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27화
“일단 어떤 CF인지 들어나 보죠. 제품이 어떤 건데요?”
“소주입니다.”
“네??”
도혁은 당황하지 않고 미리 준비한 기획안을 재빨리 내밀었다.
전서윤의 얼굴이 점점 굳어갔다.
“죄송하지만 지금 술에 취해서 글자가 잘 안 보이네요. 방금 하신 말씀은 없던 걸로 하시죠.”
“저기 붙어 있는 소주 광고 같은 게 아닙니다!”
“더 들을 말은 없는 것 같아요. 수현아, 나가자.”
“잠시만요.”
도혁이 일어서려 하는 그녀를 보고 급하게 기획안을 뒤집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슥슥, 러프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포스터를 5초 만에 그려 전서윤에게 들이밀었다.
그녀가 그림을 보자마자 빵 터지고 말았다.
“이게 뭐예요. 미치겠다.”
“마음에 드십니까?”
“아, 정말 명도혁 씨 못 말리겠어요.”
팔다리만 있는 졸라맨이 소주를 마시고 있는 그림.
얼굴을 크게 클로즈업해 강조했다.
다행히 눈코입은 겨우 붙어 있었다.
“잠시만요. 콘티도 그려보겠습니다.”
조금 풀어진 기색의 전서윤을 보고 안심한 도혁이 다시 슥슥, 콘티를 그리기 시작했다.
아직 기획안도 확정되지 않은 시점이었지만 대충 머릿속에 있는 걸 옮겨 보여주었다. 너무 급했거든.
“소주 CF를 이렇게 한다구요? 난 이런 컨셉 처음 보는데.”
“네. 거슬리지 않고 신선하죠?”
“보통은 섹시한 느낌으로 가잖아요. 저 같은 얼굴은 안 먹힐 거예요.”
“아니요. 깨끗하고 우아하게 찍을 예정입니다.”
“광고주가 싫어할 텐데요.”
“아니요. 반드시 좋아하게 될 겁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 거거든요.”
도혁의 진지한 말에 전서윤의 얼굴에서 웃음이 걷혔다.
“이건 너무 파격적이네요, 흠.”
“저는 곧 소주 광고에 여배우와 아이돌까지 등장하게 될 거라고 보고 있습니다. 기존의 시장 판도가 변화하거든요.”
“선택하기 어렵네요. 명도혁 씨, 저 만약에 이거 찍는다면 첫 CF예요. 솔직히 말하자면 콘티안은 마음에 들거든요. 근데 제품이 소주라는 게 마음에 걸려요.”
“최대한 전서윤 씨의 아름다움과 청순함을 강조할 수 있게 비주얼에도 신경 쓰겠습니다. 물론 실물을 다 담지는 못하겠지만요.”
“지금 저 섭외하려고 입바른 소리 하시는 거죠?”
“진심입니다. 전서윤 씨는 분위기가 예뻐요.”
“분위기가 예쁘다라.”
전서윤이 입속으로 말을 굴리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도혁은 진심을 다해 그녀를 설득했다.
아부하려는 말이 아니라 전서윤만의 분위기와 아우라는 카메라에 다 담지 못할 만큼 아름다운 것이었고.
지금은 그게 너무 필요했으니까.
전서윤은 휘리릭 그려낸 졸라맨 포스터를 잠깐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경수현에게 물었다.
“수현아, 나 이거 찍으면 대표님한테 머리카락 잘릴까?”
“설마, 우리 회사가 청학동이냐? 그리고 대표님 은근 누나 어려워해.”
“에이, 모르겠다. 질러 버려. 그까짓 거 잘리면 가발 쓰지 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전서윤 씨!”
가발 투혼을 다짐하는 전서윤은 역시, 화끈한 여자였다.
도혁은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잘못되면 나 도혁 씨가 책임져야 해요.”
“네. 약속드리겠습니다.”
“무슨 책임을 어떻게 질 건데요?”
“가발 사드리겠습니다.”
“네? 하여간 못 이기겠어요. 도혁 씨는.”
다시 눈살을 곱게 접으며 웃는 전서윤은 화보 그 자체였다.
정확히 도혁이 그렸던 머릿속의 포스터와 일치하는 모습이었다.
* * *
한숨 돌렸다.
모델이 확정되고 AE들이 기획안을 만들기 시작했다.
