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33화
“안녕하십니까? TL 코리아의 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이렇게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프레젠테이션 자리를 마련해 주신 하정 주조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표합니다. 저희 TL 코리아는…….”
길어지는 서론에 최 부사장이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굳이 미국 본사인 TL 커뮤니케이션의 연혁을 강조하며 회사 소개가 이어지자 도혁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자동 탈락이구만. 회사 자랑도 사람 봐가면서 해야지.’
광고주는 여러 부류가 있다. 권위나 명성에 호소하는 방식이 통하는 대표도 있고, 거창한 서론을 질색하는 경우도 많다.
광고주의 성향에 따라 준비한 내용을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것이야말로 발표자의 기본이었다.
AE들에게 들은 얘기로는 대표가 입은 슈트만 봐도 각이 나온다나?
그런데 오늘은 광고주가 말과 행동으로 자신을 온전히 보여주지 않았나. 얼마나 급하고 독단적인지.
발표자가 경험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센스 있는 프레젠터였다면 분명히 장황한 회사 소개 따위는 건너뛰었을 것이다.
물론 광고주가 세계적인 마케팅 그룹 TL 커뮤니케이션의 위상을 모를 수도 있겠지만, 적당히 해야지.
최 부사장이 마이크를 잠깐 당기려다 내려놓았다.
첫 팀인 만큼 재촉하려다가 짧은 한숨을 끊어 쉬었다.
“그럼 본론부터 들어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준비한 자료를 함께 보시겠습니다. 현재 하정 주조의 깨끗한 참소주의 포지션은…….”
도혁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본론은 무슨,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 안 했잖아.
여기 제품 포지션 모르는 사람 있나?
도혁조차 하품이 나오기 직전이었다.
그렇게 특별할 것 없는 발표가 지루하게 지나가고, 대망의 대일기획 차례가 되었다.
김철준의 눈매가 날카롭게 올라갔다.
한국방송광고공사에서는 매달 광고대행사의 방송 광고 매출 순위를 매겨 자료를 배포한다.
그 매출 순위에서 3등 아래로 내려가 본 적이 없는, 명실공히 대한민국 최고의 광고대행사 대일기획이었다.
‘오늘의 태강애드 김철준을 있게 한 회사이지. 대일에서 대리때 독립해 나왔으니까.’
김철준은 대일기획에서 독립했고, 분명히 그 노하우를 받아서 태강애드를 꾸리기 시작했다.
대일기획의 발표자가 앞으로 나서자 팽팽해진 공기로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발표자가 90도로 허리를 굽혀 광고주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발표를 맡은 대일기획 기획팀장입니다. PT 자료 보시는 게 여간 막노동이 아닙니다. 먼저 시안부터 보시고 시작하겠습니다. 아마 눈이 시원해지실 겁니다.”
역시 노련하다. 광고주가 지루해하는 걸 눈치챘는지 먼저 시안으로 눈을 사로잡고 PT를 시작했다.
화면에 광고 포스터가 펼쳐지자 최 부사장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포스터의 모델은 이 당시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 여배우, 공서연이었다.
‘사전에 최 부사장의 취향을 조사하기라도 했나?’
그랬던 모양이다. 공서연의 얼굴을 보자마자 광고주가 끄덕이기 시작했다.
눈을 내리깔고 은근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델의 모습에 최 부사장은 이미 절반쯤 넘어간 표정이었다.
발표자가 모델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설명을 이어갔다.
“섭외가 굉장히 어려운 배우이지만, 깨끗한 참소주 광고 쪽으로 최우선 캐스팅하겠습니다.”
“소주 광고는 여배우들이 꺼리지 않나요?”
“저희 대일기획은 공서연 배우의 매니지먼트와 파트너십을 맺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섭외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이거 속이 훤히 보이는데? 너무 심플하잖아?’ 소비자를 공략하는 소구점이 중요하듯이 광고주를 설득할 포인트를 잡는 것 역시 아주 중요하다. 대일기획이 제대로 핵심을 찌른 듯했다.
도혁은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일기획의 기획안을 바라보았다.
