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26화
설문 결과가 나왔다.
다시 모여 앉은 1팀 팀원들이 회의를 시작했다.
탁기준은 CF 현장으로 출장을 가서 부재중이었다.
“역시 도혁이 말대로 매체 선호도 조사하기를 잘했어. 의외로 2030 세대는 정말 TV를 안 보더라고. 특히 공중파는 몇몇 프로그램을 제외하곤 선호도가 거의 없어.”
“본다고 해도 케이블 TV 위주일 거야. 음악 방송이나 영화, 게임 채널 정도가 인기 있을 거고.”
N넷 등 음악 방송과 게임 TV 등의 인기가 높았던 시절이다.
특히 케이블 TV가 보급되면서 스포츠 전문 채널도 상승세였고.
도혁이 자료를 훑어보며 말을 덧붙였다.
“극장 쪽도 괜찮을 것 같네. 2030이 영화 많이 보잖아. 매체 집행비도 저렴하고.”
“문제는 광고주야. 그래도 TV, 라디오 내놓으라고 할 거 같은데.”
“극장 광고 특징을 알면 선호할걸? 강제 노출되잖아.”
“하긴, 그게 최고 장점이기는 해.”
영화가 시작할 때까지 억지로라도 볼 수밖에 없는 극장 광고.
타깃만 맞으면 이만큼 노출에 유리한 광고도 드물었다.
“솔직히 강제 노출인 만큼 짜증도 많이 나. 난 영화 광고 좀 싫더라고. 가둬놓구선 억제로 보게 하잖아.”
최민아의 말에 서인기도 끄덕이며 동조했다.
“맞아. 타깃은 딱 맞지만 이 짜증 유발을 막는 게 포인트일 것 같아.”
“오케이. 이해했어. 그 부분은 이렇게 해결하면 어떨까?”
도혁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자, 영화 시작 전에 억지로 꼭 봐야 하는 게 광고뿐이야?”
“광고 말고 뭐 있나? 비상구 안내하고 뭐, 그 뒤로는 계속 광고의 연속이지.”
“맞아. 비상구 안내도 강제로 봐야 해. 어차피 봐야 하는 거니까 그걸 광고와 묶으면 어떨까?”
“뭐??”
“뭐라고?”
팀원들이 동시에 소리를 지르자 도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왜 소리는 지르냐. 나 귀 안 먹었다.”
“미안. 너무 놀라서. 다시 구체적으로 좀 말해봐.”
“잘 들어. 영화 시작 전 비상구 안내를 깨끗한 참소주 병이 하는 거야. CG로 귀엽게 만들어진 캐릭터가 지도 속을 돌아다니면서 안내하는 거지.”
“와! 그 정도는 구현 가능할 것 같은데?”
“그 비상구 안내 직전에 광고를 트는 거야. 각인할 수 있게.”
“신박한 캐릭터로 비상구 안내를! 대박, 대애박!”
한수철이 도혁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바로 매체 전략이라는 거구나. 와, 지금 뭔가 툭,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야.”
“만날 TV 몇억, 라디오 몇억 이렇게만 제안이 들어갔을 거야. 신선하게 한번 가보자.”
“명도혁 이거 진짜 먹힐 거 같아. 얘들아 그렇지 않아?”
팀원들이 소리를 지르고 최민아는 벌써 소주병 모양의 캐릭터를 그리고 있었다.
“디자인팀, 소주병 캐릭터 러프하게라도 그릴 수 있지?”
“그럼, 내가 일러스트 전문이야.”
어, 알고 있어. 최민아 실력 아니까 생각해 낸 거지.
도혁이 속으로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자, 그럼 설문에 매체 전략 수립안도 대충 나왔으니 메인 컨셉부터 잡아볼까? AE들이 생각해 놓은 거 있어?”
“타깃이 젊고 깨끗한 참소주가 타 지역에서는 인지도가 낮으니까 젊다, 새롭다, 시작한다 이런 쪽으로 가닥을 잡으면 어떨까 하는데.”
“시작이라. 시작, 젊음, 순수…….”
모두 흩어진 단어들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도혁이 생각해 두었던 기획안을 들이밀었다.
“시작하는 연인은 어때?”
“연인?”
도혁의 말에 AE들이 메모하기 시작했다.
정진수가 피식거리며 말을 보탰다.
“술 마시고 시작하는 연애가 많기는 해. 나도 그랬고.”
