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22화
“아, 그래서 우리도 아침부터 술 마시자구요?”
“당연하지! 회의실 문 잠가!”
문까지 걸어 잠그고 탁! 탁기준이 벌써 술병을 따고 있었다.
하여간 못 말린다.
도혁은 장난을 쳐대는 탁기준과 한수철을 내버려 두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깨끗한 참소주라. 아직은 술집에서 예쁜 여자 사진이나 걸던 시절인데.’
섹시한 옷을 입은 여자 포스터가 술집마다 걸려 있던 시절이었다. S급 모델이 소주 광고에 등장하지 않았던 때였고.
포지셔닝(기업이나 제품에 대하여 위상을 정립하기 위해 마케팅믹스를 통해 소비자들에게 자사 제품의 정확한 위치를 인식시키는 것), 매체, 그리고 타깃까지 완벽하게 고려해야 한다.
도혁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소주 광고의 주요 타깃은 40~70대까지의 남성. 독한 술을 즐겨 마시는 직장인이다. 그렇기에 캠페인 역시 여성을 이용한 섹슈얼 광고에 치중하고 있었고.
하지만 소주 타깃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이에 따라 캠페인의 방향성도 다각화되는 시점이었다.
‘타깃이라.’
타깃 설정에서 생각이 멈추었을 때, 탁기준이 도혁을 불러댔다.
“뭘 그렇게 혼자 심각하냐. 우리도 같이 좀 고민하자.”
“깨끗한 참소주 생각하고 있었죠, 뭐.”
“명도혁도 보면 은근히 일중독이야. 우리 피티 끝난 지 하루 지났어. 미션 받은 날은 좀 쉬어도 돼.”
“쉬기가 쉽지 않습니다.”
도혁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쉬는 게 마음대로 되었으면 워커홀릭 명도혁이 아니었겠지.
“우리 일이라는 게 항상 머릿속을 맴돌잖아요. 밥 먹을 때도, 쉴 때도 심지어 꿈에서도 아이디어를 생각하고 쥐어짜고.”
“그래, 그렇지.”
“컴퓨터로 따지면 항상 리소스를 잡아먹고 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런 면이 있더라구요.”
장난을 치던 탁기준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이 자식 인생 2회차네. 너 전생에 광고쟁이였냐?”
“네??”
도혁이 너무 놀라 소리치자 주변에서 더 놀랐다.
“명도혁! 왜 소리는 지르고 그래? 미쳤어?”
“아, 죄송합니다.”
깜짝 놀랐다. 전생에 광고쟁이였냐니. 좀 더 조심하고 지내야겠다. 쉽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탁기준이 그런 도혁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지금부터 내 얘기 잘 들어. 내가 인턴1팀 진짜 마음에 들어서 하는 얘기니까 새겨들어라.”
“네. 말씀하시죠.”
“퇴근하면 머릿속에 광고 생각 끊어버려. 다 잘라내 버리라고.”
“아…….”
“안 그러면 광고가 네 인생을 잡아먹게 될 거다.”
퍽,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광고에 잡아먹힌 인생.
바로 24시간 광고 생각으로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던 명도혁의 전생이었다.
일할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심지어 꿈에서조차도 아이디어를 짜냈던 시간들이 빠르게 뇌리를 스쳐 갔다.
갑자기 떠오른 카피 한 줄을 잊어버릴까 봐 샤워하면서 뛰쳐나왔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
벌거벗은 채 물을 뚝뚝 흘리며 노트에 아이디어를 끄적이던 그때가 떠올라 한숨이 절로 나왔다.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살았을까. 왜 그렇게까지 처절하게 말이지.’
젊은 직원들이 외쳐대던 워라밸 따위 배부른 소리라고 꼰대 같은 생각을 하며 죽어라고 달려온 인생이었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내달리며 직진하던 열정.
한 번쯤 어느 길로 뛰고 있는지 들여다보았다면 나는 방향을 잃지 않았을까.
도혁은 씁쓸한 눈길로 팀원들을 둘러보았다.
아직 인턴인 이들은 탁기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탁기준 선배야말로 인생 2회차네. 이런 진리를 AE 4년 차에 깨닫다니.’
서희주 선배가 탁기준을 선택한 이유를 0.1% 정도 알 것 같았다.
눈을 끔뻑이며 탁기준을 계속 바라보자 그가 조금 의아해했다.