‘모델 전략이라. 안전한 쪽을 택했군. 하지만…….’
역시 대일기획은 이름값을 했다. B 안을 통해 시장 확장과 더불어 2030 타기팅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다.
다만 장기 마케팅 방향으로 B 안을 제시하며 잠깐 짚고 넘어간 수준이었다.
여자 모델을 활용한 CF 역시 굉장히 무난하게 흘러갔다.
TV와 라디오, 포스터와 PPL(간접광고)까지 매체 전략 설명으로 PT가 마무리되었다.
최 부사장이 조금 지쳤는지 휴식을 제안했다.
“잠깐 쉽시다. 이제 한 팀 남았죠?”
“그렇습니다.”
“기존에 우리와 일해왔던 대행사니까 부담 없이 들어보겠습니다. 20분 뒤에 모입시다.”
임원진과 최 부사장, 그리고 각 광고대행사 대표들이 회의실에서 나가고 그제야 모두 한숨을 내쉬었다.
“아우, 숨 막혀. 차라리 내가 발표하는 게 낫겠다. 보는 것도 고문이네.”
“맞아. 발표자는 긴장되니까 한결 나을 수도 있겠다. 왜, 운전하면 멀미 안 하잖아.”
“아무튼 살 떨려. 탁기준 선배는 괜찮은지 모르겠네?”
멀리서 탁기준이 기획안을 내려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달을 준비하는 기획안과 CF였다.
오늘의 발표로 승부가 갈린다. 그동안의 노력과 예산이 물거품이 되느냐, 만족할 결실을 맺느냐.
누가 뭐래도 그 결과는 발표자의 손에 달려 있었다.
오늘따라 그의 어깨가 무거워 보여 도혁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를 응원했다.
잠깐의 휴식 시간이 끝나고 드디어 태강애드의 차례가 되었다.
탁기준이 단상으로 올라가 정중하게 인사했다.
“오늘 발표를 맡은 태강애드 AE 탁기준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탁기준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렇게 태강애드의 프레젠테이션이 시작되었다.
도혁은 신입팀이 제안했던 원안과 비교하며 꼼꼼히 기획안을 살펴보았다.
대일기획과 붙는 만큼 기획과 제작 쪽 에이스가 총출동해 원안을 다듬은 모양이었다.
탁기준은 핵심만 짚고 넘어가며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지금부터 말씀드릴 태강애드의 제안에 놀라실 수도 있습니다. 저희는 판을 뒤엎으려고 합니다. 시장을 움직이려 합니다.”
판을 엎는다는 말에 최 부사장이 안경을 고쳐 썼다.
탁기준은 망설임 없이 준비했던 기획안을 꼼꼼히 설명해 나갔다.
공간적 확장, 타깃의 변동, 이어서 저도수 시장으로의 확대.
탁기준은 설문과 근거를 조목조목 제시하며 설득을 거듭해 갔다.
‘와, 귀에 쏙쏙 박히네. 저게 진짜 프레젠터구나.’
역시 미래의 기획국장다운 탁기준이었다.
설득은 저렇게 하는 거구나.
같은 내용이었지만 한수철의 발표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한수철이 믿음직한 발표자라면 탁기준은 아우라가 있다고 해야 할까.
발표가 진행될 때마다 최 부사장과 하정 주조 임원진들의 눈이 커졌다.
특히 임원들이 술렁대는 소리가 커지자 최 부사장이 호통을 쳤다.
“집중 좀 합시다!”
“죄, 죄송합니다. 부사장님.”
다시 정돈된 실내를 돌아보며 탁기준이 무대에서 청중 쪽으로 몸을 돌렸다.
“지금부터는 저희가 준비한 CF를 보시겠습니다. 주의 사항이 있습니다.”
“주의 사항이요?”
“지금까지 보셨던 소주 광고는 모두 잊어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실내의 조명이 꺼지고 CF 상영이 시작되었다.
설마, 명도혁의 발 연기가 나올까 1초 정도 우려했는데, 다행히 경수현을 섭외해 새로 제작한 모양이었다.
진짜 시작하는 연인들처럼 설레는 감정을 표현한 남녀 배우의 연기는 대단히 훌륭했다.
