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천재 명도혁 2화
-손이 가요 손이 가, 문어깡에 손이 가요. 아이 손 어른 손 자꾸만 손이 가.
노래가 나오는 배불뚝이 브라운관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도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소재(광고에서 사용하는 CF 등의 제조물) 안 쓴 지 십 년이 넘었는데. 와, 화질 무슨 일이야. 베타 테입(광고 소재의 한 종류)인가?’
어리둥절한 그의 귀에 다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 병장님. 드디어 내일 제대이지 말입니다.”
‘뭐? 이게 무슨 말이야? 병장?’ 도혁은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칙칙한 국방색 군복과 모포, 쿰쿰한 내무반 냄새.
관물함 위에 놓인 군장을 보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TV는 혼자 돌아가고 있었고 무엇보다 이게 누구야, 후임 이진우가 도혁을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이놈의 꿈, 가지가지 하는구나. 광고로 모자라 군대까지. X발.
저절로 욕이 흘러나왔다. 물론 육성으로.
그런데 이진우 이 자식, 도혁의 목소리를 들은 듯 눈이 커다래졌다.
“명 병장님. 왜 그러십니까? 내일 제대인데 욕하시는 겁니까?”
“…….”
“땀까지 흘리시고, 어디 아프신 겁니까?”
도혁은 한숨을 내쉬고 이진우를 바라보았다.
이 자식 아직 구천을 떠돌고 있구만.
“야! 이진우. 너 내 꿈에 그만 나올 때도 됐잖아. 한이 서린 건 알겠는데…….”
“예? 꿈이라니요. 병장님 정말 왜 이러십니까!”
이진우가 도혁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였다.
휘휘 젓는 손길에 코끝에서 바람이 느껴졌다.
어?
놀란 도혁이 이진우에게 한 대 쳐보라고 지시했다.
“이진우. 나 한 대 때려봐라.”
“예? 저, 저한테 왜 이러십니까…….”
“괜찮으니까 쳐보라고. 빠릿빠릿하게 안 하지?”
“아, 알겠습니다.”
이진우는 입술을 앙다물더니 주먹으로 도혁의 배를 스치듯 한 대 때렸다.
헐, 저 솜털 같은 주먹이 느껴지잖아? 진짜 뭐냐 이거.
도혁은 제 손으로 뺨을 한 대 후려치며 TV를 바라보았다.
화면에서는 문어깡 광고가 끝나고 드라마가 시작되고 있었다.
“저, 저거 설마 베를린의 연인이냐? 자기야 가자?”
“그렇습니다. 여주인공이 정말 예쁘지 말입니다.”
미친. 이건 초유의 시청률을 자랑했던 베를린의 연인이었다.
지금은 드라마판에서 사라진 중견배우의 모습은 젊고도 촌스러웠다.
저 드라마 이십 년 가까이 된 히트작일 텐데? 회귀라도 한 거냐? 설마 소설에서나 보던 그 회귀?
도혁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아 주변을 다시 둘러보았다. 하나둘 내무반을 함께 쓰던 동료들이 들어왔다.
분리수거도 안 되는 폐기물 쓰레기 박성철의 얼굴을 보자 번쩍 정신이 들었다.
저 쓰레기 같은 박성철은 십 년 후 주식 대박을 터뜨려 졸부 대부업자가 된다.
광고주로 나타난 박성철을 보고 세상에 신은 없다며 실소했던 기억이 났다.
그때는 꼴도 보기 싫고 피하고 싶은 마음에 의도적으로 그 프로젝트를 넘겨 버렸다.
돌이켜 보면 그 대부업 광고를 놓쳤을 때부터 커리어가 조금씩 꼬였다.
아무튼 박성철 저 인간과는 두고두고 악연이었다.
‘잠시만. 이게 진짜 회귀라면?’
정말 지금이 꿈이 아닌 현실이라면.
도혁은 인생에서 가장 후회했던 순간으로 온 거다. 평생 바로잡고 싶었던, 오랫동안 꿈에서까지 괴로웠던 그때로 돌아온 것이다.
이진우는 도혁이 제대한 후 이틀 뒤에 자살했다.
그는 유약하고 비실거리는 데다 빠릿빠릿하지 못해서 갈굼을 많이 당했다.
어느 내무반에나 있을 법한 고문관 스타일이라고나 할까.
과는 달랐지만 같은 대학 후배였고 착해 빠진 놈이라 도혁이 좀 챙겨주긴 했었다.
