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29화
한숨 돌리며 콘티를 바꾸던 도혁의 귀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요. 콘티 그대로 가시죠.”
“어! 전서윤 씨!”
“저는 기존 콘티를 원해요.”
아니, 잠시만.
물론 몇 분 전에 올라운드 플레이어 어쩌고 하면서 광고계의 괴물이 되겠다, 다짐하기는 했지만 말이지.
아무리 그래도 연기는 아니지! 그건 아니라고.
도혁이 난감한 표정으로 전서윤을 바라보았다.
“전서윤 씨 제가 등짝으로 제대로 연기해 보겠습니다.”
“그럼 등짝도 찍고 원안대로도 찍으면 어떨까요. 들어오면서 들었는데 말씀하신 대로 광고주만 보는 샘플 CF잖아요. 뭐 어때요.”
“제 얼굴이 제품에 대한 몰입을 방해할걸요.”
“아니요. 자신의 이목구비에 자신감을 가지세요.”
그런 말이 아니잖아.
솔직히 훈훈하다는 말은 많이 듣고 살았다.
십수 년 전으로 돌아와서 그런지 젊어진 외모에 대한 자신감도 차 있었고.
다만 연기는 정말 자신이 없었다. 그 연예계를 동안 봐온 경험상 연기는 타고나는 것이다.
전서윤은 자신이 재능을 타고났다고 세상 사람이 다 그런 줄 아는 모양이었다.
“전서윤 씨. CF도 연기예요. 얼굴로만 하는 게 아니라구요.”
“그건 알지만 혼자 독백하는 것도 아니고. 저도 연기하기가 힘들어서 그래요.”
“후우. 정 그러시면 전서윤 씨 말대로 한편은 콘티대로 촬영하겠습니다. 대신 제 등짝도 한번 연기하게 해주시죠. B 안은 전서윤 씨 연기만으로 가겠습니다. 원 톱으로 찍으면 얼마나 아름다운 광고를 만들 수 있는지 보여 드릴게요.”
그렇게 A, B 안의 촬영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그리고 명도혁은 팔자에도 없는 CF 모델로 첫 입봉을 하게 되었다.
* * *
사내 경쟁 PT의 전날 밤.
팀원들이 마지막으로 둘러앉아 최종 점검을 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발표를 맡은 한수철이 연습하러 가고 탁기준이 PT에 관한 소식을 전해주었다.
“하정 주조가 원래 우리와 오래 거래했는데 이번엔 경쟁 PT로 간다고 해.”
“그럼 어떻게 되는 거예요? 우리가 기획1팀 이겨도 확정되는 게 아니네요?”
“맞아. 훨씬 더 빡빡해졌지. 무려 경쟁사가 대일기획이거든.”
탁기준이 눈살을 찌푸리며 냉수를 들이켰다.
태강애드에 P대 광고홍보학과 출신이 많다면, 대일기획에는 탁기준의 S대 선배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탁기준은 태강을 선택했고.
“얘들아. 내가 다른 데는 모르겠지만 대일은 꼭 이기고 싶거든?”
“네. 이기실 겁니다.”
“명도혁이 이번에도 가볍게 말하는데 만만치가 않아.”
그럼. 잘 알지. 이 업계에서 대일기획 밟기가 쉽지 않다는 거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탁기준은 모르는 게 있다.
명도혁이 업계 1위인 대일기획과 붙었을 때 승률 100%였다는 사실 말이다.
“걱정 마세요. 대일기획만큼은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겁니다.”
“그래. 명도혁이 이긴다니 믿어보자. 기획안 자체는 좋아. 명도혁이라고 신인 남자 배우 연기도 아주 좋았고 말이지.”
“자꾸 놀리실 겁니까?”
도혁이 웃으며 탁기준에게 물었다. 그동안 퍽 궁금했던 질문이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대일기획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십니까?”
“아, 내가 꼭 이기고 싶다고 해서 그러는 거야? 원래 승부욕 터지기도 하고, 사실 좀 밟아주고 싶은 대학 동기가 거기 다니고 있어서.”
“탁기준 선배 눈 밖에 났다니 재수가 없는 사람이네요.”
“그렇지? 내가 또 한다면 하는 놈 아니냐.”
