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고 천재 명도혁-19화 (19/252)

광고 천재 명도혁 19화

김민수 저 자식이 컨셉과 시안을 여기저기 소문내고 다닌 모양이다.

도혁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이 자식아. 이 명도혁을 너무 만만하게 봤어. 이 바닥에서 몇 년 굴렀는데 이 정도로 밟힐 거 같냐?’

턱을 어루만지며 각 팀의 컨셉이 적힌 프린트물을 바라보았다.

현재 세 팀의 컨셉이 겹친다.

물론 김철준 대표가 스칸디나비아의 봄 시안을 먼저 보긴 했다. 하지만 어느 팀이건 우리가 먼저 고안했다고 주장하면 그만이었다.

더구나 광고주 김영석이 참석 중이었다.

도혁의 팀이 가장 먼저 아이디어를 냈다는 것이 증명된다고 하더라도 컨셉이 같으므로 시안이 가장 마음에 드는 팀을 고를 것이 분명했다.

‘김민수, 이걸로 우리를 엿 먹일 생각인가 본데. 내가 네 머리 꼭대기 위에 앉아 있다. 이 자식아.’

도혁이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의자 등받이에 등을 대었다.

화면 앞에서는 또 다른 팀이 북유럽의 봄 어쩌고 하면서 발표 중이었다.

옥외 광고 시안까지 모두 도혁의 팀과 비슷했다.

‘저 인간들도 개념 없네. 타 팀 아이디어를 자기 것처럼 주워 먹고 지랄이냐. 저런 마인드로 이 바닥에서 어떻게 버티려고.’

세 팀 중 두 팀이나 비슷한 컨셉으로 발표가 이어지자 심사위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한수철이 마이크를 잡았다.

하지만 다시 커다란 화면에 벚꽃이 흩날리자 김영석 대표의 낯빛이 단단하게 굳어졌다.

그러곤 한수철을 똑바로 보며 물었다.

“이번 발표 팀도 같은 컨셉인가 봅니다.”

“솔직히 저 역시 오늘 다른 팀의 발표를 보고 조금 놀랐습니다. 저희 역시 북유럽 스타일과 봄의 신선함을 접목한 새 학기 광고를 제안할 예정이었습니다.”

광고주의 갑작스러운 질문으로 많이 당황했을 텐데, 한수철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김민수가 위기에 처한 그를 보고 실실 입꼬리를 올려댔다.

그걸 본 도혁이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그를 비웃었다.

‘딱 기다려라. 미친놈아. 딱 십 분 남았네. 김민수 웃을 수 있는 시간.’

도혁은 한수철에게 눈짓을 보냈다.

끄덕인 한수철은 마이크를 당겨 잡으며 또박또박 발표를 시작했다.

“앞부분 컨셉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같은 이야기 지겨우실 테니 먼저 저희 디자인 시안과.”

뚝 끊어진 한수철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역시 한수철은 타고난 발표자였다.

웅성거리던 심사위원들이 한 번에 그에게 집중했다.

“사전 제작한 CF를 보시겠습니다.”

“CF요?”

김영석이 눈을 크게 뜨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김영석뿐 아니라 심사위원 모두가 기대에 찬 시선으로 한수철을 바라보았다.

특히 김철준은 의자에서 등을 떼어내고 테이블로 몸을 기울였다.

태강애드 대표로서 같은 시안이 쏟아져 민망하던 차였다.

그가 제 앞의 마이크를 당겨 사전 제작 CF에 대해 물었다.

“CF를 직접 만들어 왔다는 건가요? 고작 3주 만에, 대학생 인턴들이?”

“그렇습니다. 데모에 불과하지만, 직관적으로 CF가 어떤 느낌으로 나올지 확인하시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겁니다.”

“그럼 한번 봅시다. 얼마나 잘 뽑아 왔는지.”

심호흡한 한수철이 심사위원을 둘러보았다.

“그럼 바로 지금, 일레라 가구의 데모 CF 방영을 시작하겠습니다.”

곧 실내의 불이 모두 꺼지고 화면 창문으로 얼굴을 내민 경수현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었다.

-CF A안

깔끔한 마스크가 신선하고 스마트한 느낌을 주었다.

그의 곁으로 중년의 여성이 머그잔을 들고 다가왔다.

이어 카피가 흘러나왔다.

“어머니, 차 드세요?”

“우리 아들, 만날 엄마라고 부르다가 어머니라고 하니까 뭔가 어색한데?”

“저도 이제 고3인데요. 철 좀 들어야죠.”

