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고 천재 명도혁-15화 (15/252)

광고 천재 명도혁 15화

한수철의 구박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도혁은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했다.

‘저게 누구야. 설마, 경수현?’

창밖으로 키가 멀끔하게 크고 얼굴이 주먹만 한 남자가 지나가고 있었다.

매니저인지 짐을 든 남자 한 명과 얘기를 나누며 환하게 웃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지만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배우 경수현이었다.

그는 깔끔하고 반듯한 이미지로 국민 남동생으로 불렸다. 5살 때부터 연기를 했던 아역 배우 출신으로 아직 앳된 인상이었다.

회귀 전 오랜 연기 경력이 빛을 발해 남우 주연상까지 탔었지만 현재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지.

오랜 아역 이미지 때문에 스물둘이 다 되도록 고등학생 역할만 하고 있는 그였다.

‘경수현이 이맘때쯤 어떤 작품을 계기로 성인 배우로 완전 빵 뜨는데.’

서둘러 검색하려고 핸드폰을 열다가 쩝, 입맛을 다셨다.

가로본능이지 참.

스마트폰을 개발한 스티브 잡스가 얼마나 대단한 위인인가를 다시금 깨달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때쯤이 맞아. 확실해.’

누나 명현진이 경수현 좋다고 난리를 쳤었다.

흑심을 가득 품고 제 라디오 프로그램 게스트로 섭외를 해서 반고(반 고정)로 꽂았던 기억이 있었다.

징그러워 죽겠다고 했다가 욕먹었는데.

‘우리 징그러운 누나 도움 좀 받아볼까?’

깔끔한 마스크, 얼핏 직장인인 것도 같고 학생인 것도 같은 이미지, 해사하고 밝은 인상.

오랜 노하우의 오피스 가구와 신제품 학생 가구.

아역부터 연기했던 경륜의 17년 차 연기인이지만 성인 배우로서는 루키인 경수현.

퍼즐이 맞춰지듯 정확히 그림이 맞아떨어졌다.

도혁은 등을 의자에 기대며 맥주를 단번에 들이켰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한 편의 CF가 완성되고 있었다.

* * *

“누나, 얘 알아?”

“어! 경수현이네. 크으, 사진 잘 나왔다.”

“역시 아네.”

“어. 이번에 우리 채널에서 드라마 들어간다던데?”

경수현의 사진을 들이밀자 누나 명현진이 한 번에 그를 알아보았다.

역시 경수현이 빵 뜨게 될 때가 이맘쯤이 확실했다.

“얘 좀 안됐어. 아역 이미지가 너무 굳어서.”

“나이도 제법 많을 텐데. 이번 드라마에서도 아역은 아니지?”

“나도 자세히는 몰라. 제작국에 한 번 물어봐 줄까?”

“그래줄 수 있어? 론칭일, 배역, 상대 배우까지 자세히 좀 알면 좋겠는데.”

“얼마 줄 건데.”

“오백 원.”

“야, 명도혁!”

누나에게 정강이를 까이고 오백 원을 억지로 쥐여주었다.

한 번 더 등짝을 후려치던 명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경수현 인간성도 그렇게 좋대. 스텝들이 다 칭찬하더라. 이런 애가 떠야 하는데.”

“그러게. 나처럼 진국인가 보네.”

한 대 더 거하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아침이었다.

* * *

도혁은 1팀에 배정된 소회의실로 들어서며 한수철을 바라보았다.

밤을 새웠는지 초췌한 얼굴에 비듬도 덕지덕지 머리카락에 붙어 있다.

“한수철, 밤새웠냐? 가서 샤워라도 좀 해.”

“그럴까. 아 죽겠다. 사실 나 PPT 잘 못하거든.”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잖아? 태강애드에서 프레젠테이션 하면 한수철이었다.

진중하고 낮은 목소리로 신뢰감을 주는 발표도 좋았지만, PPT 자료를 만드는 건 한수철을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보통 AE들이 PPT로 초안을 작성하면 디자이너들이 예쁘게 꾸며 주기도 하는데, 한수철에게는 그런 것이 필요 없을 정도로 트렌디한 기획안을 만들었다.

오죽하면 회귀하기 직전까지 한수철이 만든 PPT 태블릿을 사내 공용으로 사용하고 있었을까.

의아해 들여다본 한수철의 노트북 속 기획안은 엉망이었다.

색채, 폰트, 디자인, 레이아웃까지 촌스러움의 극치, 총체적 난국이었다.

‘원래는 기획안 잘 못 만들었구나. 와, 이 자식 진짜 괴물이네.’

