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25화
하정 주조 임원회의실.
그룹의 대표 브랜드인 깨끗한 참소주의 2분기 매출과 미래 전략을 논하는 자리.
임원들이 모두 하정 주조 최 부사장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하정 주조의 창업주인 회장이 쓰러져 식물인간이 된 지 이년 째. 그동안 하정 주조에는 피바람이 불었다.
아들 최 부사장은 아버지의 측근을 모두 쳐내고 구조 조정에 들어갔다. 그리고 주요 사업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실권을 장악한 것이다.
고작 30대 후반의 나이로 그룹을 거머쥔 최 부사장은 과감하고 냉철하기로 유명하다.
지긋한 나이의 임원들이 그의 눈치를 보고 있는 이유였다. 삐끗하면 언제 정리당할지 모르는 목숨이니까.
최 부사장이 전략기획 상무를 노려보았다.
“중장기, 단기로 나누어 마케팅 전략을 수립하라고 했을 텐데요.”
“네. 방금 보고드렸다시피…….”
“제가 본 것은 단기 전략뿐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
회의실에 일순 정적이 흘렀다.
“목표가 소박하니 전략도 소박하지.”
뚝, 최 부사장이 말을 끊고 임원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었다.
“언제까지 서울에서만 팔아먹을 겁니까? 언제까지 늙은이들한테만 소주 팔 거냐고.”
“그래서 저희가 이번에 가츠 맥주를 인수하기 위한 전략을…….”
“소주 얘기하는데 여기서 맥주가 왜 나옵니까? 하, 답답하네.”
“제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홍보팀 정 상무였다.
“소주 시장은 단호하고 보수적입니다. 물류도 복잡하고 무엇보다 지역색이 만만치 않습니다. 저는 소주를 지역의 관광 상품 중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제주도의 한라산이 있죠.”
“계속 말씀해 보시죠.”
“그래서 저는 소주보다 맥주로 활로를 넓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이대로 주저앉아서 죽어가는 회사나 주워 먹고살자는 겁니까? 그 회사 주워 먹는 데 돈은 또 얼마나 들어가는데요?”
“인수야 당연히 비용이 들지만, 투자라 여기시고…….”
“그 돈은 어디서 나오는데요? 마케팅 방안 가져오랬더니 똑같은 소리만 하고 있고. 이러니 발전이 없는 겁니다. 발전이!”
최 부사장의 목소리가 가파르게 올라갔다. 이참에 판을 확 엎어버릴 작정이었다.
“매사 복지부동 무사안일. 여기는 시골 양조장이 아닙니다! 정신들 좀 차리세요! 옆자리 사람들 사라지는 거 안 보입니까?”
“일단 진정하시고 마케팅 제안서를 받아보신 후에 다시 논의하면 어떻겠습니까? 마케팅부터 홍보, 캠페인의 전반을 태강애드와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쪽에 일임해서…….”
“경쟁 붙이세요.”
“네? 몇 년 동안 파트너십을 이어온 대행사입니다. 우리 하정 주조를 가장 잘 알고…….”
“다른 데도 두어 군데 불러서 같이 진행하시죠. 왜 업계 1위 대일기획 같은 곳 있잖아요. 경쟁 PT로 진행합시다.”
최 부사장의 매서운 눈매가 임원들에게 차례로 꽂혔다.
“어느 회사가 이 갑갑한 속을 긁어줄지 두고 보도록 하죠.”
* * *
“치킨 드시고들 하세요.”
“아! 구원의 치킨이 왔구나! 역시 명도혁. 센스 터진다니까.”
치느님을 사 들고 다시 회사로 들어갔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각. 여전히 밤샘 작업 중인 그들의 앞에 수십 개의 소주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치킨에 소주 한 잔! 크, 일단 먹고 하자.”
“치킨엔 맥주 아니야?”
“아니, 이 사람들이! 반반주가 딱이지. 안 그래?”
“그만! 먹고 하자더니 또 다들 일 얘기하고 있네. 응?”
최민아의 외침에 모두 자료를 덮고 닭 다리를 뜯었다.
치맥이라는 말은 없던 시절이었지만, 치킨의 민족답게 모두 빠른 손길로 닭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이번 캠페인 끝나면 인턴십은 주 2회 정도로 조정된다고 들었어. 학교랑 병행하기 쉽지는 않겠지만 할 만할 것 같아.”
“난 전과할 거라서 조금 빡빡할 수도 있겠는데?”
도혁의 말에 한수철의 눈이 커졌다.
