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5화
참교육의 첫 번째 대상 미친개 탁기준 AE.
도혁이 속으로 비웃는 줄도 모르고 탁기준이 시비를 걸어왔다.
“하늘 같은 선배를 똑바로 보는 놈도 있고, 웃기지도 않네 여기. 난 기획 1팀 탁기준 대리. 대학생 인턴을 관리할 예정이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귀찮아 죽겠네, 진짜. 인사팀에서 하도 부탁해서 인턴 나부랭이들을 억지로 맡게 됐다. 지금 냉장고 광고 때문에 너무 바쁜데 겨우 시간 낸 거야.”
“와!! 지엘 냉장고요?”
“매출 터져서 경쟁사 잡아먹은 건 뭐 비밀도 아니고.”
멘토랍시고 회의실에 들어와서는 자기 자랑 시작이었다.
어디까지 하는지 보자, 구경이나 할 요량으로 도혁은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냉장고 말고도 가전 많이 했고,아파트부터 과자까지 가리지 않고 경쟁 피티는 다 따왔다. 진행했던 캠페인들은 거의 성공했고.”
짜증은 나지만 사실이었다. AE로서 탁기준의 능력은 솔직히 대단했다.
전설의 PT 승률을 자랑하고 있었지. 7할을 훌쩍 넘긴다고 했던가.
‘그게 다 제작팀 고혈을 빨아서 만든 거잖아. 미친놈이.’
확정 시안도 아니고 경쟁 피티 들어가는 카피를 수십 번 반려당하곤 했었다.
심지어 사무실에 쳐들어와서 제작팀이 야근을 하는지 감시까지 했던 탁기준.
도혁은 그때의 고통이 새록새록 떠올라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너무 세게 쥐어서 푸른 핏줄까지 도드라졌다.
그의 주먹 사정을 알 리가 없는 탁기준이 말을 이어갔다.
“이번 인턴 오십 명이지? 어차피 다 데려갈 수 없는 애들이니 한번 거르자.”
“네?”
“내가 너희 이름을 다 알 필요 없다고. 어차피 반은 갈려 나갈 거거든. 아니, 내가 갈아버릴 거야. 저기, 요 앞에 인턴!”
“네! 선배님.”
“대학생 인턴십이라고 해서 아이디어 내고 막 광고 동아리처럼 노는 거 생각했지?”
“아닙니다!”
“에이, 왜 이러세요 인턴님. 조 짜서 과제 하는 정도로 생각했잖아요. 아니냐?”
인턴을 보고 몸까지 배배 꼬며 비꼬는 탁기준을 보자 짜증이 밀려왔다.
남자의 얼굴이 귀밑까지 빨개졌다.
탁기준이 당황한 그를 보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처음부터 나 같은 대기획자가 될 수 있느냐. 아니거든. 바닥부터 시작하는 거야. 바닥부터. 그래서 말인데 오늘부터 당장 실전에 들어간다.”
“실전이라면…….”
모두 어리둥절하면서도 기대에 찬 눈으로 탁기준을 바라보았다.
오늘 아침, 인턴을 시작한 시점이었다.
즉시 실무에 투입된다는 말에 인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자, 떠들지 말고 지금 바로 나간다. 광고는, 일단은, 영업이야. 알아?”
“넵!”
“그래서 말인데 다들 뛰어나가서 라디오 프로그램 상품권 광고 따 와라.”
“네??”
인턴들의 의기에 찬 ‘넵!’이 ‘네?’로 변하기까지는 일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당장 광고를 따 오라고? 그것도 라디오 상품권 광고를?
모두가 의아해 하는 가운데 도혁은 혼자 미소 지었다.?
그래 그랬었지. 이미 도혁은 태강애드 대대로 내려오는 이 잔인한 첫 번째 미션을 알고 있었다.
그거 탁기준이가 만든 전통이었구만. 독한 놈.
턱을 어루만지며 탁기준을 노려보았다. 그는 당황한 인턴들을 둘러보며 고소해하고 있었다.
인턴들이 당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광고 영업은 보통 일이 아니다.
얼굴에 철판 딱 깔고 싫은 소리 참아가면서 따 와야 한다는 건데,대학생들이 당장 해내기엔 무리인 미션이었다.
‘조만간 서너 명 그만두겠구만. 생각했던 광고인의 길이 아니네, 영업이 너무 힘드네 어쩌네 하면서. 에휴.’
라디오 상품권 광고.
디제이가 퀴즈나 추첨을 통해 상품권을 청취자에게 전달하면서 광고 멘트를 읽어주는 단순한 형태의 광고였다.