저 실력으로 손가락이 닳도록 밤을 새우고 노력해서 최고의 기획안을 만들어냈던 거였다.

자랑스러운 내 친구 한수철이 아닐 수 없었다.

흠, 그런 의미에서 우리 수철이 선물 하나 줄까?

“수철아. 너 모델은 누구 생각하고 있냐?”

“글쎄. 안 그래도 생각 중인데 학생 가구니까 아역을 써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오피스 느낌을 가져오려면 세련되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아직 고민 중이야.”

“너, 경수현이라고 아냐?”

“경수현?”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전 국민이 아는 아역 배우 경수현이었다.

도혁이 사진을 보여주자 한수철은 단박에 알아차렸다.

“얘 알지. 최근에 ‘꽃이 피었네’에 아역으로 나온 애잖아.”

“맞아. 이 친구 어때?”

“마스크 신선한데 인지도도 있고. 괜찮은 것 같아. 일단 출연료 좀 알아봐야겠다.”

“그래. 모델 제안 고려해 봐.”

경수현이 아직 뜨기 전이었으므로 모델료도 합리적인 선일 것이 분명했다.

이번 드라마로 완전한 성인 배우로 인정받은 경수현은 일 년 뒤 수억대의 CF 우량주로 발돋움한다.

사고 한번 치지 않는 반듯한 이미지에 면접 프리 패스 상으로 불릴 만큼 어머님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하지만 아직은 천만 원 대에 네고가 가능한 급이었다.

어차피 모델 제의는 카피라이터의 범주도 아니기에 툭, 한수철에게 팁을 던져주고 자리에 앉았다.

“자, 그럼 메인 카피를 한번 뽑아볼까.”

“커피부터 뽑아야지.”

디자이너 서인기가 센스 있게 손안에서 동전을 짤랑거렸다.

‘저 자식도 안고 가면 좋을 텐데.’

서인기는 선이 굵고 과감한 색채를 쓰는 좋은 디자이너였지만 정직원 전환에 실패하는 모양이었다.

도혁의 머릿속에 태강애드 서인기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볼수록 아까운 친구였다.

회귀 전 청년 실업이 심할 때처럼 몇백 명 중에 한두 명 뽑는 인턴십도 아니니까 어떻게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갑갑한 마음이 들어 서인기에게 커피를 사주었다.

싸구려 자판기 커피 말고 모카라떼로.

“고맙다. 근데 지금 내 라이벌이 최민아인 거지?”

“그렇긴 하지.”

“듣기론 일차에서 한 팀에 AE 두 명, 카피랑 디자이너 한 명씩 남긴다고 하더라고.”

“그렇구나.”

서인기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최민아가 천재형에 가까운 디자이너라는 걸.

태강애드 AE들 사이에서 최민아의 존재는 독보적이었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나?

도혁은 디자이너가 아닌데도 그 말이 참 부러웠다. 개떡인데 찰떡이라니.

하지만 최민아는 그런 칭찬을 듣기에 충분한 인재였다.

척하면 척, 기획안만 보면 레이아웃부터 색감까지 기가 막히게 뽑아내는 걸 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서인기는 본인이 못난 게 아니라 너무 강한 라이벌을 만난 거였다.

저 자식보다는 아니겠지만.

멀리서 명도혁의 라이벌, 강시원 카피라이터가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대충 모닝커피를 마신 제작팀이 한자리에 모였다.

둘러앉아 아이데이션을 할 것인가, 각자 카피를 뽑아 올 것인가, 탁기준이 협업 점수를 매길 것이므로 서로 협조하면서도 어떻게 자기만의 경쟁력을 선보일 것인가.

제작팀 4명의 머리가 바쁘게 굴러갔다.

잔머리 돌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먼저 침묵을 깬 건 도혁이었다.

“시작해야지. 자 메인 컨셉은 미니멀리즘. 여기서부터 접근해 보자고.”

서브 컨셉과 세부 사항은 나오는 대로 AE 측에서 전달해 주기로 했다.

일단 미니멀리즘으로 아이데이션을 시작했다.

“정리해 보면, 일레라 가구는 오피스 가구로서의 강점을 학생 가구에 접목하겠다, 합리적 미니멀리즘을 구현하겠다, 뭐 그런 거지?”

“그렇지. 아마 오피스 가구는 별도로 라디오 상품권 광고 진행할 거야.”

“그럼 우리는 학생용 가구 론칭에만 집중하면 되겠네.”

강시원이 열심히 메모를 끄적이며 물었다.

“미니멀리즘 하면 떠오르는 건?”

