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고 천재 명도혁-11화 (11/252)

광고 천재 명도혁 11화

한 업계에서 오래 일하다 보면 누구나 천재를 만나게 된다.

도혁은 명카피라고 불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천재는 아니었다.

하여 그런 천재들을 만나면 향상심에 불타서 더 열심히 내달리곤 했었다.

하지만 도혁이 가장 존경했던, 넘을 수 없는 산 같던 존재는 딱 한 명이었다.

내 앞에 서 있는 저 남자, 광고 천재 차현우 말이다.

광고계의 레전드. 대한민국의 신화, 우주 최강 광고인차현우에게는 많은 별칭이 있었지만, 천재라는 말 외에는 어울리지 않는 진짜 하늘이 내린 천재 그 자체였다.

도혁은 그의 광고 제작물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의 창조물은 창의와 혁신이 넘쳤고 말도 안 되게 신선했다.

범인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아이디어로 브랜드를 각인시켰고, 그의 캠페인은 모조리 성공했다.

도혁이 가장 존경했던 광고인 차현우 선배가 지금 눈앞에 서 있었다.

감회에 젖어 차현우를 바라보곤 울컥해 버렸다.

그러자 차현우가 완전 어이없어했다.

“진짜 반가워요. 선배. 와, 이게 얼마 만이냐.”

“이 자식이 뭘 잘못 먹었나. 누가 들으면 군대 십 년은 갔다 온 줄 알겠네.”

“그래도 반가운 건 반가운 거지. 아씨.”

차현우가 미국으로 간 지 오 년이 넘었으니까. 완전 오랜만에 보는 게 맞았다.

태강애드 앞 국밥집에서 밥 한 그릇 먹은 게 끝이었다고 이 사람아!

차현우가 악수하는 손을 놓지 못하는 나를 보고 고개를 기울였다.

“이 자식 군대 갔다 오더니 이상해졌네. 뭔 일 있었냐?”

“무슨 일 없었어. 선배. 선배는 잘, 지냈어요?”

아. 잘 못 지냈겠구나.

반가운 마음에 잊고 있었다.

차현우는 도혁이 제대한 직후 자퇴했다.

집안 형편이 퍽 어려워 학업을 이어가지 못했고, 이 학벌의 한계는 오랫동안 차현우의 발목을 붙잡았다.

학벌을 무척 중시하던 시대였으니까.

“나야 뭐, 살게 되면 사는 거고 숨 못 쉬면 죽는 거고.”

“……저기 선배.”

“어차피 알게 될 거니까 말할게. 나 오늘부로 자퇴했다.”

“…….”

“왜 말이 없어. 그렇게 반가워하던 내 얼굴 또 언제 볼지 모른다니까?”

“밥이나 먹으러 가요.”

밥이나 먹으러 가자.

차현우가 미국 가기 직전에 했던 말이었다.

3대 광고계를 휩쓸고 대한민국 매출 1위를 찍던 날, 차현우가 회사 앞으로 찾아왔다.

-명도혁. 밥 먹자. 나 미국 간다.

-크, 멋지다, 선배. 이제 세계를 씹는구만.

-부러우면 따라오든가.

그때 따라가지 않은 걸 참 오랫동안 후회했었는데.

도혁은 그날의 마지막 국밥을 생각하며 설렁탕에 밥을 말았다.

침묵하는 도혁을 바라보며 차현우가 물었다.

“안 물어보냐? 왜 자퇴하는지, 무슨 일이 있는지.”

“선배야 뻘 짓할 사람 아니니까 걱정 안 합니다. 힘들어도 일어나는 사람이니까.”

“자식, 할배처럼 말하네.”

“광고 놓지 마요. 아무리 힘들어도.”

“광고라. 글쎄, 지금은 여유가 없어서.”

대학을 때려치운 차현우는 노가다를 하면서 가족을 부양했는데, 그러면서도 광고를 잊지 않았다.

빚을 다 갚는 순간 찌라시 간판 가게를 차리고 결국은 우주를 평정해 버렸었다.

그의 일생은 역경을 이겨낸 진짜 광고인 그 자체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힘들 것이다.

부양해야 할 미성년자 여동생만 둘이거든.

그 뒤로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숨조차 쉬지 않고 별다른 말도 없이 부지런히 국밥을 떠먹을 뿐이었다.

목구멍으로 꺽꺽 밥을 밀어 넣으며 서툰 위로도 함께 삼켰다.

‘선배. 어떻게든 해보자. 이번 생에는 같이 한번 가보자고.’

무겁게 삼킨 국밥은 여전히 뜨거웠다.

* * *

하루의 휴식 후 돌아온 태강애드는 혼돈의 도가니였다.

라디오 광고를 따 온 도혁의 주변으로 인턴들이 몰려든 것이다.

한수철이 대놓고 비결을 물어왔다.

“명도혁, 너 도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냐? 신입도 아니고 인턴이 광고 수주하는 게 말이 돼?”