라디오 방송 중에 주는 그 상품권을 광고주로부터 따 오는 일을 미션으로 던진 것이다.
광고 영업 중에서는 제일 간단하지만, 은근히 따 오기 어려운 광고였다.
‘쪽팔림을 무릅쓰는 게 포인트라고 생각들 하겠지만, 사실은 아니지.’
광고 바닥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명도혁이었다.
광고 영업은 실체가 없는 무형의 상태를 돈을 받고 파는 것이다.
내가 홍보를 해줄 테니 너는 돈을 내세요, 초짜 광고쟁이가 이런 접근을 한다면, 따 올 수 있는 광고는 단 하나도 없다.
십 원짜리 한 장도 허투루 쓰는 법이 없는 인간들이 바로 광고주였다.
탁기준이 멍청하게 앉아 있는 인턴들에게 소리쳤다.
“뭐 해, 이 자식들 아직 안 나갔냐? 거기 앞에 있는 계약서 서식 챙겨 들고 후딱 뛰어나가. 딱 하루 준다. 하루 안에 상품권 광고 계약, 한 건씩 받아 오도록 이상!”
인턴들 사이에서 명도혁이 제일 먼저 일어났다.
일부러 탁기준의 근처로 가 입꼬리를 한 번 비틀어 웃어주었다.
‘탁기준 이 또라이야. 딱 기다려라.’
속을 알 리 없는 탁기준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도혁을 훑어보곤 이름을 물었다.
“거기 인턴은 이름이 뭐지?”
“명도혁입니다. 선배님.”
“선배는 무슨. 정직원 전환이 돼야 진짜 선배지, 인마. 빨리 출발해!”
팩트로 후려치는 탁기준을 보고 한 번 더 피식 웃어주었다.
그러곤 망설이지 않고 직진했다.
상품권 광고 소리를 듣는 순간 떠오르는 광고주가 있었다. 지금 라디오 광고 들어가면 딱 좋을 회사.
도혁은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 * *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약속을 잡고 오셔야죠.”
“대표님 기다리겠습니다.”
“정 그러시면 밖에서 기다리시든가. 한 시간이 걸릴지, 두 시간이 걸릴지 나도 모르겠지만.”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디오 상품권 광고를 따기 위해 도혁이 간 곳은 서울 외곽의 한 가구업체였다.
막 전국에 매장을 늘려가고 있던 오피스 가구 전문업체 일레라 가구.
이 가구점은 훗날 공격적인 마케팅과 시의적절한 캠페인을 펼쳐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게 된다.
도혁이 회귀할 당시엔 대한민국 최고의 가구 브랜드로 자리를 굳힌 상태였다.
물론 지금은 전도유망한 중소 가구점에 불과했지만.
도혁은 회의 중이라는 김영석 대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시간 반이 걸려도 기다릴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이 젊고 혁신적인 사장은 굉장히 공격적인 마케팅을 즐기는 사람이다. 특이한 취향을 가진 기인이기도 했었고.
도혁의 오랜 광고주 중 한 명이었다.
한 시간 반을 기다린 끝에 김영석이 사옥의 밖으로 나왔다.
그 순간 건물 외벽에 기대어 서 있던 도혁이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의자는 가구가 아닌데.”
“당신 뭐야?”
김영석을 보좌하던 비서 한 명이 도혁을 막아섰다.
하지만 그의 말에 미간을 좁힌 김영석이 손을 들어 비서를 막았다.
“무슨, 말인가요? 제가 잘못 들었나요?”
“의자는 가구가 아닌데 가구점에서 판다고 했습니다.”
“혹시 저를 아십니까? 누구시죠?”
“안녕하십니까. 저는 태강애드에서 나온 명도혁이라고 합니다. 김영석 대표님 반갑습니다.”
김영석이 눈을 가늘게 뜨고 명도혁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관리인이 어쩔 줄 모르며 건물 안에서 뛰어나왔다.
“태강애드에서 나왔다고 하면서 막무가내로 찾아왔습니다. 진작 보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아니, 아직도 여기 있으면 어떡합니까!!!”
관리인은 김영석과 나를 번갈아 보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괜찮습니다. 태강애드라고 하셨습니까? 광고회사요?”
“네. 그렇습니다. 인턴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인턴이라구요? 저희는 B to C 광고(기업과 소비자의 관계를 말함. 기업이 아닌 소비자에게 직접 어필하는 광고)는 하지 않는데요.”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안 드릴 사안이 있어 실례를 무릅쓰고 방문했습니다. 딱 십 분만 시간을 주시죠.”
