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32화
시작됐다. 강태오 선배의 테스트.
“우리 동아리를 홍보할 광고 한 장 만들어봐. 즉흥적으로.”
이진우가 펜을 꺼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슥슥, 망설임 없이 종이 위에 궤적을 남기는 그의 손끝을 보고 모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 뭐야. 이거 카툰이니?”
“대박. 거의 프로급이잖아?”
단 4컷으로 동아리방의 풍경을 그려낸 이진우가 펜을 탁자 위에 놓았다.
한수철이 놀라 종이를 들어 올렸다.
“캐릭터별로 느낌을 표현했어. 이 첫 번째 컷이 나야?”
“네. 맞습니다. 첫인상을 그려봤는데 마음에 드십니까?”
“이건 명도혁이지?”
그림을 슬쩍 본 도혁은 민망함에 한쪽 눈을 가늘게 떴다.
이진우, 나 좋아하는 건 아는데 이건 아니지.
할리우드 배우처럼 잘생기게 그린 제 캐릭터의 모습에 도혁이 어이가 없어 웃었다.
강태오는 더 크게 웃어젖혔다.
“이 우락부락한 사람은 나냐?”
“네. 최종 보스 느낌이라 강하게 표현해 봤습니다.”
“근육질이고 뭐, 좋네. 이 자식 좋은 재주가 있어! 우리한테 딱 필요한 인재라고.”
그림을 잘 그리는 광고쟁이는 언제나 필요하다.
특히 물적 자원이 부족한 대학 동아리에서는 말할 것도 없지.
그림은 머릿속 상상을 구현할 수 있는 가장 간편한 방법이니까.
도혁이 이진우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기특해했다.
“태오 선배, 내가 신입 하나 잘 데려왔죠?”
“어. 합격! 그림도 잘 그리고 약간 똘끼도 있어 보이고. 넌 인마 이제 도망 못 가. 애드포인트에 들어오는 건 쉬워도 나가는 건 어려워. 너 잘못 걸렸다고!”
“그건 사실. 강태오 선배한테 걸렸으니까 오늘은 죽어라고 마셔야 할 거야.”
“설마 술이요?”
“그럼 물이겠냐?”
강태오가 벌써 몸을 일으키며 이진우에게 눈짓을 보냈다.
“요 앞에 우리 단골집 있어. 다 챙겨서 나오도록.”
“저기 제가 아직 수강 신청을 못 했는데요.”
“수강 신청? 여기 그거 한 사람 있냐? 어차피 종일 클릭해봤자 되지도 않아요. 술 마시고 밤에 다 같이 접속해 보자고.”
이미 수강 신청을 마친 도혁과 한수철이 서로 무언의 눈짓을 주고받으며 일어서는 순간이었다.
평생 안 울리던 동아리방 내선 전화가 울렸다.
“아씨, 놀라라. 뭐야. 저 전화기 살아 있는 거였어?”
“고담 동아리냐? 불길하니까 아무나 좀 받아봐!”
강태오의 호통에 가까이 서 있던 도혁이 수화기를 들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놀랍게도 이진태 학과장이었다.
-거기 명도혁이라고 있지?
“네. 교수님 제가 도혁입니다.”
-잘됐구만. 핸드폰 번호를 몰라서 말이지.
전과 신청서에 핸드폰 번호를 적어두었는데, 그 뒤죽박죽 쓰레기통 같은 교수실에서 무언가를 찾기는 어려웠나 보다.
-명도혁, 할 말이 있는데 지금 바로 학과장실로 올 수 있나?
“네. 알겠습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으나 동아리 멤버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학과장실로 발을 돌렸다.
정말 들어가기 싫은 학과장실이었다. 벌레가 튀어나올 것 같거든.
문을 열자 책이 마구잡이로 쌓인 책장에서 두꺼운 원서가 툭 떨어졌다.
발등에 맞았으면 골절될 뻔했다.
“괜찮은가? 이쪽으로 앉지.”
“네, 저기 학과장님. 제가 책을 좀 치워 드릴까요?”
저 원서를 머리에 맞았다면 사망하지 않았을까? 생명에 위협이 되지 않는 선까지라도 좀 정리해 드리고 싶습니다만?
“절대 안 돼! 이게 엉망인 것 같이 보이겠지만, 내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다고. 기준대로 정돈해 놓은 거라 다른 사람이 손대면 찾을 수가 없어. 커피 마시겠나?”
