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12화
기획팀장이 소리쳤다.
“모두 건투를 빕니다. 남은 시간 504시간! 당장 움직여! 시작!”
그제야 정신을 차린 인턴들이 웅성거리고 각자 팀원을 찾아 자리 이동을 시작했다.
우리 팀은 나와 한수철의 주위로 모여 테이블을 둥글게 만들었다.
탁기준이 다가와 도혁의 어깨를 툭 쳤다.
“팀장 해야지.”
“싫습니다. 팀장은 기획이 하는 게 편하죠.”
“아씨, 너 이 자식 카피 꼭 써야 되냐? AE 하라니까.”
자리 이동으로 소란스러워 다들 둘의 대화를 자세히 듣지 못했지만, 김민수는 들은 모양이었다.
사정없이 인상을 구기며 탁기준 앞으로 다가왔다.
“개인적인 친분과 상관없이 공정한 평가 부탁드립니다.”
“개인적 친분? 나 여기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 없는데? 걱정 말고 피티나 잘하도록.”
김민수의 의도를 모를 리 없는 탁기준이 능글거리기 시작했다.
느물느물 담 넘어가는 저 능구렁이를 이기려면 김민수는 아마 다시 태어나야 할 거다.
적어도 명도혁처럼 회귀 정도는 해야지.
속으로 말을 삼키며 자리에 앉았다.
일단 멘토 탁기준의 진행으로 1팀 회의가 시작되었다.
“자, 우리는 아마 지금부터 지겹도록 아이데이션(아이디어 생산을 위한 모든 활동) 회의를 반복하게 될 거다. 일단 진행할 팀장을 뽑아야지.”
“팀장이 나중에 발표도 직접 하는 겁니까?”
“그건 니들이 알아서 해야지 인마, 그만 따지고 팀장 누가 할래.”
탁기준이 따져 묻는 김민수의 질문을 한 번에 잠재우고 도혁을 보았다.
도혁은 못 본 척 한수철을 추천했다.
“한수철 씨가 하면 어떨까요.”
“왜?”
“성격도 좋고 인턴들하고 두루 잘 지내시는 것 같아서요.”
“그렇게 하시죠. 좋을 것 같은데요.”
“저도 좋습니다.”
김민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평소 S대 출신임을 은연중에 밝혀오던 김민수다.
질문도 많이 하고 미션도 성공했고.
본인이 팀장을 할 거라고 확신한 모양이었다.
못마땅한 기색으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든지 말든지 모른 척해 버렸다.
한수철은 팀장에 더없이 적합한 인물이다.
사람을 끄는 묘한 매력, 생각을 아우르는 유연함, 거기다 설득력 있는 발표력까지.
여럿의 아이디어를 하나의 결과물로 도출해 내는 천상 AE 한수철.
팀장으로 다시 마주한 그가 새삼 반가웠다.
한수철이 곧바로 회의를 진행했다.
“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기획팀장님 말씀대로 시간이 없어요. 먼저 전체 시간 계획을 짜도록 하죠. 환경분석, 시장분석 등이 먼저겠네요. 사흘이면 될까요.”
사흘 내에 국내 가구 시장을 총망라한 분석을 해내야 한다.
불가능해 보였지만 그 이상은 시간을 쓸 수 없었다.
도혁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한수철은 다음 순서를 적어 내려갔다.
“타기팅, 설문, 홍보 방향 설정, CF 아이디어 창출, 시안 제작, 최종 제안서 작성, 아이구.”
한숨을 내뱉는 건 한수철만이 아니었다.
“이걸 다 3주 만에 해야 한다니.”
말수가 적은 최민아조차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최민아는 굉장히 유능한 디자이너다.
언젠가 유행했던 카피처럼 소리 없이 강하다고나 할까.
여리여리하고 청순한 느낌의 최민아였지만 그녀의 디자인은 굵직한 선이 돋보이는 강렬한 스타일이었다.
한눈에 팍, 꽂히는 강한 매력이 있었다.
도혁과는 합이 잘 맞았다.
그 역시 한 번에 꽂히는 카피를 선호했으니까.
한수철, 최민아, 명도혁.
한때 팀을 이뤄서 들으면 알 만한 대표 광고도 여럿 만들어냈었다.
나중에는 각자 흩어져서 팀장급으로 일했지만, 그때의 젊은 열정이 가끔 그리웠는데.
다시 뭉친 팀을 보자 가슴이 웅장해졌다.
그의 말랑한 감성을 깨부수는 김민수의 한마디는 재수 없었지만.