‘역시 CF도 연기가 중요하구만.’
도혁은 괜히 혼자 머쓱해 머리를 긁적였다.
그사이 짧은 CF 방영이 끝나고 정적이 흘렀다.
최 부사장이 마이크를 들었다.
“주의 사항이 맞군요. 제대로 한 방 맞았네. 제가 생각하던 소주 광고와 차원이 다릅니다.”
“타깃부터 다르니까요. 하지만 미래를 보시죠. 2030은 대학생 시절부터 직장인으로 죽을 때까지 소주를 소비할 사람입니다. 현재의 메인 타깃은 공략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렇긴 하지. 보수적이니까.”
“맞습니다. 특히 기호 식품의 충성도는 다른 제품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최 부사장님께서는 어떤 술과 담배를 선호하십니까?”
“나야 당연히 깨끗한 참소주만 마시죠. 담배는 발보루 핍니다.”
“둘 다 지명 구매 하시죠? 다른 브랜드 나오면 바꿔달라고 하시구요.”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충성도입니다. 아직 브랜드 충성도가 높지 않은 2030을 공략해 현재의 시장과 미래의 시장까지 점유하는 것, 그것이 저희가 제안하는 기획 방향입니다.”
탁기준이 최 부사장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차피 어르신들은 바뀌지 않거든요. 아무리 돈을 들이부어도 말이죠.”
최 부사장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반면 최 부사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은 임원들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가뜩이나 혁신 바람이 부는 회사에 이젠 칼바람이 불게 생긴 것이다.
임원 중 한 명이 나서서 질문했다.
“저도수 시장까지 확대한다면 상당한 금액의 마케팅 비용이 들 텐데요. 거기에 대한 대안은 있습니까?”
“네. 있습니다. 매체비를 절감할 예정입니다.”
“매체비 절감이요?”
“TV, 라디오, 신문 광고는 모두 지금의 3분의 1수준으로 낮출 수 있습니다.”
광고비가 대폭 절감된다는 말에 다시 한번 실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탁기준이 틈을 주지 않고 최 부사장에게 다시 질문했다.
‘역시 탁기준, 노련하네. 최 부사장은 아까부터 PT에 참여하면서 말을 섞고 싶어 했어.’
도혁은 속으로 탁기준의 진행에 감탄했다.
최 부사장은 적극적인 성격인 듯했다.
마이크를 끌어당기고 입술을 달싹이며 무언가 묻고 싶어 하는 게 눈에 보였다.
“부사장님께 한 번 더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혹시 가족이 있으십니까?”
“아이가 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이들과 같은 채널을 보십니까?”
“그럴 리가요. 제가 뿜뿜이를 볼 수는 없죠. 하하.”
뿜뿜이라는 말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조금 부드러워진 분위기에서 탁기준이 설명을 이어갔다.
“집집마다 세대 간 채널 쟁탈전이 치열할 텐데요. 여기에 해답이 있습니다. 2030은 비싼 시간대의 프로그램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S급, 그러니까 흔히 말하는 황금 시간대 말입니다.”
“주말 드라마 같은 시간 말이죠?”
“맞습니다. 그쪽보다는 오히려 심야 프로그램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탁기준이 방송 시간대별 매체비를 산정한 표를 화면에 크게 띄웠다.
“그리고 신문은 거의 보지 않습니다. 신문 집행 비용으로 저렴한 잡지와 인터넷, 그리고 영화관 광고를 할 것을 제안합니다.”
“영화관이요?”
“네. 저희의 CF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CF가 더 있다구요?”
놀란 최 부사장이 탁기준을 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탁기준이 미소 지으며 화면을 전환하자 화면 가득 비상구 지도가 펼쳐졌다.
“지금부터 성우 한진성 씨께서 영화관의 비상구를 설명해 주시겠습니다. 물론, 깨끗한 참소주의 캐릭터와 함께 말입니다.”
탁기준이 리모컨을 클릭하자 툭, 지도 위에 깨끗한 참소주 캐릭터가 등장했다.
“아니! 저건!”
최 부사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