“네. 감사합니다.”
이런 걸 ‘정돈’이라고 부를 수도 있구나. 새삼 깨달으며 도혁이 자리에 앉았다.
“개강 첫날부터 왜 불렀는지 궁금하지?”
“네.”
“내가 성질이 급해서. 모레 참소주 경쟁 PT 같이 가자고.”
“네?”
‘네’가 ‘네?’로 변하는 데 삼 초도 걸리지 않았다.
이진태가 뭘 놀라냐는 듯 도혁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가려고 했던 거 아닌가? 듣기론 이번 기획안, 본인 아이디어였다면서.”
“정보가 빠르시네요.”
“정보는 무슨. 김철준이한테서 들은 건데. 딱 거기까지만 말해주더구만. 명도혁이 엄청난 걸 만들어 왔다. 광고도 명도혁도 내 거다, 뭐 이런 취지로 말했어.”
“아, 대표님께서 말씀하신 거군요.”
난감하다. 솔직히 타사 경쟁 PT까지 따라가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태강애드 기획팀으로 제안서가 넘어간 상황이었고, 개강까지 해버려서 여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대일기획 사외 고문인 이진태 학과장과 함께 그 자리에 나타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좀 곤란할 것 같습니다.”
“경쟁 PT 보는 게 큰 경험이 될 텐데.”
그 경험 전생에 질리도록 많이 했습니다, 학과장님.
속으로 말을 삼키며 다시 한번 고사했다.
“경험이야 되겠지만 다음번에 기회가 있으면 데려가 주세요.”
“흠, 중간에서 입장이 곤란해서 그런가?”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그럼, 따로 와. 내가 불렀다고 말해놓을 테니까.”
“혹시 친구와 함께 가도 되겠습니까?”
어차피 가야 한다면 한수철을 데려갈 생각이었다. AE를 지망하는 그에게는 큰 경험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하도록 해. 두 자리 따로 만들라고 할 테니까 꼭 참관하도록.”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배려는 이진태만 한 건 아니었다.
학과장실을 나오자마자 탁기준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이. 대학생. 학교는 다닐 만하냐?
“오늘 개강 첫날입니다만?”
-하루도 떨어져 있기 싫어서 그렇지.
“장난 그만 치십시오. 소름입니다.”
며칠 못 봤다고 반갑네, 탁기준.
도혁이 빙그레 웃으며 용건을 물었다.
“회사에 무슨 일 있습니까?”
-그건 아니고. 모레 PT에 올 거지?
“제가 가도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워낙 어려운 자리라.”
-이럴 줄 알고 전화했어. 당연히 와야지. 본인 아이디언데.
탁기준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꼭 와라. 프레젠터 누구게?
“어! 설마 선배가 합니까?”
-맞아. 나 이렇게 큰 PT는 처음이야. 당연히 팀장님이 하실 줄 알았는데 넘기셨어. 담당 AE가 직접 하라고 말이지.
“선배는 잘하실 겁니다.”
-그러니까 와서 응원하라고, 인마.
어차피 가게 될 팔자였구나.
도혁은 메시지로 장소와 시간을 받았다.
[9. 8. (월) 2시. 하정 주조 대회의실]
월요일 수업 많은데.
시간표를 찾아보다 뜻밖의 사실을 발견했다.
어? 이진태 학과장 수업 시간인데?
이 괴짜 교수는 첫 강의부터 휴강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교수가 째면 학생도 째야지 뭐.
도혁은 슬그머니 웃었다.
* * *
광고주를 찾아가는 일은 언제나 버겁다.
AE가 아니어도 그랬고, AE라면 더 부담스럽겠지.
도혁과 한수철이 하정 주조 사옥 앞에 서서 빌딩을 올려다보았다.
“처음이라서 그런지 떨린다. 너도 그러냐?”
“나도 그렇지 뭐. 일단 들어가자.”
방문증을 목에 걸고 대회의실 옆 대기실로 향했다.
말끔한 정장 차림의 탁기준이 발표를 연습하다 돌아보았다.
“어, 왔네! 후배들 앞이라 그런지 더 떨리는데?”
“전혀 안 떠시는데요? 여유가 넘치십니다. 그런 점을 나도 배워야 하는데.”