아무튼 대일기획과의 일전에서 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직속상관이나 다름없는 탁기준과 김철준 대표가 벼르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대일기획과 마주하려면 기획1팀부터 이겨야 한다. 어쩌면 대일기획보다 더 만만치 않을지도 모를 기획 1팀이었다.
도혁은 회의실 밖으로 나와 발표를 연습하고 있는 한수철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한수철 파이팅!
오글거리는 응원을 마음속으로 보내는 도혁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맺혔다.
우리는 반드시 이길 거니까.
결전의 아침이 밝았다.
밤을 새우다시피한 팀원들의 얼굴에 결의가 가득했다.
심사위원석에 김철준과 국장급 임원들이 착석했다.
사회를 맡은 기획팀 팀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안녕하십니까. 깨끗한 참소주 사내 경쟁 PT의 사회를 맡은 기획팀 팀장입니다. 이번 PT는 기획1팀과 인턴1팀의 대결로, 이긴 팀의 시안으로 타사와 경쟁 PT에 참여하게 됩니다.”
“들어오는 회사가 대일기획 하나가 맞습니까?”
“알아본 바에 의하면 대일기획과 TL 코리아가 들어온다고 합니다.”
들러리까지 세웠구만.
도혁이 눈썹을 찌푸렸다.
미국 회사인 TL 코리아가 한국에 사업을 확장한 지 일 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TL 코리아는 곧 한국 광고업계 5위 내의 매출 규모로 성장하게 된다.
지금처럼 가리지 않고 경쟁 PT란 PT는 모조리 들어간 것이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곧 시장의 들러리가 아닌 메인으로 자리 잡는다.
하지만 이번 PT에서는 큰 성과를 보지 못할 것이다.
아직 한국 시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때였다.
특히 소주같이 독특한, 지역색을 가진 토종 상품의 마케팅을 맡기엔 무리가 있었다.
결국 태강애드와 대일기획의 대결이라는 말이었다.
기획팀 팀장이 진행을 이어갔다.
“오늘 채택된 기획과 시안은 전체 회의를 거쳐 보강한 후에 대일기획과의 PT에 참여할 예정입니다.”
“내가 직접 컨펌하고 예산 지원도 할 거야. 그러니까 모두 긴장하고 진행하도록. 빨리 시작하지.”
김철준 대표가 기획팀 팀장을 재촉했다.
곧바로 기획1팀의 발표가 시작되었다.
“안녕하십니까? 기획1팀의 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저희 팀은 굉장히 불리한 여건에서 시작했는데요. 배신자가 있었기 때문이죠.”
“배신자라면?”
“탁기준 대리 말입니다. 저희를 버리고 인턴 팀을 선택했더군요.”
1팀 발표자의 말에 탁기준이 한쪽 손을 들어 화답했다.
기획1팀 팀원 전원이 짓궂은 눈빛을 반짝이는 그를 째려보았다.
농담으로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이끄는 걸 보니 제법 노련한 프리젠터가 분명했다.
드디어 본격적으로 기획1팀의 발표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광고주의 요구 사항을 철저히 맞추어가며 시장의 확장에 주목했습니다. 기획안 먼저 보시겠습니다.”
기획안은 완벽했다.
포지셔닝과 메인 타깃 설정, 그리고 트렌드를 반영한 기획, 더불어 광고주의 요구 사항인 공간적 시장 확대 방안까지.
“물류 비용의 한계를 감안하여 저희는 보다 넓은 시장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최근 하정주조에서 가츠 맥주를 인수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포착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 부분은 예민한 사안인데?”
김철준의 눈매가 날카롭게 올라갔다.
하지만 기획1팀의 발표자는 당황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가츠 맥주의 대전, 대구 공장을 활용한다면 물류비 절감을 꾀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또한 지역을 대표하는 미녀 모델을 선정할 것을 제안합니다.”
“지역을 대표하는 모델이라고?”
“네. 그 지역의 출신으로 모델을 선정, 지역 광고 위주로 전파와 옥외광고를 진행하면 어떨까 합니다.”
제작에 잔손 엄청 들겠구만.
도혁이 속으로 말을 삼켰다.
기획팀 위주로 아이디어 회의를 한 것이 분명했다.
모델이 바뀌면 디자인이나 카피도 바뀌게 마련이었다.