“왜 그렇게 보냐. 민망하게.”
“멋있어서요.”
“뭐?”
“광고에 잠식당하지 않는 삶. 끝까지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끄덕인 도혁을 보며 탁기준이 미소를 지었다.
“명도혁 이 자식은 내 말뜻 이해할 줄 알았다. 저, 귀염둥이 친구들은 무슨 말인지를 전혀 몰라요.”
탁기준이 장난을 치며 종알대고 있는 나머지 팀원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다 마신 커피 컵을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리고 가져온 소주병의 뚜껑을 닫았다.
“자, 오늘까지는 스칸디나비아의 봄을 즐깁시다.”
“어! 선배님 그 말씀은! 오늘까지는 봄이란 말인가요!”
“맞아. 또 언제 폭풍우가 몰아닥칠지 모르지만 오늘은 푹 쉬고 내일 다시 모인다.”
“네! 선배님!”
“각오 단단히 하고 와야 할 거야. 기획1팀 만만치 않아. 알고 있어?”
“탁기준 선배님만 봐도 알 수 있죠.”
탁기준의 말은 허세가 아니었다.
태강애드는 실적에 따라 팀을 나누는데, 숫자가 적을수록 실력자가 많았다.
즉 기획1팀이 현재 태강애드의 에이스 AE들로 이루어졌다는 말이었다.
당연히 제작도 최정예 팀이 붙을 거고.
김철준 대표의 말대로 이번 대결은 인턴 우승 팀 대 기성 에이스 팀의 진검 승부라는 뜻이었다.
‘대학생 인턴십 과정이 이렇게 빡빡하진 않았는데.’
일레라 가구의 PT 이후 김철준 대표가 대학생 인턴에 거는 기대가 커진 모양이었다.
탁기준이 다시 인턴들을 둘러보며 입매를 끌어올렸다.
“그럼 단단히 마음먹고 잘 쉬고 오도록. 내일부터는 다시 소주 전쟁이다. 이상!”
“넵!!”
참전 용사들은 큰 소리로 대답했다.
캠페인의 시작은 언제나 활기찬 법이다. 곧 전쟁터에서 녹초가 되어버리겠지만.
* * *
경수현의 기획사에서 연락이 왔다.
룸싸롱에서 보자는 걸 겨우 말려 회사로 찾아갔다.
접대를 하려는 모양인데, 룸싸롱 같은 곳은 예전부터 딱 질색이었다.
특히 접대라면 체질적으로 싫어하는 쪽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직접 경수현의 소속사인 SG기획을 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SG기획 한번 구경해 볼까. 전부터 궁금했는데 말이지.’
아직은 3년 차의 신생 회사지만 십 년 안에 이곳은 아시아 최대의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 성장한다.
이 회사의 미래를 알고 있기에 인맥을 쌓아두면 분명히 도움이 될 거라고 판단했다.
심지어 지금 명도혁은 소속 배우의 CF 계약까지 성사시킨 은인이었다.
SG기획의 대표와 돈독한 관계를 맺을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아직은 뭐, 소박하구만.’
서울 외곽의 허름한 건물. 약간은 비뚜름하게 걸린 간판을 바로잡아 주며 SG기획의 문을 열었다.
도혁이 회사로 들어서자마자 SG기획의 박승곤 대표가 뛰어나와 반겼다.
“반갑습니다! 명도혁 씨. 우리 경수현 배우에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태강애드 명도혁이라고 합니다.”
“생각보다 굉장히 젊으시네요. 이쪽으로 오시죠.”
하긴 이십 대 초반이니 놀랄 만도 하겠지. 제대한 지 얼마 안 돼 머리도 짧았고.
하지만 박 대표는 예의 바른 태도로 도혁을 안내했다.
대표실은 정갈하고 현대적인 분위기였다. 실내를 휘이 둘러보던 도혁의 시선이 한쪽 벽면에 꽂혔다.
그곳엔 소속 연예인들의 사진이 쭉 걸려 있었다.
아직 30대 중반인 박승곤 대표는 3년 차 신생 회사임에도 제법 괜찮은 배우들과 함께 일하고 있었다.
아니지. 지금은 제법 괜찮은 정도였지만 훗날 기라성 같은 대배우로 성장할 사람들이었다.