“디케아, 핀란드, 스칸디나비아….”

“잠시만, 뭐라고?”

무언가 떠오른 도혁이 팔을 들어 뚝, 회의를 멈추었다.

그러곤 빙긋이 웃으며 질문했다.

“학생 하면 떠오르는 건 뭐가 있을까.”

“뭐, 학생, 공부, 책상, 새 학기, 봄.”

“그래. 그거야!”

“뭐?”

도혁은 남은 커피를 입속에 단번에 털어 넣었다.

“난 탁, 감이 왔어.”

저도 모르게 탁기준 같은 소리를 뱉어버렸다. 탁, 감이 왔다고!

그리고 이 제작팀을 전부 안고 갈 감도 함께 와버렸다.

‘너네, 동기 잘 만난 줄 알아라.’

혼자 피식대며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야! 너 회의하다가 어디 가!”

“조금 기다려 봐. 탁기준 선배 불러 올게. 같이 얘기하자.”

“벌써?”

“방향 틀리면 우리 디자이너들 삽질해야 하니까.”

뛰듯이 기획1팀으로 달려가 탁기준을 불러 왔다.

광고주 영업 가겠다는 걸 십오 분만 얼굴 보자며 겨우 데려왔다.

“이놈의 자식들아, 빨리 말해. 딱 십오 분 준다.”

도혁은 핸드폰 알람까지 걸어놓는 얄미운 탁기준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카피를 읊었다.

탁, 감이 온 오늘의 컨셉 카피.

“스칸디나비아의 봄.”

“뭐?”

“뭐라고?”

탁기준이 눈살을 말며 미간을 좁혔다.

“미니멀리즘, 스칸디나비아, 그리고, 봄 학기?”

“맞아요. 역시 바로 아시네요.”

탁기준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져갔다.

“와, 이거 감성 터지는데?”

“일레라 가구는 합리적인 느낌의 젊은 기업입니다. 김영석 대표도 젊은 편이구요. 더구나 타깃층이 젊거나, 어리죠.”

“봄, 하면 시작이라는 의미도 있으니까 신선하고 좋은데요? 아, 나도 감이 탁, 왔어요!”

최민아가 뭐가 생각났는지 펜으로 끄적대기 시작했다.

“서브 카피는 어떻게 가려고?”

“서브는 합리를 지향한 논리 소구(논리에 호소하여 구매를 유도하는 방법)로 가겠습니다. 그쪽은 자신 있어요.”

강시원 카피가 대답하는 걸 들은 탁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팀워크도 좋고, 대단하다. 우리 1팀! 술값 안 아깝네!”

“감사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담판을 좀 지어야겠습니다만?

“팀 대항 미션이잖습니까? 계속 같은 팀 체제로 가는 거죠?”

“아마도. 우리 회사는 프로젝트 팀 한번 짜서 합만 맞으면 쭉 가는 편이라 대표님이 그렇게 하라고 지시하셨을 거야.”

“그래서 말인데 어차피 팀별 미션인 거, 우승 팀은 전원 정직원 전환 어떻습니까? 태강애드에서 계속 근무하는 걸로요.”

“우승 팀만?”

“그렇죠. 남은 팀은 뭐 알아서 뽑으시구요.”

“하, 어차피 우승 팀은 1팀이 될 거다?”

“눈치채셨군요. 제가 그렇게 만들 거거든요.”

“명도혁. 이 자식 자신감이 넘치는구만.”

탁기준은 패기가 마음에 든다며 손가락으로 오케이를 날렸다.

“윗선에 제안 드려보지. 내가 들어도 괜찮은 것 같아서.”

탁기준의 말에 인턴들의 환호가 터졌다.

“아직 확정은 아니니까 흥분하지 말고, 우승할 수 있게 그림이나 잘 뽑아봐.”

“넵! 선배님!”

탁기준이 기뻐하는 제작팀을 뒤로하고 문밖을 나서며 도혁을 불렀다.

“아깐 애들 있어서 칭찬을 제대로 못 했는데, 좀 소름 돋았다.”

“아직 소름 돋기는 이른데요.”

“뭐 따로 생각해 둔 거라도 있어?”

“당연하죠. 설마 하나로 가겠어요?”

“이 자식. 진짜.”

탁기준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단하다. 명도혁. 이 미친놈아. 아, 진짜 기획으로 오라니까.”

“AE는 생각 없다니까요.”

“그럼 나한테 김민수 저 자식이랑 일하라는 거냐?”

아, 오늘 안 보여서 잊고 있었다, 빌런 김민수의 존재를.

우승하면 김민수도 정직원 전환이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