김영석은 잠깐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미팅까지 조금 시간 여유가 있습니다. 이왕 오셨으니 안으로 들어오시죠.”
“네. 감사합니다. 브리핑, 최대한 짧게 하겠습니다.”
됐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김영석을 따라 실내로 들어갔다.
김영석은 말을 섞기 상당히 까다로운 구석이 있지만 한번 마음을 트면 화통한 성격이었다. 말도 잘 통하는 편이었고.
그의 안내에 따라 회의실로 이동했다.
수십 년 뒤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회사답게 실내는 깔끔하게 잘 정돈되어 있었고 사내 분위기도 좋아 보였다.
주변을 휘이 둘러보며 자리에 앉았다.
“커피 드시겠습니까?”
“네. 각설탕만 두 개 넣어서 주시죠.”
“…….”
김영석은 자신의 커피 취향과 정확하게 똑같이 주문하는 도혁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신기하겠지. 하지만 하나라도 더 접점을 만들어 어필해야 하는 자리였기에 알고 있는 걸 모른 척할 필요는 없었다.
“재밌는 분이군요. 자, 그럼 용건을 들어볼까요?”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광고 한번 하시죠.”
“아까 그 의자는 가구가 아니다, 방금 하신 말처럼요?”
“네. 귀 끝이 곤두서는 느낌 아니셨습니까? 발이 멈추는 것이 느껴졌는데.”
“맞습니다. 그 문구 때문에 얘기나 한번 들어보자 생각하고 모신 겁니다.”
역시 촉이 좋은 김영석 대표였다.
그러니 십 년이 채 안 돼서 그 같은 눈부신 성장을 일궈냈겠지만.
고개를 주억이는 도혁에게 김영석이 물었다.
“의자가 가구가 아니면 뭡니까.”
“건강이죠.”
“네?”
도혁이 의아하게 되묻는 그에게 설명을 이어갔다.
“의자는 사무실에서 가장 중요한 가구입니다. 종일 앉아서 근무하는 직장인에게는 건강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계속 말씀해 보시죠.”
“척추가 바로 서야 정신이 번쩍 나서 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의자를 아무거나 고를 수는 없는 거니까요.”
“흠….”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김영석이 다시 물었다.
“카피가 상당히 흥미롭기는 한데, 저희는 대소비자 광고는 하지 않습니다. 사무 가구를 대량 구매하는 사장들이 아주 솔깃해할 내용은 아닌 것 같은데요.”
“만약에 회사의 직원들이 적극적으로 원한다면요?”
“적극적으로, 원한다구요?”
김영석의 눈동자에서 빛이 일었다.
도혁은 멈추지 않고 설명을 이어갔다.
“그렇습니다. 대소비자 광고를 통해서 척추를 반듯하게 세우는 의자가 있다, 자세를 바로잡아 준다. 이런 카피를 뿌리는 거죠. 그럼 우리 회사는 의자가 왜 이 모양이냐, 불평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직장인들 사이의 여론을 조성하는 겁니다.”
“여론이라고 하셨습니까?”
“직장인들 척추 건강이 위험하다고 보도 자료를 몇 개 뿌리기도 하구요.”
소파에 기대어 앉았던 김영석이 몸을 일으켰다. 김영석은 이미 생경한 이채를 뿜고 있었으며 곧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저거 김영석이 결재할 때 짓는 표정인데. 게임 끝이네.’
잠시 후 김영석은 라디오 상품권 광고 다섯 개에 사인을 했다.
도혁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조금 더 욕심을 내어보았다.
일레라 가구가 본격적인 대소비자 광고를 한 것은 몇 년 뒤의 일이다. 도혁이 신입사원 때였으니까.
하지만 뭐, 몇 년 일찍 캠페인 한다고 손해 볼 건 없을 것이다. 시장은 선점할수록 유리하거든.
도혁이 김영석을 바라보며 지나가듯 툭 말을 던졌다.
“라디오 CM도 같이 해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라디오 광고요?”
“퇴근 시간이 효과가 좋습니다. 상품권 광고로 브랜드 인지도부터 올리고 CM 송으로 선호도도 올려보면 어떨까요.”
“일단 상품권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퇴근하면서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을 때 들으면 효과가 좋지 않겠습니까?”
도혁이 말을 한번 끊고 김영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일까지 기획안 준비해 오겠습니다. 기획안 받으셔서 손해 볼 건 없으시잖아요.”
“내일까지 가능하겠습니까?”
“그럼요. 태강애드에 기획 천재라 불리는 선배 직원이 있거든요.”
도혁이 실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탁기준 이 자식아. 너도 내 덕에 야근 좀 해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