“학창 시절의 마지막 봄이구나. 힘들겠지만 우리 잘 버티자!”

“이까짓 고3, 버티지 않고 즐기려구요. 이제 시작이니까.”

소년에서 청년으로.

당신의 시작을 응원합니다.

기다렸어요. 당신의 빛나는 봄을.

함께할게요. 간결하고 경쾌한 첫걸음을.

심플한 북유럽 감성의 시작, 일레라 가구.

-CF B안

분주하게 방 안의 짐을 정돈하려는 경수현, 막상 할 일이 별로 없다.

“이상하게 치울 게 없네.”

의아해 갸웃하는 사이 전화벨이 울린다.

“여보세요. 어머니!”

“어이구, 우리 아들, 취업하더니 철들었네. 그래, 자취방은 마음에 들어?”

“네, 우리 김영희 여사 안목인데 어련하겠어요. 깔끔하고 좋은데요?”

“가구가 딱 필요한 것만 있어서 그래. 아들 다시 한번 취업 축하하고 파이팅!”

청년에서 어른으로.

당신의 시작을 응원합니다.

기다렸어요. 당신의 빛나는 봄을.

함께할게요. 간결하고 경쾌한 첫걸음을.

심플한 북유럽 감성의 시작, 일레라 가구.

두 편의 CF가 방영되고 한수철이 설명을 시작했다.

“저희가 배우 경수현 씨를 제안한 이유는 학생부터 사회 초년생까지를 타깃으로 하는 기능성 학생 기구에 가장 적합한 모델이기 때문입니다.”

심사 위원이 서로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주억였다.

“또한 전 국민의 국민 동생으로 알려진 경수현 씨는 최근 김기훈 감독님의 미니시리즈에 주인공으로 섭외되어 성인 배우로의 변신을 꾀하고 있습니다.”

한수철은 경수현이 캐스팅됐다는 관련 보도 자료와 김기훈 감독이 얼마나 주연배우 경수현을 믿고 있는지에 관한 인터뷰 기사를 보여주었다.

“갑자기 궁금한 점이 생겨서 그런데 몇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김영석 대표였다.

“네. 말씀하십시오.”

“우선 정식 캐스팅이 아닌데 어떻게 경수현 배우를 섭외한 겁니까?”

“섭외에 일가견이 있는 우리 카피라이터 덕분입니다. 이상은 대외비라 더 말씀드리기 힘든 점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 섭외 잘하시는 명 카피가 그 팀이군요! 일전에 한진성 성우 건도 훌륭하게 해냈었죠.”

김영석은 흡족하게 웃으며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어머니를 계속 등장시켰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아, 이 부분은 명쾌히 설명드리겠습니다.”

한수철이 심사위원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며 말을 이어갔다.

“제품의 주요 구매자는 주로 사용자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가구의 경우엔 주부일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그건 그렇죠.”

“저희 제품의 주요 사용자가 학생에서 직장 초년생이므로 FGI(타깃 그룹 인터뷰)를 통해 조사를 해봤는데요. 여학생의 경우 본인이 디자인을 직접 고르고, 남학생은 대부분 어머니가 구매한 대로 쓰겠다고 답했습니다.”

“우리 집도 분명히 그럴 것 같군요.”

김영석의 말에 좌중에 짧은 웃음이 터졌다.

한수철 역시 잠깐 미소를 머금고 설명을 이어갔다.

“따라서 저희는 주 구매층인 어머니를 CF에 직접 등장시킵니다. 그리고 이것 또한 저희가 경수현 배우를 모델로 설정한 이유입니다.”

“모델 선정 이유가 주부 소비자 때문이라구요?”

“네. 경수현 배우는 국민 남동생의 반듯한 이미지로 50대 여성 호감도 조사에서 1위를 차지한 바 있습니다.”

“오, 그렇군요. 워낙 잘생겨서 어린 여학생들에게는 당연히 인기가 많을 거구요.”

“그렇습니다.”

연령별 배우 선호도 조사 결과를 보여주며 화면 위의 경수현을 클로우즈업했다.

모두 끄덕이긴 했지만 김철준과 김영석의 표정이 밝지만은 않았다.

CF를 찍어 온 것까지는 좋았지만 무언가 아쉬운 얼굴이었다. 여러 팀의 컨셉이 겹쳐 식상한 느낌도 있었고.

그걸 본 도혁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1팀의 프레젠테이션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한수철에게 눈짓하자 그가 다시 마이크를 다잡았다.

“지금 보신 CF는 봄 학기를 맞아 방영할 시즌 광고입니다.”

