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23화
미소 짓는 도혁의 뒤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전서윤입니다. 어머, 손님이 계셨네요?”
“오! 전서윤 씨, 대표실까지 어쩐 일이에요?”
“지난번에 주신 시나리오 건 때문에요. 좀 이따가 다시 올게요.”
“온 김에 인사라도 하시죠. 이쪽은 태강애드 명도혁 씨, 여기는 우리 소속사 유망주 전서윤 배우입니다.”
도혁은 전서윤을 찬찬히 보며 인사를 나누었다.
볼수록 참한 이미지가 참소주와 잘 어울리는 참 탐나는 모델이다.
혼자 ‘참’이라는 글자를 가지고 아재 개그를 해보며 속으로 흐뭇해하고 있었다.
이왕 만났으니 슬쩍 떠보기라도 할까?
“대표님, 술 좋아하십니까? 다음에 뵙게 되면 술이라도 한잔하시죠.”
“안 그래도 오늘 좋은 데서 모시려고 했는데 회사로 온다고 하셔서요. 제가 진짜 거하게 한잔 사야 하는데.”
“맥주나 같이 마시면 좋죠. 참, 우리 전서윤 씨께서는 술, 좋아하십니까?”
자연스레 대화를 이어갔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박 대표가 눈살을 가늘게 떴다.
“우리 전서윤 씨는 술 못합니다. 제가 일절 술자리에 데려가고 하지 않구요.”
“제 말씀을 오해하셨나 봅니다. 그냥 여쭤본 건데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불쾌까지는 아니구요. 이 바닥이 하도 험하다 보니 제가 좀 예민하네요. 적어도 제 소속 배우에게는 험한 꼴 절대 안 보이겠다는 게 제 신념입니다.”
역시 박 대표는 선비님이었다. 소주 광고를 지금 들이밀었다가는 소금을 맞고 쫓겨나겠다.
일단은 한발 후퇴하기로 했다.
하지만 명도혁의 촉에 꽂혀 버렸기에 전서윤은 깨끗한 참소주 광고를 찍게 될 것이다.
도혁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전서윤이 소주잔을 들고 해사하고 웃고 있었으니까.
* * *
컨셉 회의가 시작됐다.
“자,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자고. 우리는 이제 가구 회사 직원이 아니라 주류 회사 마케터야.”
“오늘은 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술이 좀 깼거든요.”
“그래? 명도혁! 저기 밖에 소주 박스 가져와!”
한수철의 술이 깼다는 말에 탁기준이 소주 박스를 들이란다. 다시 술을 먹일 생각인 것 같았다.
그런데 브랜드가 다양했다.
“어? 깨끗한 참소주만 있는 게 아니네요.”
“그럼 내가 와이트 맥주만 마셨겠냐? 국내 시판 맥주, 세계 맥주, 생맥주, 수제 맥주 정말 오만 걸 다 마셨다. 만들기도 했어.”
“난리 부르스네요. 정말.”
“그 부르스 이제 너네가 춰야지?”
탁기준이 테이블 위에 종이컵을 내려놓으며 콸콸 부었다.
“제품부터 분석해 봅시다. 눈 감으시고 한 잔씩 차례로 마셔봐.”
“블라인드 테스트입니까?”
“인간의 혀가 얼마나 무능한지 깨닫게 될 거다. 시작!”
솔직히 미맹인 줄 알았다.
탁기준의 말대로 제품별로 맛이 거의 구별이 되지 않았다.
전생에서도 느꼈지만 이놈의 소주야말로 그 맛이 그 맛이었다.
아주 미묘한 차이는 있었지만 도저히 맛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었다.
“진짜 모르겠어요.”
짧게 한숨을 쉰 최민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 감고 마시면 구별이 어렵지? 이런데 제품력으로 승부 볼 수 있을까?”
“도수의 차별을 둘 수는 있겠죠.”
“도수를?”
도혁의 말에 모두 그를 바라보았다.
“소주는 서민의 술이기도 하지만 독주의 대명사입니다.”
“그렇지. 저렴하고 빨리 취하는 게 소주의 미덕이야.”
그건 소주의 미덕이자 악덕이었다.
그리고 도혁은 이 악덕을 모조리 미덕으로 바꿀 참이었다.
도혁의 기억으로 이맘때쯤 소주 시장이 재편된다.
저도수 시장의 시작.
소주는 독하다는 편견을 바꾸고 타깃부터 지역성까지 시장의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시기였다.