“발표자는 추후에 따로 정하는 걸로 하죠. 팀장이 꼭 발표하는 건 아니라고 하셨으니까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거 같은데요. 이 자식아.’ 육성으로 욕을 뱉을 뻔했다.
겨우 속으로 말을 삼키고 모른 척 한수철이 적어 내려가는 계획표를 바라보았다.
“자, AE들부터 움직일 수밖에 없네요. 저희가 먼저 타깃 분석까지 마친 후 브리핑하겠습니다. 그동안 제작 파트는 가구 쪽 시안, CF 등 동향 조사 부탁드립니다.”
“네. 알겠습니다.”
회의가 끝나고 도혁은 느긋하게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시장분석, 타깃 설정, 컨셉, 카피, 디자인.
다 중요하지. 광고 기획의 전 과정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다만, 김영석 대표의 머릿속에는 다른 것이 들어 있을 뿐.
그걸 아는 사람은 명도혁뿐이므로 잠깐의 여유를 즐겨본다.
‘김영석을 잡으려면 두 가지를 잡아야지. 하나는 모델 섭외, 그리고 다른 하나는…….’
도혁의 눈에 흥미로운 이채가 돌았다.
수를 알고 들어가는 전쟁이라. 이거, 재밌는 싸움이 되겠는데?
* * *
이틀.
제작을 지망하는 인턴들에게 사흘의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AE 지망자들이 사흘 동안 시장분석을 해오기로 한 것이다.
추가분석안을 작성하는 동안 제작 담당들은 유행하는 카피를 점검하고 해외 동향을 살피는 정도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탁기준은 사전 분석 작업에 돌입한 AE 쪽에 붙어서 기획안을 봐주고 있었다.
계속 진행해 오던 냉장고 CF도 찍느라고 여념이 없었고.
오랜만에 탁기준의 그늘을 벗어나 일찍 퇴근한 도혁은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며 걷고 있었다.
카피라이터에게는 느긋하면서도 초조한 시간.
시장 분석안이 나오기 직전까지의 시간이다.
‘좋게 말하면 여유, 나쁘게 말하면 폭풍 전야라고나 할까. 후우.’
AE들이 환경과 제품 분석을 끝내고 나면 죽음의 아이데이션 회의가 시작된다.
함께 방향을 잡아갈 때는 좀 낫지만 컨셉이 잡히고 나면 컨펌(시안 등을 확인하는 작업), 컨펌, 컨펌의 연속이다.
시험만 계속 본다는 말이다.
-이건 좀, 아닌 거 같은데.
-확 오는 게 없어. 아, 진짜 이 정도밖에 안 나오나.
-팍, 꽂히게 좀 써 와봐.
정확히 뭘 고쳐 오라도 아니고 두루뭉술 모호한 소리나 툭툭 뱉는 국장과 AE들의 뒤통수를 때려주고 싶은 시간이라고나 할까.
이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제작팀은 시장 분석 결과가 나올 때까지 죽을힘을 다해서 자료를 모으고 감각을 키운다.
그리고 뼈를 갈아서 시안을 만든다. 그 후엔.
‘백번을 고치라고 하지. 아오.’
욕이 저절로 튀어나오지만, 이번엔 다를 거다.
이미 명도혁의 머릿속에는 캠페인 성공 사례들이 백과사전처럼 빼곡이 들어차 있었다.
그가 세계의 성공한 가구 캠페인을 빠르게 떠올렸다.
그러곤 빙긋이 웃었다.
일레라 가구, 이건 이미 성공한 캠페인이었으니까.
솔직히, 명도혁이 담당했었지만 일레라 가구의 사례는 정말 이례적으로 성공적이었다.
해외 유수의 광고대행사에서 케이스 스터디(사례분석)를 의뢰했고 해외 유수 광고제에서 상도 받았다.
오피스 가구 업체에서도 1등을 못 했던 일레라 가구.
그 중견 기업을 가정용 학생 가구의 선두 업체로 탈바꿈시킨 것이 바로 태강애드였다.
도혁이 회귀할 즈음엔 실용성을 더한 신혼 가구로까지 사업을 확장해서 혼수 선호도 1위를 기록할 정도로 성장했었다.
도혁은 기억을 더듬으며 머릿속으로 메인 컨셉과 카피를 정돈했다.
천천히 지하도에서 올라오는데 반가운 간판이 보였다.
동양 책, 비디오 대여점
-판타지 드래곤 1~10. 동방불패전 1~8. 절찬 대여 중.