“시즌 광고라면?”

“한 시즌에 특별 판매를 위한 광고를 말합니다. 가장 가구 판매가 많이 일어나는 봄을 겨냥한 광고인 거죠.”

“잠시만요.”

김철준이 한수철과 김영석의 대화를 끊고 끼어들었다.

“시즌 광고라면 기업 이미지 광고가 따로 있다는 말인가요? 얼핏 그렇게 들리는데,”

“맞습니다. CF가 한 편 더 있습니다. 저희 1팀에서는 완전 다른 컨셉의 기업 광고를 별도로 준비했습니다.”

“CF가 한 편 더 있다구요?”

김영석의 눈이 커졌다.

* * *

일주일 전 1팀 회의실.

‘스칸디나비아의 봄. 시작. 봄. 새 학기.’

도혁은 테이블에 기대어 선 채로 컨셉안을 넘겨 보고 있었다.

그걸 본 한수철이 다가와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이제 마무리 단계인데 무슨 문제라도 있어?”

“이거 너무 시즌 광고 같지 않냐?”

“시즌 광고라니?”

아, 한수철은 아직 감이 없구나.

분명 봄이라는 컨셉은 일레라 가구의 새 학기 학생 가구 론칭에 적절했다. 카피와 디자인도 예쁘게 뽑혔고.

도혁이 봐도 대학생 인턴이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여러모로 쓸 만한 캠페인이었다. 하지만.

“봄 시즌 새 학기 가구 캠페인 느낌이 들지 않냐고 물은 거야.”

“아. 그런 감이 없지는 않지. 그치만 김영석 대표가 학생 가구를 강조해서 뽑은 컨셉이었잖아.”

“그렇긴 하지만 일레라 가구는 소비자들에게 인지도 자체가 없잖아. 아예 0이라고.”

“광고를 하면 인지도가 오르지 않을까?”

“광고를 해서 남 좋은 일만 시킨다면?”

한수철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가 모르는 게 있었다.

“자, 상상을 해보자고. 나에게 중학교 들어가는 아들이 있어.”

“그래. 말해봐.”

“뭘 좀 준비해 줘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TV 광고를 봤어. 당연히 드라마 시작하기 전에 대~충.”

“그렇지. CF를 꼼꼼히 보는 사람은 없으니까.”

“근데 봄 어쩌고 시작 어쩌고 하면서 가구를 사래.”

“흠, 그 상황에서 광고를 끝까지 보고 일레라 가구까지 기억하기는 어렵다는 건가?”

“그렇지. 기존에 일레라 가구라는 존재를 알고 있었다면 효과가 크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냥 가까운 가구점 가서 학생 가구 좋은 거 보여달라고 할 거야. 나라면 말이지.”

“지명 구매하기엔 인지도가 너무 낮다는 말이구나.”

“빙고.”

‘두통약 주세요’가 ‘개보란 주세요’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광고비를 써야 하는지 일반인은 모른다.

그것이 바로 인지도.

그리고 지금 일레라 가구에는 그 인지도가 전혀 없었다.

“이거 일이 좀 커지겠지만 알면서 이대로 갈 수는 없을 것 같아.”

“무슨 말이야? 설마 기업 이미지 광고라도 할 셈이야?”

“역시 한수철은 똑똑해.”

“기업 이미지 광고는 정말 수십억씩 들어가. 그리고 우리 이제 일주일 남았다고. 가능하겠어?”

짧은 침묵이 흘렀다.

사실 처음 컨셉을 도출할 때 기업 이미지 광고를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방금 한수철이 말한 것과 같은 이유로.

기업 이미지 광고는 대규모의 메이저 광고다.

재벌 그룹에서 돈으로 범벅 해서 만드는 캠페인.

‘잠시만, 꼭 그럴 필요가 있나? 이미지 제고가 아니라 인지도만 올리면 되는 거잖아. 이걸 적용해 보면 어떨까?’

도혁이 벌떡 일어나 한수철을 바라보았다.

“수철아. 도화지에 그림이 있는데 이걸 덮는 게 쉬울까, 빈 도화지에 새로 그리는 게 쉬울까?”

“그거야 당연히 빈 도화지…… 잠시만, 지금 일레라 가구가 빈 도화지라는 소리지?”

“맞아. 그리고 그 첫 번째 그림이 엄청나게 강렬하다면?”

생각을 정돈한 도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철아, 애들 모으고 경수현 씨에게 연락해. CF 한 편 더 찍어야겠다.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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