“그러니까. 우리는 상품권 광고도 겨우 따 왔는데. 눈으로 보고도 못 믿겠다니까.”

“비결이 뭐냐. 혹시 일레라 광고 대표가 너네 할아버지냐?”

웅성거리는 인턴들에게 대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순간 기획1팀 직원들이 몰아닥친 것이다.

탁기준이 들어오자마자 소란한 실내를 정돈했다.

“조용! 아침부터 왜 이렇게 시끄러워!”

폭풍 전야.

그야말로 폭풍 전의 밤과 같은 풍경이었다.

처음엔 기획팀 직원 전원이 들어오더니 팀장까지 나타났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눈치챈 인턴들이 자리에 앉아 다이어리를 펼쳐 들었다.

만만찮은 미션이 주어질 게 분명한 분위기를 감지한 것이었다.

“대학생 인턴 여러분, 모두 반갑습니다. 기획1팀 팀장입니다.”

평소 탁기준이 신규 교육을 해왔던 것과는 달리 기획팀장이 직접 브리핑을 하려는 듯 마이크를 잡았다.

“모두 일전에 명도혁 인턴이 일레라 가구에서 라디오 광고를 따 왔던 일을 기억할 겁니다. 그것만 해도 사실 인턴으로서 대단한 성과죠. 그런데.”

기획팀장이 말을 끊고 대회의실을 쓰윽 둘러보았다.

“이번에 그 일레라 가구에서 대대적인 마케팅 캠페인을 의뢰해 왔습니다.”

인턴들이 웅성거리고 모두의 시선이 도혁에게 꽂혔다.

부담스러워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기획팀장이 주목을 외쳤다.

“자, 모두 이쪽으로 집중하시고. 제 말을 끝까지 듣기 바랍니다.”

기획팀장은 툭툭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회심에 찬 미소를 지었다.

‘설마?’

불길한 예감이 도혁의 머리를 스쳐 갔다.

“이번 미션은 실전입니다. 일레라 가구의 마케팅 기획안, 인턴들이 팀을 나누어 경쟁 프레젠테이션으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하, 경쟁 피티.’ 오래전 노랫말처럼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인턴십의 둘째 주. 드디어 광고인에게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철천지원수, 경쟁 프리레젠테이션과 맞닥뜨렸다.

기획팀장이 말하는 경쟁 프레젠테이션.

광고인의 숙명과 같은 친구이자 원수다.

보통은 타사와 함께 경쟁하지만,사내에서 프로젝트 팀을 짜서 경쟁을 하기도 했다.

광고의 컨셉부터 기획, 제작, 최종 CF나, CM 마지막으로 어떤 매체에 들어갈지에 관한 매체 계획까지.

광고와 홍보의 모든 것을 제안하는 광고 기획의 꽃이 바로 경쟁 프레젠테이션이었다.

기획팀장이 미간을 좁히며 인턴들을 둘러보았다.

“광고주들은 보통 3~5팀 정도의 광고대행사를 경쟁에 부쳐서 그중 마음에 드는 회사를 선택합니다. 광고주 피티 일정이 나오면 각 대행사는 기획안을 준비하고 광고주 앞에서 순서대로 발표를 하죠.”

듣기만 해도 속이 갑갑해 오는지 인턴들의 한숨이 이어졌다.

“보통 대형 광고주들은 여러 대행사를 피티에 참여시키는 편입니다. 광고 집행 예산이 많다 보니 여러 곳의 기획안과 시안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하려는 겁니다.”

“이번 일레라 가구도 경쟁 프레젠테이션인가요?”

인턴 중 한 명이 한 질문에 기획팀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레라 가구는 독점으로 기획을 의뢰해 왔습니다. 태강그룹 계열사 외에는 이례적인 케이스죠. 하지만 이 경우에도 사내에서 경쟁 프레젠테이션을 할 수 있죠. 바로 지금처럼.”

기획팀장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걸렸다.

“교육도 하고 실전도 체험해 보라는 차원에서 사내 경쟁에 부친 겁니다. 인턴들에게 거는 기대가 아주 큽니다.”

브리핑을 듣던 도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조금 이상한데?’

그의 기억으로 대학생 인턴십 과정 중 경쟁 피티 미션이 있기는 했지만, 그건 가상 대결이었다.

실제로 광고주에게 제안하지는 않는 사내 모의 대회 같은 형식으로 진행이 됐었는데.

전생의 기억과 약간씩 틀어지는 상황에 조금 당황했다.

몇 년 빨리 가정용 가구 시장에 진입하는 일레라 가구, 달라진 인턴십 과정.

이래도 되는 걸까.

회귀해서 이렇게 시장을 바꿔놔도 되나 싶고, 이렇게 도혁이 영향력을 행사해도 상관없을까 걱정도 되고.

하지만 그에게는 긴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극한의 프레젠테이션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기획팀장이술렁이는 인턴들을 돌아보며 말을 이어갔다.