잠깐의 틈을 낸 도혁은 외출을 내고 학교로 향했다.
전과를 위한 면접이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 말은 곧, 오늘이 이진태 학과장을 만나는 날이라는 뜻이었다.
P대 광고홍보학과 이진태 학과장.
대한민국 광고 1세대이자 전설의 마케터로 이름난 이진태.
도혁이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전과했다고 봐도 좋을 만큼 존경하는 광고인이었다.
자타 공인 국내 1위의 광고대행사 대일기획의 마케팅 총괄로 최연소 임원으로 고속 승진했던 그는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다시 국내 최연소 광고홍보학과 학과장을 역임했다.
그의 역저 ‘마케팅 카페’는 광고계의 필독서로 자리 잡은 지 오래.
도혁 역시 그의 책을 보고 광고의 꿈을 키웠다.
‘드디어 만나는 건가.’
학과장실 문 앞에서 심호흡을 하고 막 노크를 하려던 찰나였다.
“영문과에서 우리 과로 전과 오려는 학생이구만. 맞나?”
“네. 학과장님. 명도혁이라고 합니다.”
“들어와요.”
민머리에 청바지 차림, 그리고 트레이드마크인 뿔테 안경이 친근했다.
본인이 쓴 광고 서적의 표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서 있는 그를 보자 불쑥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도혁은 학과장실에 들어서자마자 일단 놀랐다.
너무 지저분해서.
책상 위에 가득한 테이크아웃 커피 컵과 쓰레기, 뒤죽박죽 얽힌 잡동사니. 포스트 잇이 불규칙하게 붙어 있는 더러운 벽면까지.
심지어 도서관을 방불케 할 만큼 엄청나게 쌓인 책은 아무 데나 진열되어 있었다. 물론 이런 걸 진열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더러워서 놀란 모양이구만. 내가 좀 괴짜라는 소문 많이 들었을 텐데.”
“아, 아닙니다.”
“뭐, 자네가 아니라고 하니 아닌 걸로 하고. 광고 왜 하려고 하는 건가? 광고쟁이 한번 발 들이면 빼기 쉽지 않아.”
하긴 그건 맞는 말이다. 회귀해서도 광고 바닥을 뜨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매력인지 마력인지, 행운인지 천형인지 알 수 없지만.
도혁이 저도 모르게 조금 웃자 이진태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대학생 같지 않게 여유가 넘치는구만. 자, 그럼 바로 면접 봅시다. 우리 과 왜 지원했습니까? 취업은 영문과가 더 잘될 텐데, 진로도 다양하고.”
“광고를 체계적으로 배워보고 싶어서 지원했습니다. 광고 동아리에서 먼저 광고를 접했고, 그곳에서 적성을 찾았습니다. 현재는 태강애드에서 대학생 인턴십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태강애드?”
학과장이 눈살을 가늘게 뜨며 안경 위로 눈을 치떴다.
태강애드는 시쳇말로 대일기획의 작은집이다.
태강애드 대표 김철준은 대일기획 출신이다.
대일기획에서 광고를 배웠고 국장급이 되었을 때 독립했다.
따라서 두 회사는 친한 듯 은근히 예민한 관계였다.
학과장이 도혁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내가 철준이 신입 때 멘토였는데. 지금 김철준이 밑에 있단 말이지? 하여간 그 자식, 머리도 좋아. 대학생 인턴십, 굿 아이디어네.”
“네. 인턴십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즐겁게 일하고 있습니다.”
“그거 다행이구만. 어디서 시작하든지 재밌으면 된 거지.”
“일하다 보니 광고에 대한 확신이 들어서 전과까지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좋아. 몇 가지만 물어보지.”
“네.”
“좋은 광고란 뭐라고 생각하나?”
좋은 광고. 굉장히 포괄적인 질문이다.
명도혁이 아주 오랫동안 고민해 왔던 명제였다.
도혁은 망설임 없이 학과장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움직이는 광고가 좋은 광고라고 생각합니다.”
“움직인다고?”
“네. 광고인은 광고로 끊임없이 무언가를 움직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줄 수 있나?”
“트렌드를 움직이고,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여서 행동까지 이어지게 하는 광고를 말하는 겁니다. 광고를 열심히 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걸 보고 싶게 만들고 감동과 울림을 주고 마지막으로는 지갑을 열게 만드는 것, 그 모든 과정이 광고라고 생각합니다.”
