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16화
“그럼 나한테 김민수 저 자식이랑 일하라는 거냐?”
아, 오늘 안 보여서 잊고 있었다, 빌런 김민수의 존재를.
우승하면 김민수도 정직원 전환이네?
탁기준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도혁의 어깨를 툭 쳤다.
“일단 난 광고주 미팅 간다. 3시까지 애들 다 모아놔. 메인 카피 나왔으니까 전체 회의 한번 해야지.”
“네. 알겠습니다.”
“일사천리네, 일사천리. 너 인생 2회 차냐?”
깜짝 놀라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베테랑 같다고 인마. 놀래기는.”
탁기준이 자리를 뜨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완급 조절해야겠다. 회귀남 명도혁인 거 들키기 전에.
혼자 중얼거리면서 로비를 돌아 나왔다.
멀찌감치 김민수가 보였다.
열 시가 다 됐는데 이제 출근하나 보다.
‘저 자식, 진짜 빠져 가지고.’
모른 척 돌아서려는데 그가 도혁을 부르는 소리에 발끝이 붙들렸다.
“명도혁!”
“어. 출근하냐? 너무 늦었는데.”
“어제 야근했어. 8시까지.”
야근했던 시간에 맞춰서 그만큼 늦게 온 모양이었다.
“탁기준 선배가 오늘 전체 회의 3시에 있으니 모이래.”
“왜 자꾸 회의를 하는 거야. 각자 업무 보고 나중에 모이면 되잖아.”
도혁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건 수십 년 광고한 선수들이나 하는 짓이고. 우린 고작 대학생 인턴이잖니, 동기야?
광고는 철저한 협업을 바탕으로 하는 일이다.
메인 카피가 나온 상황이었다. 당연히 기획팀이 알아야 하고 서브 컨셉 방향, 디자인 진행 상황, 모두 공유해야 한다.
눈빛만 봐도, 기획안 한 줄 읽어도 각이 탁탁 나오는 베테랑들도 밤새도록 모여 아이데이션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길게 설명하기 싫어 한숨 한번 쉬고 말아버렸다.
“아무튼 3시, 제작팀 작업하는 소회의실로 와.”
“왜 우리 기획팀이 가야 해.”
“아, 그럼 우리가 갈게. 됐냐?”
환장하겠네. 이거 우승을 해, 말아.
저 자식 때문에 우승의 의지까지 꺾일 정도였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분위기 좋은 제작팀과 디자인 시안을 짜고 서브 카피를 점검했다.
회귀 전에는 내 일하기 바빠서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제작팀 넷의 합이 기가 막혔다.
최민아와 도혁은 큰 그림을 그리는 스타일이고 컨셉에 따른 제작 방향 진행을 잘 잡았다.
반면 강시원 카피와 서인기 디자이너는 보조를 잘하는 스타일이었다.
강시원은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바디 카피, 그리고 보도 자료를 기가 막히게 뽑았고, 서인기는 그림 따고 레이아웃 뽑는 실력이 대단했다.
둘 다 기본기가 탄탄하다고나 할까.
‘이런 애들이 있어야 팀이 팍팍 돌아가는데. 무조건 안고 가야겠다.’
김민수는 거슬렸지만 뭐, 탁기준이 알아서 하겠지.
우리 예쁜 서희주 선배랑 앞으로 쭉 같이 살 거니까 김민수 정도는 감수해야지.
되지도 않은 논리를 혼자 펼치며 우승의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곧 탁기준의 호출 아래 전 팀원이 모이고 그가 기쁜 소식을 전해왔다.
“대표님께서 우승 팀은 전원 정직원 전환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하셨다.”
“와! 정말입니까?”
“기획 국장님이 대표님께 보고드렸어. 그렇게 진행하기로 했다.”
“오, 대박!”
탁기준이 기뻐하는 팀원들을 둘러보며 혀를 끌끌 모아 찼다.
“으이구, 기뻐하기에 너무 이르지 않나? 선배들 포함 일곱 팀 중에 일등을 해야 해. 다들 만만찮은 인재들인 건 너네가 더 잘 알 거고.”
“넵! 분발하겠습니다.”
끄덕인 탁기준이 브리핑을 시작했다.
“스칸디나비아의 봄. 메인 카피야.”
“와, 감성적이네요.”
“그렇지. 일단 메인은 감성 소구(광고에서 소비자에게 감정적으로 호소하여 구매를 유도하는 방법)로 시작할 거야.”
탁기준의 말에 도혁이 말을 보탰다.
“서브는 굉장히 드라이하게 갈 생각이야. 아무래도 가구니까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제품의 특성을 살려서 빡빡하게 가고 바디도 그런 식으로 뽑을 거고.”
“스칸디나비아의 봄, 나는 별론데.”
딴지를 걸지 않으면 김민수가 아니지.