“5개 팀으로 나눠서 진행하겠습니다. 이력서의 희망 부서에 따라 임의로 기획과 제작을 섞어 팀을 짜 왔습니다. 각자 확인한 후 팀별로 모여서 진행하도록 합니다.”

탁기준이 5개 팀의 구성원과 광고주 현황 등이 적힌 인쇄물을 나누어주었다.

도혁은 1팀에 소속되어 있었다.

1팀(멘토 탁기준).

AE 한수철, 김민수, 김윤기, 정진수.

카피라이터 명도혁, 강시원.

디자이너 최민아, 서인기.

탁기준이 멘토였고, 한수철 최민아 등 반가운 얼굴이 같은 조였다.

미심쩍은 김민수가 같은 팀이라는 건 좀 찜찜했지만 나쁘지 않은 구성이었다.

기획팀장이 웅성거리는 인턴들 사이에서 날카롭게 소리쳤다.

“3주에 두 팀!”

“네?”

“최종적으로 두 팀의 기획안만 채택하여 광고주에게 제안합니다. 중요한 건 인턴 다섯 팀뿐 아니라 기존 직원들의 프로젝트 팀도 포함해서 평가할 거라는 겁니다.”

기획팀장의 말에 여기저기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인데 인턴에게만 맡길 수는 없겠죠. 프로젝트 팀까지 총 일곱 팀 중 두 팀만 뽑을 예정입니다. 나머지는 자동 탈락이죠.”

“하아…….”

“그리고, 피티 준비 기간은 딱 3주 드리겠습니다.”

“3주!”

“주어진 시간 동안 어떻게 해서든 광고주가 솔깃해할 제안서를 만들어 오세요.”

“질문 있습니다.”

김민수가 손을 번쩍 들고 기획팀장을 불렀다.

“말씀하시죠.”

“우승하면 보상이 있습니까? 그리고 멘토가 팀장을 하는 건가요?”

“거기 나누어 드린 프린트물 보시면 상세한 사항이 나와 있는데, 성격이 급하군요.”

기획팀장이 미간을 조금 좁히며 설명을 이어갔다.

“우승한 팀에겐 소정의 상금을 지급합니다. 또한 멘토가 프레젠테이션의 과정을 평가할 예정입니다.”

“평가가 결국 멘토 마음이라는 거잖아요.”

질문에 뾰족하게 날이 서 있자 기획팀장의 눈살이 가늘어졌다.

“다른 조직도 그렇겠지만 광고 회사에서 팀워크는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우린 전부 개성이 강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바닥 굴러 들어온 거고.”

맞는 말이다. 시쳇말로 또라이, 괴짜, 4차원, 감성충이 이렇게 많이 모인 직업군이 흔하지는 않지.

그간 도혁과 함께한, 기인에 가까웠던 수많은 광고쟁이들의 얼굴이 머릿속에 스쳐 갔다.

빌런들의 천국 광고대행사.

카피와 작곡을 동시에 하는 인간도 있었고, 1.5리터 믹스 커피를 3통씩 종일 타 먹는 믹스 커피 빌런도 있었다.

회사에서 봐온 온갖 개성 강한 인간들을 떠올리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겪어보면 알겠지만 광고 회사에는 특이한 사람뿐 아니라 성질이 더러운 인간도 많을 겁니다. 기획팀장도 그중 하나라는 말은 차마 못 하겠고.”

주제 파악을 잘하는 게 기획팀 팀장의 특장점이었나 보다.

기획팀장은 훗날 소시오패스 같은 성격으로 동기와 선배를 짓밟고 부사장을 역임하며 악명을 떨치게 된다.

‘이 정떨어지는 인간’이 기획팀장 부사장의 별명인 건 아직 본인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지금 왜 이런 원론적인 얘기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광고 회사는 팀워크가 제일 중요합니다. 그걸 이번 미션에서 평가하겠다는 거구요. 우리 멘토들이 객관적으로 잘 평가할 거니까 걱정은 접으시고, 또 질문이 뭐였지? 아, 팀장은 팀에서 알아서 뽑으세요. 멘토는 팀장 아닙니다.”

기획팀장이 김민수를 노려보며 또박또박 대답해 주었다.

“멘토는 여러분을 평가하고 여러분이 삽질하는 걸 방지할 목적으로 넣은 겁니다. 인턴들의 기획안은 산으로 갈 게 뻔하거든요. 우리는 시간이 없고 이건 실전이니까 시간을 아끼기 위해 넣은 겁니다.”

진짜 인턴 기획안으로 진행할 예정인가 보다.

도혁은 저도 모르게 김민수를 돌아보았다.

‘저 자식 여러모로 거슬리는데?’

촉이 팍 오는데 김민수 저놈, 컨트롤하기 쉽지 않을 것 같다.

하아, 새어 나오는 한숨을 감추지 못해 크게 숨을 내뱉었다.

물론 도혁뿐 아니라 대부분의 인턴들이 한숨짓고 있었다.

“그럼 건투를 빕니다. 남은 시간 504시간! 당장 움직입니다! 시작!”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