한수철이 탁기준을 보고 감탄했다.
그러고 보면 탁기준의 발표를 직접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와 작업을 많이 했지만 원수에 가까웠고, 그땐 PT 구경을 다닐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나름 제작팀 에이스 카피라이터였으니까.
“마지막에 집중하셔야 하니까 저희는 나가 있겠습니다.”
“그래. 있다가 보자.”
대회의실 밖으로 나오자 막 김철준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있었다.
놀랍게도 이진태 학과장도 함께였다.
“안녕하십니까?”
“오, 여기 우리 신입 직원들이 먼저 와 있었구만. 인사해. 이진태 교수님.”
“우리 과 학생들이구만. 일찍 왔네.”
굳이 신입 직원이라고 힘주어 말하는 김철준이나 우리 과 학생들이라고 강조하는 이진태나 서로 팽팽하게 날을 세운 모습이었다.
작은 것에도 예민하게 대립하는 게 경쟁 PT의 날이 맞기는 한 모양이다.
도혁은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한수철과 함께 지하 카페로 내려갔다.
“아우 살 떨려. 두 분 표정 봤지? 대표님 비장하시던데.”
“PT 날이니까 그렇겠지? 그래도 저 정도면 양호한 편 아닌가? 나름 농담도 하시고.”
“그게 농담이냐?”
한수철이 커피를 들이켜며 팔에 돋은 소름을 닦았다.
“아직 긴장할 때는 멀었는데? 나중에 회의실 들어가면 느낄 거야. 살얼음판 그 자체일 거다.”
“숨도 제대로 못 쉴 것 같아. 신입 주제에 숨이라도 크게 쉬었다가는. 으.”
하긴 신입이 경쟁 PT에 들어가다니 이례적인 일이긴 했다.
최대한 나이가 들어 보이도록 입고 왔지만, 광고주가 이상하게 여길 수도 있고.
한수철 말대로 조용히 구경만 할 생각으로 회의실 맨 뒷자리에 앉았다.
곧 태강애드와 대일기획, 그리고? TL 코리아 순으로 팀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TL 코리아는 직원들이 엄청 젊다. 그치?”
“그러네.”
“근데 복장이 너무 자유롭지 않아? 아무리 그래도 경쟁 피티인데.”
한수철의 말대로 자유로운 분위기의 TL 코리아였다.
젊고 유능한 직원이 많았고 외국계답게 철저한 실적주의로 알려져 있었다.
그 때문인지 발표자를 제외한 직원들은 세미 정장에 가까운 캐쥬얼을 입고 있었다.
역시 아직은 한국 시장 분위기 파악이 안 된 모양이었다.
문이 열리고 하정 주조 관계자들이 들어오자 웅성거리던 실내가 조용해졌다.
회의장에 정적이 감돌고 사회자가 진행을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이 자리에서 하정 주조 깨끗한 참소주 경쟁 프레젠테이션이 있을 예정입니다. 곧 부사장님께서 입장하시면 박수로 맞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최 부사장이 빠른 걸음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짧은 인사말을 남기더니 곧바로 진행하라고 지시했다.
‘급한 성격이구나. 하긴 광고주 중에 안 급한 사람이 있나.’
빠른 마감, 높은 퀄리티.
광고주라면 하나같이 요구하던 사항 아니었던가.
자고 일어나면 트렌드가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시장이었다.
그만큼 이 바닥은 전쟁터였고, 지금 명도혁은 전쟁터의 가장 격전지에서 피 튀기는 PT를 보게 될 것이다.
“순서는 제비뽑기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각 팀 대표는 앞으로 나오셔서…….”
“아니. 제가 바로 지명하겠습니다.”
“네. 그러시죠.”
세 광고대행사의 동의로 최 부사장이 지명하는 대로 발표하기로 했다.
‘급한 데다가 독단적이기까지. 이거 쉽지 않겠는데?’
도혁이 속으로 생각하는 순간 최 부사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눈에 젊어 보이는 팀부터 시작하죠. TL 코리아, 대일기획, 마지막으로 태강애드 순이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하시죠.”
광고주의 말에 이의를 제기할 대행사는 아무도 없었다.
최 부사장이 눈짓을 보내자 사회자가 TL 코리아를 호명했다.
“TL 코리아 발표자는 앞으로 나와주세요.”
전쟁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