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고 천재 명도혁-10화 (10/252)

광고 천재 명도혁 10화

“네? 회사에요?”

“대표님을 뵙겠다고 했다는데?”

마주 본 우리는 로비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뛰어 내려간 보람도 없이 대표 비서실에서 즉시 호출이 왔다.

-두 분 지금 바로 대표실로 오시죠.

* * *

태강애드 대표 김철준.

대한민국 광고계 1세대를 대표하는 광고인이다. 뼛속까지 AE의 마인드로 무장한 영업맨이었다.

한번 문 먹이는 절대 놓지 않는다는 질긴 근성을 가진 남자이기도 했다.

그는 타사와의 경쟁 PT에서 엄청난 승률을 자랑하며 태강애드를 국내 제1 광고대행사로 이끌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수석 카피라이터일 때도 만나기 싫었던 인물이었다.

대놓고 까는 스타일은 아닌데 뭔가 말 섞기 싫은 상사라고나 할까.

‘탁기준만 부르지, 뭘 또 인턴까지 불러재끼시나.’

도혁은 속마음이 어떻건 대표의 호출에 따를 수밖에 없었기에 할 수 없이 대표실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기획1팀 탁기준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알고 있어. 인턴 명도혁 씨. 일레라 가구 김영석 대표님께서 칭찬이 자자하시던데. 일단 둘 다 앉지.”

“안녕하십니까. 명도혁입니다.”

김철준이 부리부리한 눈을 부라리며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눈. 도혁은 저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이 불편했다.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부담스러운 눈길이 도혁을 아래위로 다시 훑었다.

‘이때부터 한결같았구나, 속을 알 수 없는 늙은이, 아니, 젊은이. 와, 근데 김철준도 완전 청춘이네.’

젊은 김철준을 보며 속으로 감탄하는데 김영석 대표가 인사를 건넸다.

“이 근방에 미팅이 있었는데 지나는 길에 문득 태강애드 생각이 나서 들렀습니다. 선약도 없이 방문해서 결례는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말씀을요. 잘 오셨습니다.”

광고주가 오면 버선발로 나가서 맞는 거라고 배웠다. 다른 사람이 아닌 김철준에게서.

제집으로 굴러 들어온 광고주를 선약을 안 했다는 이유로 마다할 인간이 아니었다.

“사실 태강애드가 궁금해서 들렀습니다. 어떻게 운영하시기에 이렇게 인턴까지 유능한가 해서요.”

“과찬이십니다.”

일레라 가구와의 컨택을 상세히 알 리 없는 김철준이었지만 융통성 있게 얼버무렸다.

능구렁이 담 넘어가듯 대화를 이어가던 그때, 김영석에게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제가 처음에는 라디오만 생각했는데, 성질에 안 맞아서요. 대대적인 캠페인을 해볼까 하는데요.”

“본격적으로 대소비자 광고를 하실 계획이군요.”

“네. 솔직히 서서히 시장을 넓히려고 마음을 먹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현재는 사무 가구 위주지만, 학생 가구 시장을 노리고 있거든요.”

역시 김영석은 감이 좋았다.

책장, 책상, 의자 등 사무 가구와 큰 차이가 없는 구성. 거기에 침대 정도만 더하면 학생용 패키지가 된다. 결국 일레라 가구는 이 전략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벌써?

전생보다 몇 년은 빠른 진행이었다.

도혁은 김영석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어 그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미간을 좁히고 있었고, 눈에서 이채가 돌았다. 입가에 번지는 은근한 미소.

이거 진짜 김영석이 결재할 때 표정인데?

김영석이 의아해하는 도혁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원래는 길게 바라보고 중장기 사업으로 진행하려고 했는데, 우리 명도혁 씨 덕분에 좀 시야가 넓어졌다고나 할까요. 내친김에 질러볼까 합니다.”

“아, 우리 인턴이 큰일 했네요.”

역시 김영석이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십 대 초반의 대학생 인턴, 그것도 초면인 도혁의 말에 귀를 기울인 것 자체가 열린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혁신과 합리의 CEO’라는 별명다운 행보였다.

아무튼 이거 점점 판이 커지는 느낌인데?

“혹시 전체 예산은 얼마나 생각하고 계십니까? 매체 집행 비용 포함해서요.”