‘저 배우들을 이맘때부터 전부 데리고 있었단 말이지? 이게 사람 보는 눈이라는 건가?’
도혁은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최성수, 송민현, 전서윤.
모두 십수 년 뒤에 한국, 아니, 세계를 주름잡을 대배우들이었다.
이 회사가 미래에 성공을 거둔다는 걸 알면서도 이 정도 대가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니 소름이 돋았다.
“좋은 배우들과 함께 일하시는군요.”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제 눈에야 뭐, 우리 애들이 최고죠.”
문득 그의 노하우가 궁금해져 소속 배우들에 대해 물었다.
“혹시 캐스팅하시는 원칙이나 기준이 있으십니까?”
“아직 다 신인들이라 비결이랄 것도 없습니다. 그래도 물으셨으니 굳이 대답을 찾자면…….”
잠깐 말을 멈춘 박 대표가 제 배우들의 액자를 둘러보았다.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저는 인성을 봅니다.”
“인성이요?”
“외모보다는 인성을 보는 편입니다. 좋은 연기는 좋은 인생에서 나오는 법이니까요.”
“정말 맞는 말씀입니다.”
다시 둘러본 대배우들은 외모가 특출나지는 않았지만 깊이 있는 연기로 국제영화제를 휩쓴 인물들이다.
이걸 신인 때 알아보다니.
‘SG기획과는 더 가까이 지내야겠는데? 절친급으로.’
물론 방법은 있었다.
명도혁은 아직 인턴이었지만 기획사 대표들이 가장 좋아하는 광고대행사에 다니고 있다.
회사를 경영하는 입장에서는 아무튼 CF가 최고다. 공은 덜 들고 돈은 많이 받으니까. 게다가 경수현을 일레라 광고 모델로 추천까지 하지 않았는가.
“우리 경수현 배우가 귀인을 만나서 CF를 다 찍고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사실 데모 CF를 찍어주신 게 컸습니다. 채택 안 될 수도 있었는데 동의해 주셔서 제가 오히려 감사합니다.”
“그 정도는 협조해야죠. 우리 경 배우 라디오 고정도 꽂아주셨다면서요.”
박 대표가 지나치게 고마워하며 연신 미소를 지었다.
곧 경수현의 몸값이 열 배로 뛴다는 걸 아는 도혁은 조금 미안해졌다.
“아무튼 경수현 배우는 잘될 겁니다.”
“그럼요. 이렇게 인성 좋은 경 배우 같은 친구들이 잘돼야 합니다. 우리 회사 소속이라서가 아니라 이런 친구가 없어요. 반듯하고 예의도 바르구요. 참, 김성빈이한테 복수도 해주셨다면서요.”
“김성빈 씨는 이 바닥에서 오래 못 가겠던데요.”
“어! 감이 좋으시네요.”
박 대표의 눈매가 순간 예리하게 빛났다.
“자세히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그김성빈 배우가 장수하긴 어려울 겁니다.”
“대표님 스타일과는 썩 맞지 않을 것 같네요. 참 SG기획에 여배우는 전서윤 씨뿐인가요?”
“네. 아직은 그렇습니다. 어쩌다 보니 전서윤 배우가 홍일점이 됐습니다.”
배우 전서윤. 세계 3대 영화제를 동시에 석권한 국내 유일의 배우.
도혁은 전서윤의 사진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한참을 바라보았다.
깨끗하고 청순한 이미지, 그러면서도 지적인 매력을 동시에 지닌 순수한 인상의 전서윤이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은은한 분위기로 아주 천천히 시청자들에게 다가가고 있는 신인 배우.
이 당시 청춘 드라마에 조연으로 출연하며 20대 남녀에게 서서히 반응을 얻는 단계였다.
떠오르는 신예라고나 할까.
‘소주. 깨끗한 참소주. 전서윤과 굉장히 어울리는데.’
당시에는 섹슈얼 소주 광고가 대세였지만 곧 청순 컨셉으로 판도가 바뀐다.
말이라도 꺼내볼까, 고민하는 도혁의 귓가에 선비님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 전서윤 배우가 처음으로 사극에 도전합니다. 차분하고 고상한 CF 있으면 좀 잘 부탁드립니다.”
‘차분하고 고상하게라.’ 소주 광고를 차분하고 고상하게 찍으면 되지 그까짓 거.
속으로 말을 삼키는 도혁의 귀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대표님, 전서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