“전과라면 우리 과로? 광고 쪽으로 완전히 진로 굳혔구나.”
“어. 이왕 광고계로 갈 거면 전공하는 쪽이 나을 것 같아서.”
이번에는 탁기준과 다른 팀원들이 놀랐다.
“명도혁, 광고 전공 아니었던 거야?”
“나 영문학도라고. 물론 곧 광고홍보과로 가게 되겠지만. 참, 며칠 뒤에 전과 면접 가야 해. 탁기준 선배 그날 잠깐 외출하고 올게요.”
“그거야 당연히 다녀와야지. 근데 광고 전공자가 아니었다고? 명도혁 이 자식. 사람 여러 번 놀라게 하네.”
탁기준이 도혁을 바라보며 닭 다리를 내려놓았다.
“자, 그럼 우리 천재 유명주 명도혁이 더 우리를 놀라게 해 봐. 이번 PT도 한번 엎어줘야지.”
“일레라 때랑은 규모가 완전히 다르긴 한데, 선배가 엎으라면 엎어야죠.”
함께 상을 치우고 다시 머리를 맞대었다.
오늘 커피만 열 잔째라며 AE 김윤기가 고통을 토로했다.
“속 쓰려 죽겠네. 얼른 마무리되면 좋겠다.”
“아직 시작도 안 했다는 게 문제긴 한데, 최대한 빨리 진행해 보자. 한수철, 우리 지금까지 회의했던 거 정리했지?”
“내가 요약해서 말해볼게.”
한수철이 간단한 브리핑을 시작했다.
“광고주는 공간적 확장성을 제안했어. 전국구로 시장을 확대해서 지명구매를 늘리겠다는 전략이야. 하지만 우리는 타깃을 함께 확장하는 방안을 동시에 제안할 거야.”
“그래, 물류비는 빠져야 하니까. 현지 공장을 짓더라도 투자금을 회수해야 할 테니 공간 확장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근데 나이 드신 분들은 보수적이라 먹던 거 먹어. 당장 우리 아빠도 그런데 뭐.”
“술, 담배 같은 기호 식품은 특히 그렇지. 바꾸기가 쉽지 않아. 애향심도 있을 거고.”
“맞아.”
한수철의 브리핑에 여럿이 말을 보탰다.
그가 차곡차곡 요약을 이어갔다.
“그래서 우리의 타깃은 대학생이야. 현재의 소비자이자, 미래의 메인 타깃이지. 매체부터 소구점까지 모두 젊은 감각으로 바꿔야 해.”
“FGI(설문의 한 기법, 집단 심층면접)와 설문은 어디까지 진행되고 있어?”
“지역 인터넷 카페를 통해서 설문 조사 진행할 수 있을지 요청 중이야.”
“통계 쪽은 내가 맡을게. 전공이 그쪽이거든.”
정진수의 말에 도혁이 끄덕였다.
“아무리 봐도 1팀은 합이 잘 맞아. 통계 분석하는 사람이 필요했는데.”
“도움이 된다니 다행이네. 나도 역할을 해야지.”
미래에는 가장 중요한 기술 중 하나이다.
정진수가 통계 전공이라니, CRM(고객 관계 관리, 고객 특성에 기초한 마케팅 방법 중 하나이다), 나아가 빅데이터를 활용한 마케팅을 더 빨리 구현할 수도 있겠다.
볼수록 기가 막힌 조합이 아닐 수 없었다.
도혁은 자료를 정리하며 AE들 쪽을 바라보았다.
“설문안은 나왔지?”
“응. 너 잠깐 자리 비운 사이에 정리해 봤는데 봐줄래?”
어쩌다가 도혁이 컨펌하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팀원들이 만든 설문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걸 본 탁기준이 짓궂게 놀렸다.
“명 팀장님. 어떻게 설문안은 통과 가능하겠습니까?”
“놀리지 마시죠. 자리를 비워서 확인하는 것뿐입니다.”
탁기준을 한번 노려보고 설문안으로 눈을 돌렸다.
문항은 생각보다 꼼꼼하게 만들어졌지만 중요한 것이 빠져 있었다.
“매체 전략에 대한 설문이 없어.”
“매체는 뻔하지 않아? TV, 라디오, 신문, 옥외, 미디어 믹스. 정해져 있잖아.”
“아니. 매체 환경이 굉장히 빠르게 변하고 있어. 특히 2030 세대를 중심으로.”
200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매체 시장은 서서히 변화를 겪게 된다.