도혁이 정의롭고 그런 성격은 아닌데 어쨌든 내무반 최고참이니까 기강을 잡은 거였다. 대놓고 행해지는 폭행과 따돌림이 유치하기도 했었고.
박성철 같은 쓰레기가 선을 넘을 때는 여러 번 막아주었다. 군대에서 마음 붙일 곳이라고는 없던 이진우는 도혁을 강아지처럼 따라다녔다.
그런 그가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제대하자마자 죽어버리냐. 이 자식아.
도혁은 정신을 차리고 이진우를 바라보았다.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왔지만 회한에 젖을 틈이 없었다.
들어오는 인간마다 이진우를 습관처럼 한 대씩 치고 들어온 것이다.
이진우가 막 병장을 달았을 때였지만, 후임까지 대놓고 그를 무시했다.
워낙 일상 같은 일이라 그때는 넘겨 버린 장면들.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특히 박성철은 다른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며 이진우의 뺨을 툭툭 때리고 있었다.
병신처럼 쪼개며 서 있는 이진우를 보자 주먹을 불끈 쥐어졌다.
“야! 이진우! 왜 멍청하게 맞고 서 있어.”
“명 병장님! 그, 그게.”
“X발. 명 선비님 잔소리를 나가는 그날까지 처듣고 있어야 되는구만.”
침을 퉤 뱉고 중얼거리는 박성철을 일단 무시하고 이진우를 데리고 나왔다.
벤치에 앉아 음료수를 뽑아 이진우에게 건넸다.
고맙다며 웃는 하얀 얼굴에 가슴이 아렸다.
제대 후 이진우가 죽었다는 소식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따지고 보면 도혁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굉장히 괴로웠다.
그때 도혁은 이십 대 초반밖에 되지 않았고, 그 일이 모두 제 탓인 것만 같았다.
제대 전날 망설였거든.
소대장님께 이진우 부탁을 할까 말까, 박성철 저 새끼를 꼰질러 버릴까.
그러다가 말아버렸다. 그게 무슨 오지랖이냐며 제대의 기쁨에 들떠서 눈감아 버렸다.
그리고 지금, 명도혁은 다시 그때로 돌아왔다. 과거의 선택을 바로잡을 수 있는 순간으로.
도혁이 노력한다고 해서 이진우가 살아 돌아올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뭐라도 해보고 싶었다.
그런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진우가 고개를 숙였다.
“병장님 제대하시면 저는 어떡합니까. 정말 걱정입니다.”
“이진우. 내 말 똑바로 들어.”
“네. 듣고 있지 말입니다.”
“너 제대까지 몇 달 안 남았어. 마음 단단히 먹어. 알아들어 내 말?”
“……네.”
“밤에 초소 쪽으로 가지 마.”
“초소요? 혼자 갈 일이 없지 말입니다.”
“생기게 될 거다. 누가 당직 바꿔달라 그딴 소리 하면 바로 소대장님 찾아가라. 알겠나?”
“네! 명심하겠습니다.”
“소대장님이 알아서 하실 거다.”
이틀 뒤 이진우는 초소에서 박성철에게 무차별적인 학대와 폭행을 당한 후 자살한다.
부대에서는 덮기 급급했고 박성철은 전출 정도로 정리됐었다. 그 시절이 그랬다.
한숨을 내쉬는 그에게 이진우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명 병장님.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내가 해준 게 뭐가 있다고.”
“아닙니다. 평생 못 잊을 겁니다.”
“그래.”
울컥한 마음에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그 평생이 인마, 이틀밖에 안 남았다고.
“제대하면 선배님 찾아뵙겠습니다.”
“약속 꼭 지켜라.”
“네! 명 병장님. 건강하십시오!”
이진우가 씩씩하게 말하며 음료수 캔을 밟다가 쓰러졌다.
그걸 보자 웃음이 터져 버렸다.
“야 이 자식아. 그거 네 다리보다 쎄다고 몇 번을 말하냐. 철갑이야, 인마. 잘못 밟으면 발목 아작 나.”
“아, 맞다. 아, 아야.”
“정신 똑바로 차려. 세상은 그거보다 훨씬 아프니까.”
이진우의 어깨를 한번 두드려 주고 일어났다.
소대장실로 향하는 도혁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소대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박성철 병장에 대한 겁니다.”
도혁은 그동안 내무반에서 일어났던 폭행과 따돌림, 그리고 박성철의 악행을 조목조목 보고했다.