“첫 광고니만큼 10억 대로 시작하면 어떨지요.”

10억. 당시로는, 그리고 첫 광고로는 큰 집행 금액이었다.

일레라 가구로서는 창사 이래 최고의 홍보 예산일 것이다.

김철준이 턱을 어루만지며 마지막 사항을 확인했다. 제일 중요한 부분이었다.

이 의뢰가 독점이냐, 아니냐.

“혹시, 타사를 끼워서 경쟁 PT로 진행하실 계획이십니까?”

“저는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경쟁 붙이고 이런 거 안 합니다.”

“시원시원하시네요. 저희도 믿음에 부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믿고 맡길 테니 기획안 프레젠테이션 잘 부탁드립니다. 은퇴한 한진성 성우까지 다시 불러오는 귀신같은 분들 아닙니까?”

“그럼요,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역시 김영석은 보통 인간이 아니다.

아직 한진성의 섭외가 끝난 것도 아닌데 대표 앞에서 못을 박아버렸다.

“그럼 자네들은 나가봐. 얼른 피티 준비해야지. 피 튀기게.”

“네. 알겠습니다.”

하아, 터져 나오는 한숨을 삼키며 둘은 대표실에서 나왔다.

아직도 껄껄대며 즐거워하는 김철준과 김영석을 뒤로하고.

탁기준은 복도로 나오자마자 머리를 쥐어뜯었다.

“진짜 죽겠네. 들었지? 한진성 성우님 완전 섭외 확정인 것처럼 말하는 거.”

“그거 엎어지면 10억짜리 캠페인 말아먹고 그길로 폐인 되는 겁니까?”

“야, 명도혁! 재수 없는 소리 할래?”

그렇게 10만 원짜리 상품권 광고는 10억짜리 캠페인으로 판이 커지고 도혁은 씁쓰름한 주말을 맞게 되었다.

입사 후 첫 번째 휴일이었다.

* * *

‘인턴이고 사장이고 휴일 없이 일하는 거, 이거 언제쯤 좋아지냐.’

도혁은 투덜대며 7시 정각에 울리는 알람을 눌러 껐다.

“내일 8시에 회사 앞으로 나와라. 필드 나가야지. 내 도혁이 네 덕 보면 크게 한턱 살게.”

금요일 퇴근길에 따라붙어 쐐기를 박았던 탁기준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하긴 이렇게 과거로 회귀한 마당에 복지까지 챙길 수는 없을 것이다.

무려 토요 근무를 하는 회사도 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십수 년 뒤라고 해도 기업 문화가 딱히 더 나아진 것도 없었으므로 미련을 버렸다.

명도혁은 잘리는 전날까지 야근을 했었다.

주섬주섬 짐을 챙겨서 나가려는데 커피를 타서 주방을 나서는 명현진과 마주쳤다.

“인턴! 오늘도 회사 가냐? 근데 복장이 그게 뭐야. 빠져 가지고.”

“안 빠졌으니까 주말에도 회사 가잖아. 누나도 신입이면서 말하는 건 사장 같아, 이 꼰대야.”

“CBC 방송국 사장 되면 소원이 없겠네.”

명현진이 막 CBC 방송국에 PD로 입사해 근무할 때였다.

입사 때부터 꼰대였구만.

누나의 까랑까랑한 목소리를 뒤로하고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야, 명도혁! 너 싸하게 쳐다보지 마라. 우리 후배였으면 죽었어!”

그럼 죽었겠지.

명현진 밑에서 일했던 도혁의 친구 한 놈은 일 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퇴사했다.

들리는 말로는 그녀가 PD로 있던 프로그램에서 조연출을 하면서 노이로제에 걸렸다나.

‘그러고도 남지. 저놈의 성질이 아우.’

명현진이 결혼할 때 매형에게 감사주를 열 번이나 샀던 아버지와 도혁이었다.

저 화상을 집에서 치워줘서 어찌나 고맙고 미안하고, 안타깝던지.

그게 생각나 혼자 미소 지었다.

회사 앞에 도착했을 때는 더 크게 웃고 말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골프 웨어로 무장한 탁기준의 꼴이 너무 볼썽사나웠기 때문이다.