그리고 회귀 직전에는 완전히 판이 바뀌어 버린다.
10대부터 30대까지 TV보다 유튜브를 몇 배는 더 많이 보는 세상이 온다는 걸 알면 이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도혁은 혼자 알고 있는 미래를 떠올리며 설문 항목을 추가했다.
“선호하는 프로그램, CF 등은 주관식 문항으로 넣고, 선호하는 매체의 보기로 인터넷이나 극장 광고 같은 보조 매체를 추가하는 게 좋겠어.”
“그래도 TV를 주력으로 가야 하지 않겠어?”
“그건 조사를 해보면 알겠지. TV는 돈이 많이 들지만, 오히려 효과가 떨어질 수도 있어. 이 중에 아침 드라마 본 사람?”
“집에도 못 가는데 드라마는 무슨.”
“평소에 말이야.”
도혁의 말에 모두 고개를 가로저었다.
최민아가 말을 덧붙였다.
“난 미니시리즈 정도만 보는 것 같아. 주말 드라마나 일일 드라마도 안 봐.”
“하지만 주말, 아침 시간대는 모조리 S급 아니면 A급이야.”
TV 광고는 시간대별로 금액이 다르다.
이른바 황금 시간대로 불리는 S급에 걸리려면 다른 시간을 옵션으로 사야 할 정도로 경쟁도 치열했고.
불과 20초짜리 광고 나가는데 수억에서 수십억의 매체비를 집행해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타깃을 젊게 잡는다면 발상을 전환해서 C급 심야 프로그램이 더 잘 먹힐 수도 있어.”
“자정에 하는 씨네플러스나 유진열의 음악이야기 같은 프로그램 말이지?”
“맞아. 매체 집행 비용이 훨씬 절감되겠지.”
도혁의 말에 탁기준이 끄덕이며 한수철에게 당부했다.
“원래 그렇게 하는 거야. 자, 그럼 우리가 생각하는 기획 방향에 힘을 실을 수 있게 설문 문항을 잘 짜봐. 선호 프로그램 조사 철저히 하고 표본도 늘리자고.”
“할 일이 태산이구만. 하아.”
“그럴수록 파이팅 해야지. 오늘은 해산하고 그럼 내일 아침에 봅시다. 샤워들도 좀 하고. 이상!”
마무리를 선언한 탁기준이 떠나고 인턴들이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한수철이 조금 아쉬운 표정으로 자료를 넘겨보았다.
“캠페인 성공하면 지역 소주 회사는 타격이 크겠네.”
“왜, 걱정돼?”
“우리 집이 부산이잖아. 뭐랄까. 지역을 대표하는 디원 소주가 무너지면 좀 슬플 것도 같아서.”
도혁이 걱정 말라며 한수철을 안심시켰다.
“꼭 그렇지는 않아. 물론 어느 정도 타격은 받겠지만 지역색이라는 게 쉽게 없어지지 않거든.”
도혁의 기억으로 지역 소주 역시 저도수 브랜드를 차례로 론칭하며 수세를 이어간다.
고도수 시장은 당연히 지역주 강세였고.
오히려 시장이 확장되면서 젊은 타깃까지 저도수 소주를 즐기게 되어 반사이익까지 얻게 되었다.
물론 한수철은 지금 그걸 알 도리가 없었지만.
“쉽게 무너지지 않아. 부산집에 가면 회 한 접시에 디원 소주 계속 마실 수 있으니까 걱정 마.”
“도혁이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냥 감으로? 요즘 신 내린 것 같지 않냐?”
실없는 소리를 하고 웃어 보였다.
한수철이 어이없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혁은 웃으며 다시 자료를 들었다.
노트북을 두드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도혁이 너는 집에 안 가?”
“떠오른 것들이 있어서 말이야. 다들 쉬다가 와. 난 외출 다녀왔잖아.”
“하여간 못 말려. 그럼 우리 먼저 간다.”
팀원들이 떠나고 도혁은 머릿속 퍼즐을 짜 맞춰 기획서의 초안을 완료했다.
착착, 모든 것들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전서윤의 캐스팅만 제외하면.
SG기획 대표한텐 이빨도 안 들어갈 것 같은데.
속으로 중얼거리며 카피를 뽑아 보고 있었다.
-메인 모델 전서윤. 썸 타다가 처음 술자리에서 고백하는 상황.
원샷하면 나랑 사귀는 거다?
도혁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저도수 소주를 원샷하는 전서윤이 대사까지 하고 있었다.
‘일단 전서윤을 따로 한번 만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