“그런 걸 이제 말하면 어떡해!”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제 선에서 해결해 보려고 했습니다. 제대를 앞두고 노파심에서 보고드리는 겁니다.”
“안 그래도 박성철에 대한 제보가 몇 건 있었어. 이진우 건, 신경 써서 지켜보도록 하지.”
국방부에서 군기를 빌미로 폭행이 일어나는 것을 막으려는 시도가 막 시작되던 시기였다. 부대 내에서 불미스러운 폭행 사건이 일어나는 것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아주 훌륭한 사람은 아니지만 말은 통하는 소대장이니 믿어보는 수밖에.
다음 날 새벽, 도혁은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소대장에게 책임감을 떠안기고 왔지만 여전히 석연치 않았다.
‘일단 이진우, 저 자식이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하는데.’
이번에 넘어간다 하더라도 제2의 박성철이 다시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어떻게 하면 이진우, 그리고 앞으로 들어올 스무 살 남짓한 후임들의 멘탈을 다잡을 수 있을까.
‘!!’
순간 도혁의 머릿속에서 한 줄의 문구가 떠올랐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카피의 힘을 알고 있다. 그리고 명도혁은 카피라이터다.
도혁은 펜을 들었다.
또박또박 그가 하얀 종이 위에 글자를 써 내려갔다.
[당신의 하루는 아직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일생을 24시간에 비유한다면 스무 살은 몇 시일까요.
새벽 5시에 불과합니다.
꿈속의 고통으로 자신을 괴롭히지 마세요.
곧 태양이 떠오를 테니까.
아직, 새벽입니다.]
도혁은 내무반 문 앞에 종이를 붙이고 밖으로 나왔다.
‘죽지 마라. 진우야, 기다릴게.’
* * *
도혁은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오르고서야 이 모든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회귀했구나. 명도혁 진짜 스물셋 청춘으로 돌아왔구나.
그리고, 제대했구나!
벅찬 감격이 몰려들었다. 진짜 새로 시작하는 건가? 새 기회가 펼쳐지는 거야?
한걸음에 집으로 내달렸다. 집 앞에 도착해서 문득 아파트 단지를 올려다보았다.
대치동 금매 아파트.
그때도 이미 재건축 얘기가 나왔던 강남 한가운데의 아파트였다. 위치 좋고 학군 좋은 더블 역세권.
재건축의 상징과 같았던 그곳은 도혁이 회귀하기 직전까지도 조합 설립조차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부모님은 곧 재건축이 될 거라 기대하며 낡은 집에서 끝까지 버티셨다. 나중엔 약간 오기로 이사를 거부했던 것도 같았다.
재건축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고 했던가.
물론 천정부지로 가격이 오르기에 팔면 안 됐지만, 서둘러 전세를 주고 나왔어야 했다.
에휴, 아버지, 금매 아파트 빨리 탈출합시다.
도혁이 실소하며 툭, 낡아빠진 안내판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속내가 훤히 내보였기 때문이었다.
“일부러 수리도 안 하고 있는 거 봐라. 아파트 낡아서 무너지기 직전이라고 광고하는 건가?”
“뭘 그렇게 중얼거리냐? 야! 명도혁!”
“어!”
“이 자식이 집에 왔으면 빨리 들어가지 여기서 뭐 하고 있냐?”
험한 말을 뱉으며 도혁에게 장난을 거는 여자를 보자 웃음이 터져 버리고 말았다.
도혁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그녀는 도혁의 누나 명현진이었다.
와, 우리 누나 완전 젊네.
CBC 방송 예능 국장 누나 명현진.
두 살 많은 그의 하나뿐인 누나로, 세상 걸걸하고 더러운 성깔을 가진 여장부다.
“누, 나?”
누나라고 부르면서도 어색해 끊어서 불렀다.
명현진 국장을 누나라고 부른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얼굴이. 잠깐만, 얼굴이 말도 안 되게 어려 보였다.
얼른 봐도 이십 대 중반에서 후반 정도.
사십을 훌쩍 넘긴 명현진의 주름진 얼굴을 떠올리자 젊은 누나가 너무 반가워 덥석 안아버렸다.
“와, 씨. 명현진 완전 반갑네. 누나!”
“너 왜 이래. 안 떨어져? 명도혁 너 제대하더니 돌았냐?
누나를 끌어안자 정강이가 냅다 차였다.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안고 있었다.
진짜 회귀했구나! 명도혁 진짜 스물세 살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