“이 복장은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

“좀 그런가? 난 골프 못 치니까 성의라도 보여야지.”

“남들이 보면 강사인 줄 알겠습니다. 쳐본 적은 있으시구요?”

“전혀. 사실 배워야 하는데 짬이 안 나서. 그렇게 이상하냐?”

배워두는 게 좋기는 할 거다. 탁기준은 지금 대리지만 미래의 기획국장님이 되실 몸이었다.

‘어떻게 다시 태어나도 이렇게 악연에 얽히냐’까지 속으로 중얼거리다 잠깐 생각을 멈추었다.

‘악연은, 아닌가?’

악착같이 카피라이터와 디자이너들을 쥐어짤 때는 둘도 없는 악마처럼 보였는데, 막상 가까이서 지켜본 탁기준은 악질까진 아니었다.

기획에 돌아서, 광고에 미쳐서 제작국을 압박했을 뿐. 그는 감각 있고 성실한 AE였다.

솔직히 이번 생에는 탁기준을 믿고 AE를 해볼까, 생각할 정도로.

전생과 현생의 인연을 생각하며 복잡한 마음을 정돈하는 사이 차는 경기도의 한 골프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어이! 명 프로 이쪽입니다!”

기대에 찬 한진성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도혁은 주말 내내 한진성에게 붙들려 필드와 연습장을 돌았다.

그리고 드디어, 마침내, 결국 그에게 확답을 받아내었다.

“한 건 정도 녹음을 더 한다고 목소리가 닳는 것도 아니니까요. 일레라 가구까지만 진행하죠. 김철준 대표님 얼굴도 있고.”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희가 마지막 작품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진행하겠습니다. 참. 사족 하나 보태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시죠. 다른 옵션이 있나요?”

“광고 얘기는 아니고, 골프를 전문으로 하게 되셔도 사업은 하지 마세요.”

“네? 저는 사업 같은 건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요.”

“제가 관상을 조금 보는데 아마 유혹이 있을 겁니다. 사업만큼은 안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오호, 젊은 친구가 재주가 많네요. 내 기억하도록 하죠.”

관상을 본다는 하얀 거짓말까지 하며 사업을 말려봤다.

은퇴한 마당에 섭외에 응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대가라고나 할까.

이 정도 대가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생각한 건 도혁뿐이었나 보다.

“저도 사족 하나 달죠. 당분간 필드 좀 같이 나가주시죠. 간곡하게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인턴 명도혁의 주말은 까맣게 소멸되었다.

* * *

한진성 성우 섭외 후 짧은 휴식이 주어졌다.

대학생 인턴십 전체에게 주어진 꿀 같은 평일 휴가.

고작 하루뿐이었지만 도혁은 쉴 여유가 없었다.

학교의 일을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미리 알아본 바로 광고홍보학과로의 전과는 어렵지 않은 편이었다.

입대 전 도혁의 성적은 우수한 편이었고 면접 역시 자신 있었으니까.

과 사무실에 전과를 위한 서류를 접수하자 면접 일정을 잡아준단다.

빠르게 볼일을 마친 도혁의 발길이 학생회관 쪽으로 향했다.

“와, 여기는 그대로네.”

조금 외진 곳에 떨어진 벽돌색 건물.

북적이는 학생들과, 학생회와 동아리의 홍보 문구가 적힌 플랜카드, 덩그러니 서 있는 시계탑까지.

그곳은 동아리들이 모여 있는 학생회관이었다.

-애드포인트

익숙한 안내판을 보자 감회가 새로웠다.

이 층에 위치한 광고 동아리 애드포인트.

도혁이 광고를 처음 접하고 카피라이터로서의 꿈을 키운 곳이다.

그리고 ‘그’를 만난 곳이기도 하지.

도혁은 손끝으로 애드포인트의 간판을 한번 쓸어보고 감성에 젖어 있었다.

“뭐 하냐? 어! 도혁이네.”

“어! 선배!!!”

“인마, 제대를 했으면 선배한테 빨리빨리 신고를 해야지. 애드포인트 기강 다 죽었구만. 들어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게 얼마 만이냐. 차현우 선배.

도혁은 감격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눈앞에는 지금, 미래의 대한민국 광고계를 대표할 광고 천재 차현우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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