종이책 대여점에서 판타지 소설이 쏟아지던 시절이었다.
정겹던 비디오 가게도 아직 성황리에 장사 중이었고.
홀린 듯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어! 도혁이 왔네.”
“아저씨, 반가워요. 와 진짜 반갑네.”
“뭘 엊그제 보고서는. 전에 말해놓은 책 어제 납품받았어. 잠깐만 기다려 봐.”
반가워 미칠 지경이었다. 스마트폰으로 어디서든 콘텐츠를 볼 수 있는 세상에서 살다가 왔지만, 가끔 이 종이책과 비디오의 감성이 그리울 때가 있었는데.
대여점 끝물인 시절이었다.
곧 편의점으로 전향하게 될 저 배불뚝이 아저씨 역시 장르소설 매니아였다.
“무협지 세트랑, 그때 그 투명한 드래곤 찾았지? 완결까지 다 들어왔어.”
“이거 진짜 얼마 만에 보는 거냐, 와.”
“며칠 안 됐다니까. 오늘 너 이상하다? 참, 나 라면 먹을 건데 같이 먹을래? 물 다 끓었네.”
“네! 네, 아저씨.”
단골이었던 그에게 특별 서비스로 내준 라면을 먹고는 검은 봉지에 한가득 장르 종이책을 담아왔다.
큼지막하고 푸짐한 초코바를 한입 베어 물며 흠뻑 미소를 머금었다.
회귀의 단맛이었다.
그렇게 달콤한 사흘이 지나고, 제작팀을 포함한 팀원이 한자리에 모였다.
탁기준은 미팅이 있다는 말만 남긴 채 사라지고 인턴 팀원끼리는 처음 모이는 자리.
한수철이 먼저 입을 뗐다.
“우리 동기끼린데 말을 놓을까요. 좀 편하게 작업하면 어떨까 해서요. 물론 나이에 맞춰서 호칭은 알아서들 부르구요.”
“그러시죠. 저도 그게 편할 거 같습니다.”
“그렇게 하면 자유로운 아이데이션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격식은 놓고 편하게 의견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뭐, 그렇게 하시죠.”
까다로운 김민수조차 고개를 끄덕이자 한수철이 먼저 말을 놓았다.
“우리 기획 쪽에서 먼저 환경과 기업 분석을 정리해서 메일 보냈는데, 혹시 다들 확인해 봤어?”
“어. 정리 잘했던데.”
“이게 조사할수록 시장성이 충분하더라고. IMF 이후 학생 가구 쪽으로는 선점 기업이 없어. 수요는 충분한데 말이지.”
“하긴 요즘은 아이가 집마다 하나 아니면 둘이니까 자식한테 들이는 돈 안 아끼잖아. 근데 학생 가구는 딱히 떠오르는 브랜드가 없네.”
“오히려 사제품 시장이 활기차더라고.”
“도혁이 너는 어떻게 봤냐?”
한수철이 토론 중간에 도혁의 눈치를 살피며 의견을 물었다.
“맞아. 지금 시장을 선점하면 아주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다고 생각해. 거의 시장 개척 수준이지. 태강애드와 아주 긴 파트너십을 이어갈 수도 있을 거고.”
“최상의 시나리오네.”
“분석안이 전체적으로 깔끔하게 정리가 잘되기는 했는데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
질문을 하자 기획팀이 긴장한 표정으로 도혁을 바라보았다.
“말해봐.”
“해외시장 동향 파악은 안 했어? 국내 학생 가구 브랜드가 미미하니까 해외 유사 사례를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순간 자신만만하던 AE들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러니 인턴이지, 속으로 중얼거리며 미리 조사해 온 자료를 펼치려던 순간이었다.
김민수가 딴지를 걸어왔다.
“명도혁! 해외는 조사해서 뭐 해. 이미 국내에서 시장성이 확실한데 삽질이지.”
“광고는 반걸음 먼저 유행을 선도해야 해. 그런 점에서 선진국 사례 분석은 의미가 있는 거고.”
“난 일본 광고 베껴 오고 그런 거 진짜 별로던데?”
하, 저걸 말이라고 하나. 누가 일본 광고 표절하자고 했냐, 이 자식아.
튀어나오는 욕지기를 겨우 누르며 김민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내 말 좀 들어보세요. 우리 김 민 수 인턴님.”
도혁이 실소하며 김민수 쪽으로 몸을 돌렸다.
발끈하는 김민수의 얼굴이 벌겋게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