짜증은 났지만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오피스 가구인데 처음부터 논리적으로 가는 게 낫지 않아? 가격대도 높잖아.”
“가격이 높으면 논리 소구가 낫다고 누가 그래?”
탁기준이 인상을 깊이 찌푸렸다.
“껌 살 때 아파트보다 합리적 소비를 더 따지는 게 소비자야.”
“네?”
“껌 광고 봐봐, 이런 기능이 있네, 충치를 예방하네, 어쩌고 하면서 얼마나 설명이 많아. 아파트 광고는 어때?”
도혁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우아한 분위기의 여자가 고개 한번 돌려주고 고상하게 아파트 브랜드 한번 말하면 끝이죠. 보통은.”
“빙고.”
탁기준이 무릎을 탁, 치며 빙고를 외쳤다.
“가격이 비쌀수록 오히려 감성에 호소하는 게 먹히는 경우가 많아. 껌 광고에서는 효과와 가성비를 따지지만, 아파트는 일종의 분위기를 중요시한다고나 할까.”
“가구의 실용적 효익(효용이 있는 이익) 대해서는 서브로 커버할 겁니다.”
김민수는 조금 사그라든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럼 뭐, 서브 카피를 지켜보도록 하죠. 어떻게 제대로 만들어 오는지.”
마치 컨펌이라도 하는 입장인 듯 거들먹거리는 말투에 탁기준은 잠깐 인상을 찌푸리더니 말을 이어갔다.
그를 상대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자, 중요한 건 CF 방향을 어떻게 갈 건지에 대한 거야. 기획팀 의견 있어?”
“모델을 썼으면 합니다.”
“모델이라. 생각해 놓은 사람은 있고?”
“배우 경수현 씨요.”
한수철의 말에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경수현은 아역 아니야?”
“스물두 살이던데요. 군대도 다녀왔구요.”
“최근까지 학원물에서 고등학생 역할 했었잖아.”
인턴들이 경수현의 사진을 보며 웅성거렸다.
탁기준조차 고개를 갸웃했다.
“얘는 좀 이미지가 모호하지 않아? 학생 가구라고 너무 단순하게 접근한 느낌이야.”
“흠, 업계의 평이 굉장히 좋아요. 그리고 더 알아봐야겠지만 이번에 새로 들어간 드라마가 꽤 괜찮을 거라는 소문입니다. 김기훈 감독 작품이구요.”
예상대로 경수현에 대한 반응이 썩 긍정적이지 않았다.
도혁이 스타 작가 김기훈의 얘기를 꺼내며 경수현 영업을 시작했다.
그 드라마는 35%에 육박하는 기념비적인 시청률을 기록했었다.
경수현은 김기훈 작가의 추천으로 주연으로 들어가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아직 누나로부터 론칭일 등의 세부 사항을 전해 듣지는 못 했지만, 드라마 얘기까지 질러 버렸다.
꼭, 반드시 이번에 잡아야 한다. 더 뜨기 전에.
모델료가 열다섯 배는 더 오를 예정이었다.
“김기훈 감독? 이분 사람 엄청 가리는 걸로 알거든. 내가 이쪽은 한번 확인해 볼게.”
“네. 메인 카피 들으니까 더 어울릴 것 같습니다. 사람을 계절에 비유하자면 정말 봄 같은 사람이에요. 그것도 초봄. 그리고 굉장히 세련되게 생겼구요.”
한수철이 경수현의 사진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강조했다.
적어도 여자인 최민아만큼은 크게 동조하고 있었다.
“경수현, 여자가 보기에 왜 안 뜨는지 모르겠어. 작품 하나 잘 만나면 대성할 스타일이거든.”
명현진에 최민아까지, 경수현이 여자에게 먹히는 타입인가 보다.
하긴 그러니까 이십여 년을 장수하며 남우 주연상까지 탈 수 있었겠지.
“그럼 이제 디자이너들 차례네. 카피라이터들은 하루 발 뻗고 자고, 기획안 PPT랑 시안 초안 나오면 다시 모이자고.”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일사천리로 회의가 마무리되고 퇴근하던 길.
명현진에게서 전화가 왔다.
흥분한 목소리가 너무 커서 황급히 핸드폰의 소리를 줄였다.
“조용히 좀 해. 누나. 귀 떨어지겠네.”
-야! 지금 조용히가 문제가 아니야. 대박.
“왜, 뭐가 대박인데?”
어울리지 않게 웬 호들갑인가 싶어 짜증을 한번 부려주었다.
명현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소리를 질러댔다.
-경수현 있잖아. 김기훈 감독이 밀어서 들어간 거래.
“고작 그거 때문에 이 난린 거야?”
이 누나야, 그건 알고 있다고. 론칭일이나 빨리 말해주시지.
-누구 땜빵인지 아냐?