‘이렇게 기획 회의하고 컨펌받고선 제작팀에 던져 버리는구나.’
그동안은 제작팀에 넘어온 자료만 확인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뒷담화를 하는 정도였다고나 할까.
‘제작이 기획국 하청이냐고 욕도 참 많이 했었는데.’
하지만 지금은 전체적인 판이 보이는 듯했다. 카피라이터로서만이 아니라 진짜 광고인으로서.
도혁은 찬찬히 기획1팀의 기획안을 뜯어보았다.
역시 완벽했다. 매체 설정까지 완벽하게 안전한 기획안. 그리고 그것은.
완벽하기만 했다.
미소 짓는 도혁과 탁기준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됐다! 끝났어.
엄숙한 분위기라 말을 입 밖에 꺼내지 못했지만, 둘은 승리를 예감한 미소를 함께 지었다.
김철준이 마이크를 들었다.
“노련하네. 태강애드를 대표하는 에이스 팀다워. 지역별 모델 전략도 괜찮은 것 같고.”
“감사합니다.”
“매체 전략은 이대로 가는 건가? 손 안 봐도 되겠어? 매체국 국장, 어떻게 생각해?”
“제 생각에는 기획1팀의 4060 타깃으로 간다면 신문광고를 추가하면 좋겠습니다. 시사 잡지 쪽도 넣고, 다방면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김철준이 미간을 좁히며 기획1팀의 발표자를 바라보았다.
“질문 하나 하지. 광고주가 바뀐 걸 알고 있나?”
“네? 광고주는 하정 주조 아닙니까?”
차분함을 잃지 않던 기획1팀 발표자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하정 주조야 맞지. 내 말은 기업의 실질적인 오너가 바꿨다는 말이야.”
“아, 그건 알고 있습니다. 창업주에서 부사장인 아들에게 실권이 넘어갔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그 사람에게 최종 결정권이 있어. 그리고 최 부사장은 아버지의 사람들을 숙청 중이지.”
“…….”
김철준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기획1팀의 발표자가 땀을 흘렸다.
“돈 나오는 주머니가 젊다, 이 말이야. 자, 못 알아들었으면 됐고. 다음은 우리 파릇파릇한 인턴팀 준비됐나?”
“네. 그렇습니다. 지금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한수철이 다부진 표정으로 일어섰다.
늘 그렇듯이 무대에 섰을 때 더 침착해지는 모습이었다.
“인턴팀 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공교롭게도 저희 팀은 방금 보신 기획과는 방향성이 반대입니다.”
“반대라고?”
한수철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오자 김철준이 자리를 고쳐 앉았다.
한수철은 뚫어지게 바라보는 김철준의 눈빛을 피하지 않으며 발표를 이어갔다.
“네. 저희 인턴팀에서는 기획1팀 선배님들의 기획 방향과는 정반대의 마케팅 방안을 제안합니다. 먼저 기획안을 보시죠.”
화면에는 깨끗한 참소주의 메인 색채인 연초록으로 깔끔하게 꾸민 기확안이 펼쳐졌다.
“하정 주조의 깨끗한 참소주는 현재 시장 1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광고주는 시장의 지역적 확장성을 요청했고, 저희는.”
뚝 말을 끊은 한수철이 좌중을 둘러보았다.
심호흡한 그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저희는 공간적 확장성과 더불어 타기팅에 주목했습니다.”
한수철이 리모콘을 누르자 화면에 크게 2030이라는 숫자가 박혔다.
“2030, 저희는 소주의 메인 타깃을 2030인 대학생과 직장인으로 잡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자 합니다.”
김철준이 한쪽 눈을 가늘게 뜨고 한수철에게 물었다.
“젊은 친구들은 소주 잘 안 먹지 않나? 발표자 한수철 씨는 어때?”
“예. 저 역시 독주는 썩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 친구들도 그렇구요. 세대가 바뀌어서 엠티 때나 억지로 먹곤 합니다.”
“그런데 왜 이런 타깃을 선정한 거지?”
“저도수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서입니다. 2030을 현재의 소비자이자 미래의 소비자로 만들기 위한 방안이죠. 저희는 시장 1위인 깨끗한 참소주 브랜드의 저도수 시장 확장을 제안합니다.”
“저도수 시장이라고?”
김철준의 눈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