“하긴 취중 진담이니까. 술 마시면 용기가 차올라서 고백도 하고 그러잖아.”
“나는 좋은데? 신선한 느낌도 들고, 설레기도 하고, 무엇보다 2030에 어필하기 딱인 거 같아.”
한수철이 동감을 표하자 모두 끄덕였다.
그가 회의에서 나온 내용을 정리해 요약했다.
“자, 내가 정리해 볼게. 시작하는 연인을 컨셉으로 잡고 젊고 새로운 시작을 어필할 거야. 매체는 젊은 타깃을 중심으로 기존 TV, 라디오에 극장 광고 등 보조 매체로 따로 제안이 들어갈 거고. 반반주 캠페인은 어떻게 연결하면 좋을까?”
“반반주는 술집마다 포스터로 들어가는 게 좋을 거 같아. CF 모델 얼굴 크게 넣어서 말이지.”
“참, 모델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김윤기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연인 컨셉은 모델이 제일 중요할 것 같아. 여자 친구 하고 싶은 이미지의 여자 모델이 좋을 텐데. 처음 도혁이가 말했던 청순하고 깨끗한 느낌의 모델 말이야.”
“그러니까 말이다. 현재로서는 그게 제일 큰 관건이야.”
“지난번처럼 사전 CF를 만들어가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쉽지 않겠지?”
기대 가득한 여러 눈동자가 도혁을 바라보았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 삼고초려라도 해봐야지.”
“생각해 놓은 사람이 있기는 한가 보네.”
“그렇긴 한데 쉬운 상대가 아니야. 아주아주 벽이 높은 모델이지.”
“그래도 한번 뚫어봐. 명도혁은 할 수 있어! 정 안 되면 우리 다 같이 가서 드러눕지 뭐.”
한수철의 말에 도혁은 속으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전생에 한수철이 전서윤 섭외에 여러 번 실패했거든.
드러눕는다는 말도 몇 번 들었었는데 끝내 한수철은 월드 스타 전서윤의 벽을 넘지 못했다.
전서윤은 은근히 까다롭고 좋은 작품만 골라서 출연하기로 유명했다.
해외 영화제 수상 이후로는 공익광고조차 거의 출연하지 않았다. 특히 상업 광고는 아무리 금액이 높아도 거절했었다.
워낙 이미지가 좋아 광고주들이 여러 번 지명 구매했지만, 끝내 태강애드는 그녀를 섭외하지 못했지.
한수철이 엄청 비통해했는데.
도혁은 웃으며 한수철의 어깨를 툭 쳤다.
“일단 내가 먼저 부딪혀 볼게. 해보고 안 되면 다른 모델 알아봐야지 뭐.”
“그럼 도혁이가 아름다운 그녀를 모시고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기획 초안 잡아볼게.”
“디자인팀은 일단 캐릭터 작업에 집중하고, 메인 컨셉은 이대로 진행하는 걸로 콜?”
“콜!”
콜을 외치는 팀원들의 목소리가 드높았다.
복잡하게 얽혀 있던 실타래가 조금씩 풀리는 느낌이었다.
도혁은 전생에서 겪었던 캠페인 성공 사례들을 요리조리 맞춰보며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어 나갔다.
어쩌면 회귀 전보다 더 괜찮은 광고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트렌드를 더 빨리 선도하고 시장을 개척하는 쾌감이 짜릿하다고나 할까.
하지만 지금은 그걸 실현하기 위해 그녀를 데려와야만 한다.
유비가 제갈공명을 모셔 왔듯이.
* * *
배우 전서윤과 자리를 만드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동안 제법 친해진 경수현에게 부탁해 셋이 함께 식사를 하기로 했다.
경수현은 나이도 비슷한 데다 또래보다 진중한 면이 있어 도혁과 잘 통했다. 물론 도혁은 회귀해서 정신연령이 높은 거였지만.
“도혁이 형은 사회생활 경험이 별로 없을 텐데 팀장급 같아요. 얘기하다 보면 이 사람이 이십 대가 맞나 싶다니까요.”
“너도 그래. 요즘 보기 드문 스타일이지.”
“저야 이 바닥에서 구른 시간이 있으니까요. 아역이라도 볼 꼴 못 볼 꼴 다 보고 자랐거든요. 어! 저기 누나 온다. 서윤 누나!”