도혁의 말에 학과장이 의자에 기대었던 등을 떼어냈다. 그러곤 툭 과제 하나를 던졌다.
“이론과 철학은 잘 들었고. 그럼 그걸 어떻게 활용하는지 한번 볼까? 이 커피 한 잔으로 카피 하나 만들어봐. 내 마음을 움직여서 지금 당장 팔아보라고.”
테이블 위에 놓인 아메리카노 한 잔.
즉흥적으로 떨어진 과제에 도혁은 잠시 커피 잔을 바라보았다.
“우주에서 가장 작은 커피집, 카페 아메리카노.”
“뭐?”
“문득 떠오른 카피입니다. 하나 더 할까요? 선배, 가을 타요? 아니, 커피 타. 이건 너무 유치한가요?”
“뭐야 이거!”
이진태가 어이없다는 듯이 도혁이 말한 카피를 메모하기 시작했다.
“아니, 가을 그거 안 유치해. 시즌 광고로 딱인데. 선수네. 명도혁 씨!”
전생의 팀에서 컨펌한 커피 카피들이었다.
커피 카피는 좀 오글거려야 제맛이기에 간지러운 것들을 가져와 봤다.
제일 성공했던 캠페인이기도 하고.
학과장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멍청하게 커피를 들이켰다.
훅 들이부은 뜨거운 커피에 인상을 확 찌푸리더니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솔직히 큰 기대는 안 했거든. 광고 전공자도 아니고 이제부터 배우면 되지 싶었는데, 이렇게 되면 내가 기대라는 걸 좀 해도 되겠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요즘 사는 게 무료했는데 2학기가 기대되는데? 재밌어지겠어.”
“그럼 합격인가요?”
“당연히.”
학과장이 뭘 그런 걸 묻느냐는 표정으로 도혁에게 악수를 청했다.
“면접 끝났어. 다음 학기부터 우리 과에서 수업받도록. 그리고.”
학과장이 도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김철준이한테 가서 전해. 정신 똑바로 안 차리면 명도혁 대일기획으로 데려갈 거라고 말이지.”
“아, 제가 대표님께 그런 말을…….”
“내가 전화할까? 그래야겠구만.”
학과장의 눈매가 날카롭게 빛났다.
이진태 학과장은 대일기획을 퇴사했지만 계속 사외 고문으로 일하고 있었다.
도혁이 탐난다는 말을 대놓고 하며 김철준에게 전화를 한단다.
즉흥적이기로 소문난 그답게 벌써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대일기획이든 어디든 가려면 지금 태강에서 하고 있는 PT를 이겨야 합니다만?
도혁은 김철준과 통화하고 있는 학과장의 모습을 겸연쩍게 바라보았다.
“뭐? 경쟁 PT? 인턴한테 그런 것도 시키나? 악덕 기업주 같으니라고. 아니, 일레라 가구를 따 왔었다고? 이거 보통내기가 아니구만.”
듣고 있기 쑥스러운 대화들이 오고 갔다.
민망한 마음에 한 귀로 듣고 흘리고 있었는데, 마지막 말에는 귀 끝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소주 광고 PT 날에 구경 좀 가야겠구만.”
대일기획 사외 고문이 왜 남의 회사 PT를 구경 온다는 거지?
도혁은 의아해 학과장을 바라보았다.
“맞아. 알고 있었구만. 대일기획에서도 깨끗한 참소주 PT 준비하고 있어. 이번에 뺏길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라고. 광고주도 명도혁이도 말이지.”
저걸 농담이라고 하는 건가.
승부욕 터지는 우리 김철준 대표님, 눈을 부라리고 있겠구만.
주먹을 불끈거리며 임원들을 닦달하고 있을 회의실 모습이 절로 그려졌다. 많이 당해봤거든.
대일기획에 은근히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김철준이었다.
거기다 인턴에 불과하지만 직원을 대놓고 빼 간다는 말을 듣고 발끈하지 않을 대표가 어디 있을까?
도혁은 저절로 새어 나오는 한숨을 겨우 삼켰다.
일촉즉발. 그렇게 큰집과 작은집, 대일기획과 태강애드의 자존심을 건 승부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