어만 좋으면 채택할 거니까.”
“네. 알겠습니다.”
도혁은 깍듯하게 자신을 소개하는 최철우를 보며 속으로 코웃음 쳤다.
표리부동, 최철우의 정체성을 가장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이다.
전생의 그는 겉과 속이 다른 인간이었다. 강한 자에게 강하고 약한 자에게 군림하는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였다.
선후배 가릴 것 없이 아이디어를 가로채고 자신의 공으로 돌리곤 윗사람들의 신뢰를 얻어갔다.
본능적으로 귀신같이 실적이 될 만한 건수를 알아 차린다고나 할까.
도혁이 최철우를 바라보는 동안 한수철이 계속 회의를 주도해 갔다.
“이제 팀장이랑 팀원을 정해야지?”
“팀장은 한수철이 하는 게 어때?”
도혁은 최철우에게 시선을 꽂은 채 한수철을 추천했다.
웃고 있던 최철우의 얼굴에 가느다란 균열이 갔다.
“내가 해도 상관없기는 한데, 의견들 있으면 말해줘.”
“나야 내일부터 학교 못 나오는 몸이라 후배님들이 알아서 하세요.”
4학년 선배가 빠지고 다른 팀원들도 한수철을 추천하는 분위기였다.
“난 좋아. 1학년 때부터 한수철이 팀장 많이 했었어. 결과도 항상 좋았고.”
“나도 반대 의견 없음.”
분위기가 이렇게 돌아가자 최철우가 잠깐 주먹을 움켜쥐었다.
도혁은 물끄러미 핏줄이 곤두선 주먹을 바라보았다.
곧 최철우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슬며시 웃었다.
그게 너무 자연스러워 도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가 하는 꼴을 지켜보았다.
“저기, 선배님들 제가 아직 파워포인트를 잘 못 만들어서요. 발표라도 하면 어떨까 하는데요. 1학년이라고 폐가 되고 싶지 않아서요.”
“그래? 다른 팀원들 생각은 어때?”
“파워포인트 하는 사람이 발표까지 하는 건 무리니까, 철우처럼 아예 파포 못하는 사람을 발표자로 세우는 방법도 있겠어.”
“감사합니다.”
아직 발표자를 최철우로 확정하지 않았는데, 이미 결정됐다는 듯이 그가 감사를 표했다.
역시 팀장이나 발표자처럼 눈에 띄는 일부터 잡아채려는 것이 최철우다웠다.
여전하네 이 자식. 아니, 이때부터 그랬구나, 라고 해야 하나?
사회에서 산전수전 겪다가 얍삽해진 게 아니라 본성이 기회주의자였던 거다.
도혁은 실소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같이 많은데, 굳이 민폐 안 끼치겠다고 발표를 맡을 필요는 없지 않나?”
“네?”
“자료 조사도 있고, 1학년이 할 수 있는 잡일이 산더미 같다고.”
미소 짓던 최철우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