“땜빵이었어?”
-그래, 놀라지 마. 무려 김성빈.
“뭐?”
김성빈 이런 복 없는 놈이 있나. 아니, 작품 보는 눈이 없는 건가.
김성빈은 현재 드라마 영화 캐스팅 0순위였다. 잘나가고 연기도 잘하고.
그러다 좀 망 테크를 타기는 했었지만 어떻게 김기훈 감독 작품을 놓치냐.
“김성빈은 어디 들어갔는데.”
-보물섬. 무슨 블록버스터 영화라던데.
풉, 큰 소리로 웃고 말았다.
그 희대의 망작. 그게 이맘때 크랭크인 했었구나.
명작영화사가 물에서 찍으면 물먹는다는 영화계의 명언을 흘려듣고 제작한 역대급 똥작이다.
두고두고 영화 팬에게 놀림당하게 되는 블록버스터 보물섬.
아무튼 운 없는 김성빈 덕분에 우리의 히어로 경수현이 톱스타로 발돋움하게 되니 고맙다고 해야 할까.
-론칭일은 석 달 뒤. 지금 촬영 들어갔고 기사는 내일부터 나온대. 그 소식 듣고 나 지금 경수현 만나러 가는 길.
“섭외하게?”
-어떻게 알았냐.
인생 2회차니까 알았지.
혼자 속으로 말을 삼키던 도혁의 발이 뚝 멈추었다.
“나도 갈까?”
-뭐? 네가 왜. 경수현한테 볼일 있어?
“어디서 보기로 했어?”
-이태원 탑원 커피숍. 우리 라디오 사전미팅인데 진짜 올 거야? 맨입으로는 안 되는데. 얼마 줄 거냐.
“오백 원.”
욕먹기 전에 전화를 끊고 이태원 쪽으로 가는 버스를 검색하려 폰을 들었다.
가로로 뻗은 액정이 분노 본능을 일으켰다.
“아씨, 몇 번 타고 가야 하냐.”
버스 정류장에 서서 한참 노선표를 뒤지자 눈동자가 아파왔다.
회귀의 쓴맛이었다.
* * *
통창 너머 남자의 해사한 얼굴이 보였다.
소년과 남자의 중간 어디쯤. 초봄의 신선함을 품은 미소가 깔끔한 인상을 풍겼다.
그는 매니저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잠깐만 그런데 저 앞에 앉은 저 여자, 명현진이냐? 누나?
초등학교 때 이후 처음 봤다. 누나가 원피스를 입은 모습을.
흉측하기 짝이 없는 풍경이었다.
안 본 눈 사고 싶은 마음을 붙들고 그들에게 다가가자 매니저가 미심쩍은 눈길로 바라보았다.
“혹시 누구신지.”
“안녕하십니까. 명도혁이라고 합니다.”
“아, 제 동생이에요. 태강애드 다니구요.”
태강애드의 이름을 듣자마자 매니저의 안색이 단박에 밝아졌다.
“아, 광고회사에서 나오셨군요. 이쪽으로 앉으시죠.”
“마침 딱 맞춰서 왔네. 우리 라디오 얘기가 막 끝났거든. 그럼 게스트 약속하신 거예요. 나중에 딴 말 하시면 안 돼요!”
“그럼요. 이렇게 직접 나와주시고 감사합니다.”
명현진은 원래 막내 PD일 때부터 메인이 될 때까지 전화로만 섭외해 왔다. 어지간히 경수현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하긴 저 괄괄한 성격에 치렁치렁 원피스까지 입고 나왔으니 말 다 했다.
느끼하게 억지 미소를 지어 보이는 명현진은 내버려 두고 찬찬히 경수현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자세히 보니 더 잘생겼다. 이목구비만 또렷한 것이 아니라 풍기는 아우라가 고급스럽다고 해야 하나. 그러면서도 신선하고.
일레라 가구와 찰떡인 미끈한 인상이었다.
도혁은 만족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CF 쪽도 관심 있으시죠?”
“그럼요. 불러만 주시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예의도 바르고, 전생의 기억으로 사고도 친 적이 없었다. 파도 파도 미담만 나온다던 이른바 ‘바르다 경 선생’ 아니던가.
가까이서 자세히 보고 소문대로 예의 바른 인성인지 확인하려고 따라왔는데, 대만족이다.
어우, 실물 장난 없네.
커피를 홀짝이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익숙한 얼굴이 다가와 경수현을 불러 젖혔다.
“어이, 경수현. 여기서 뭐 하냐.”
“안녕하십니까. 잘 지내시죠?”
“그럼 잘 지내지 인마. 네가 땜빵해 줘서 블록버스터 들어가잖아. 고맙다. 김기훈, 감독이랍시고 존나 싸가지 없는데.”
운도 지지리도 없을, 김성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