거기엔 깨끗한 참소주의 공격적인 마케팅이 큰 몫을 차지했다. 시장 판도를 바꿔 버린 것이다.
그걸 지금 우리가 제안하려는 거다. 4년 차 AE 한 명과 인턴 일곱 명뿐인 우리 팀에서.
도혁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다 똑같은 맛의 독주가 언제까지 통하겠습니까?”
“깨끗한 참소주는 시장 1위야. 지금 시장 판도대로 간다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어.”
“1위는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는 겁니다. 안일하게 생각할 때는 말이죠.”
“안일하다라…….”
팀원들이 모두 생각에 잠겼다. 침묵을 깬 건 역시 탁기준이었다.
“비슷비슷한 제품력을 가진 시장에서 치고 올라가려면 어떤 전략을 써야 할까.”
“타깃.”
도혁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회의실에 울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이번 깨끗한 참소주의 마케팅 전략의 핵심은 타기팅이 될 겁니다.”
“타깃이라.”
탁기준이 한쪽 눈을 가늘게 좁히며 도혁의 말을 곱씹었다.
“자 모두 주목해 봐. 지금 타깃 나왔다. 타깃.”
“내가 윤기한테 질문을 하나 해볼게. 소주의 주요 타깃은 누구일까?”
“할아버지? 직장인?”
도혁의 말에 AE 김윤기가 대답했다. 도혁은 그를 바라보며 질문을 이어갔다.
“그럼 깨끗한 참소주에서는 이 타깃으로 만족하고 있을까? 아니면 확장하고 싶어 할까?”
“흠, 확장하고 싶겠지. 명도혁, 잠깐만.”
탁기준이 도혁의 말을 끊고 타임을 걸었다.
“브리핑 때 광고주는 분명히 공간적인 확장을 꾀하고 싶다고 했어. 전국구 유통. 기억해?”
“그랬죠.”
“타깃은 전혀 다른 개념인데, 광고주가 말한 전국구 유통부터 생각해 보는 게 낫지 않을까?”
탁기준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일단은 표면적으로 제시한 광고주의 컨셉부터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었다.
“그럼 유통을 먼저 보죠. 대표실에서도 잠깐 얘기가 나왔었지만, 소주는 물류비 빼기가 쉽지 않아요. 서울에서 생산해서 부산으로 간다고 쳐요. 천 원짜리 소주 한 병 팔자고 서울에서 부산으로 유통을 돌린다? 공병 수거는요? 과연 기름값이 빠질까요?”
“그러니까. 그 점이 가장 의문스러워. 이건 사실 홍보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거든.”
“그러니까요. 부산에 공장을 더 짓든지, 우리한테 어떡하라는 건지.”
디자이너 서인기가 어이없어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맞아요. 이건 광고대행사에서 어쩔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에요. 광고주도 그걸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럼, 광고주에게 숨겨진 의중이 있다?”
“빙고.”
도혁의 말에 모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집중했다.
“깨끗한 참소주는 물론 전국으로 시장 확대를 꾀하려고 하고 있어. 하지만 이건 전국의 할아버지들에게 소주를 팔려는 게 아니야.”
“그러면, 젊은 사람들?”
“그들은 지금 전국의, 대학생에게 접근하려는 거야. 할아버지들은 어차피 사 드실 분들이거든.”
“대학생!!”
한수철이 무릎을 탁 쳤다.
“그래. 소주의 또 다른 주 소비층은 대학생이야.”
“맞아. 그리고 그들은 몇 년 후 군인이 되어서 소주를 소비하고, 직장에서 빡쳐서 소주를 더 많이 마시게 되지.”
“아! 소름. 그럼 공간적인 시장 확대가 아닌 타깃의 변화를 노리고 있다는 거야?”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전국 유통도 중요한 포인트야. 다만 광고주는 전국 유통을 노리면서 동시에 미래의 고객을 공략하려는 거지.”
탁기준이 미간을 좁힌 채 다시 질문을 했다.
“그래서 도수 이야기가 나왔구나.”
“맞습니다. 젊은 친구들은 고도수의 술은 선호하지 않거든요. 젊은 입맛에 맞춘 조금 낮은 도수의 소주를 제안할까 합니다.”
“이거 너무 엄청난 캠페인인데.”
탁기준은 의자에 기댄 등을 떼어내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명도혁. 지금 네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알고나 있냐?”
“네. 주류 시장을 뒤집어놓을 캠페인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만?”
“미친놈.”
“칭찬 감사합니다.”
“야, 이 미친놈아!!”