멀리서 전서윤이 걸어오고 있었다.
아직은 두 배우 다 썩 유명하지는 않은 시기였다.
덕분에 한남동 한가운데 식당에서 만나고 있었지만, 곧 평범한 일상은 꿈도 꾸지 못할 만큼 유명해질 두 사람이다.
“반갑습니다. 태강애드 명도혁입니다. 지난번에 SG 대표실에서 한번 만났었죠?”
“수현이가 어찌나 칭찬을 많이 하던지. 꼭 한번 함께 자리 만들고 싶다고 하더라구요.”
전서윤이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이며 해사하게 웃었다.
남자의 심장을 설레게 만들기에 충분한 미소였다.
“잠깐 웃으셨을 뿐인데도 화보 같습니다. 역시 배우는 배우인가 봅니다.”
“듣던 대로 사회생활 잘하시네요. 반가워요. 명도혁 씨.”
도혁은 전서윤과 빠르게 친해지기 위해 영화 얘기를 꺼냈다.
“혹시 지미 자무티안 감독 이번 작품 보셨습니까?”
“어머! 그 감독을 어떻게 아세요? 굉장히 마이너한 작품만 찍는데.”
“신작과 전서윤씨의 분위기가 어울리는 것 같아서요. 첫인상이 그 영화 첫 장면을 떠올리게 한달까요.”
“이거 극찬 아닌가요? 와.”
“별말씀을요. 진심입니다.”
몇 년 후 전서윤은 오랫동안 동경하던 자무티안 감독의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한다.
그리고 베를린 영화제에서 여우 조연상을 수상하며 월드 스타로 발돋움하게 된다.
미래에서 알게 된 정보를 좀 가져왔을 뿐인데 그녀의 반응은 뜨거웠다. 그 후로 줄곧 영화 얘기만 해댔으니까.
“어머, 내 정신 좀 봐. 너무 제 얘기만 했네요. 죄송해요.”
“아닙니다. 저도 영화를 좋아해서 즐거웠습니다. 혹시 술 좀 하십니까? 소주 좀 시켜도 될까요?”
“그럼요. 저 술 좋아해요. 특히, 소주요.”
그녀에게 소주를 한 잔 따라주자 달게 쭈욱 술을 들이켰다.
경수현이 전서윤을 놀리기 시작했다.
“서윤 누나 참하게 보여도 완전 술꾼이에요. 내가 이긴 적이 없다니까.”
“쉿. 대표님 알면 혼나.”
“대표님이 무서우신가요? 그런 것도 단속하고 그래요?”
“그럼요. 어우, 잔소리가 아주 대단해요. 여배우는 그저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나? 근데 뭐 어쩔 거야. 내 돈 주고 술 먹겠다는데. 도혁 씨 오늘은 내가 살 테니까 한잔 더 하시죠.”
전서윤은 술이 들어갈수록 반전 매력을 선보였다. 청순한 외모에 화끈하기까지.
점점 탐나는 모델이 아닐 수 없었다.
더 참을 수 없어진 도혁이 드디어 본론으로 들어갔다.
“전서윤 씨. 둘러 가지 않을게요. 그런 성격 아니라서.”
“어! 혹시 고백이라도 하려는 거예요? 나 아직 준비 안 됐는데.”
“네. 하려구요. 저는 준비가 됐거든요.”
도혁의 말에 전서윤과 경수현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형. 나 일어날까요? 자리 비켜줘야 하는 분위기인 거?”
“그런 건 아니고. 제가 전서윤 씨께 모델 제안을 하려고 합니다. 저하고 CF 한 편 같이 찍으시죠.”
“뭐야. 나 기대한 건가? 수현아 나 얼굴 빨갛지?”
전서윤이 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손등으로 식히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충분히 예쁘십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부탁드리는 거구요.”
“수현이 때처럼 샘플 먼저 찍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꼭 계약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흠. 도혁 씨가 믿음직스럽기는 한데…….”
“전서윤 씨와 꼭 한번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이건 진심이었다. 전서윤은 공익광고 외의 CF는 한 번도 찍은 적이 없었으니까.
지금 명도혁이 섭외에 성공한다면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서윤이 출연하는 상업 광고가 탄생할 것이다.
삼고초려. 세 번은 까일 각오를 다지며 도혁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CF 출연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
“일단 들어나 보죠. 제품이 어떤 건데요?”
“소주입니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