탁기준의 왼팔이 도혁의 목을 휘감았다. 목을 조이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이건 되는 캠페인이니까.
감이 좋은 탁기준이 그걸 못 느꼈을 리가 없었다.
도혁은 고무된 표정의 팀원들을 둘러보며 즉시 다급한 사안부터 진행하기 시작했다.
“점심 뭐 시킬까?”
* * *
그날의 점심 이후 쭉, 연달아 사흘 동안 집에 가지 못했다.
정말 올드보이처럼 배달 음식만 먹으면서 회의실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워낙 제안할 캠페인의 덩치가 크다 보니 컨셉 도출부터 의견이 분분했고, 우리는 끝없이 회의를 이어갔다.
“탁기준 선배님, 최근에 퇴근하고 나면 광고 생각하지 마라, 삶과 균형을 맞춰라,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퇴근 아예 안 하잖아, 지금.”
카피라이터 강시원의 우문에 탁기준이 현답을 했다.
“하아. 머리가 돌아가지를 않습니다. 담배 한 대 피우고 올까요.”
“술과 담배와 커피로 창작하려는 마음을 버려. 그런 생각 자체가 잘못된 거다.”
“그럼 뭘로 창작합니까?”
“담배와 술과 커피지. 순서를 지키라고. 흡연자들 전부 나가자.”
남자들이 나가자 도혁과 최민아만이 남았다.
최민아가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저기, 소주 광고니까 혹시 섹시한 여자 모델 찍어서 디자인하라고 하지는 않겠지?”
조심스러운 그녀의 말에 풉, 웃고 말았다.
도혁이 기억하는 최민아는 남자 누드 사진도 아무렇지 않게 손보는 프로 중의 프로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순진한 인턴이니까 그런 것도 걱정이 됐던 모양이었다.
“절대 그런 일은 없어. 걱정 마.”
“타깃이 젊다고 하니까, 왜 젊은 남자애들은 옷 안 입은 여자를 좋아하잖아.”
“아니. 어릴수록 노골적인 건 싫어하지.”
“그렇구나. 다행이다. 포토샵 할 때 뒤에서 AE들이 지켜보고 있을 거라서. 그럴 때 비키니 입은 여자 사진 띄워놓으면 얼마나 민망하겠어.”
남자의 초콜릿 복근을 마우스로 닦으며 졸고 있었던 최민아가 떠올라 또 웃고 말았다.
잠깐의 휴식 후 다시 아이데이션이 시작되었다.
“자, 다시 처음부터 정리해 보자고. 한수철이 말해봐.”
“제품력은 눈을 가리고 마시면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비슷합니다. 조금의 차별성이 있겠지만 미미한 수준이고, 현재로서는 유통력으로 시장을 점유하고 있습니다. 광고주는 전국 단위의 유통과 지명 구매를 희망하고 있고, 저희는 젊은 타깃을 주력으로 하는 낮은 도수의 브랜드 론칭을 제안할 예정입니다.”
“냉정하게 이 방향이 맞을까?”
한수철은 조금 망설이다 대답했다.
“저희는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을 제안하는 것이고, 유통이나 물류는 저희가 관여할 부분이 아닙니다. 단순하게 전국 광고를 희망한다는 광고주의 희망에만 따른다면, 매체 제안 정도밖에는 할 수 없겠죠.”
“안전하게 기업 이미지 광고와 신문지면, 옥외, 인쇄 광고 제안만 할 수도 있어. 예쁘게 디자인 뽑아서.”
탁기준이 디자이너 최민아와 서인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기 우리 유능한 디자인 팀 있잖아. 카피라이터도 훌륭하고.”
보통의 광고대행사라면 분명히 그렇게 제안했을 거다. 당연히 안정적으로.
조용히 그들의 말을 듣던 명도혁이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그렇게 가시든지요. 소극적으로, 안전빵으로.”
“안전한 게 꼭 나쁜 건 아니야. 도혁이가 얘기하는 건 너무 덩어리가 커.”
“하긴 대한민국 주류 시장의 지도가 바뀔 수도 있지.”
“그러니까. 그걸 우리가 할 수 있을까?”
“우리니까 할 수 있지. 인턴이니까 이런 개소리도 할 수 있는 거야. 통 크게.”
모두 진지한 표정으로 도혁을 바라보았다.
“맥주 반, 소주 반.”
“뭐??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메인 카피야. ‘지금은 반반주 시대, 맥주 반, 소주 반’ 인턴이니까 이런 미친 소리도 할 수 있는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