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사제-181화 (181/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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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밀은 어머니 쪽의 성인가요?”

트리샤의 고개는 아주 작게 끄덕여졌다.

“특이하네요.”

라르세리아 대륙에서 여자는 결혼하면 남편의 성을 따라가고, 자식 역시도 아버지의 성을 따른다.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그 안에서 어머니의 성은 배제되는 게 대륙의 상식이었다.

“……그냥 제가 붙이는 거예요. 엄마를 잊지 않으려고요. 그런데 언제부터 안 거예요?”

트리샤는 몽블랑이 놀라지 않았다는 것에 많은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의심은 마틴과 루터 기사에게 쫓겼을 때고, 확신은 이안노프 백작이 시켜 줬죠.”

“……제 뒷조사를 하지 않은 건가요?”

뭔가 서운함이 짙어지는 기분이었다.

그 기색을 느낀 몽블랑은 서운함으로 가득한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언젠가 말해 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

진심으로 빛나는 그 눈에 트리샤를 할 말을 잠시 잊었다.

트리샤는 왠지 울컥 화가 솟는 것 같았다.

“내, 내가 알타이른인데 아무렇지도 않는 건가요? 블랑을 여태껏 기만하고 속인 거라고요!”

“싫어했잖아요?”

“……네?”

“알타이른이란 이름요. 누구에게나 싫어하는 건 있죠. 그리고 숨기고 싶은 것도요. 굳이 파고들어 헤집는 건 취미가 아니에요. 그것도 머리를 잘라내면서까지 끊고 숨기려 했던 과거는 더더욱 아니죠.”

트리샤의 두 눈동자가 담은 감정이 크게 요동쳤다.

그녀는 격동하는 마음을 누르려 달빛에 반짝이는 못을 바라봤다.

몽블랑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못을 바라봤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마음을 다스리는 듯 눈동자가 차분해진 그녀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엄마는 몰락해 버린 자밀 후작가의 마지막 후손이었어요. 정말 웃긴 건 카이사르 드 혼 엠페러 알타이른이 외가를 몰락시킨 장본인이었다는 거죠.”

트리샤는 정말 담담히 다른 사람의 이야기인 것처럼 자신의 과거를 털어 놓았다.

그것은 무책임한 한 남자의 집착이 가져온 비극이었다.

강제로 아기를 가져야 했던 한 여자, 미색이 퇴색하자 버려 버린 한 남자, 질투에 해선 안 될 짓을 벌인 한 남자의 여자들, 그리고 어미를 잃고 아비에게 외면받은 채 스스로를 보호할 돈도 갑옷도 친구도 없이 미끄러지면 베어 버릴 칼날 위에서 커 와야 했던 한 아이의 성장사.

그 아이는 자신이 정령사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숨겼다.

가족 만찬에도 나가지 않고, 스스로를 뽐내지 않고, 하녀보다 더 존재감 없이 숨죽여 살았다.

오직 지긋지긋한 새장을 벗어날 그날만 기다리며 말이다.

열일곱 생일, 그 누구의 축하도 없을 때, 아이는 드디어 새장을 벗어났다.

그렇게 벗어난 아이는 그제야 비로써 그 누구도 자신을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한참을 웃어 버렸다.

스스로가 너무 못하고 한심스러워서 그렇게 웃어 버렸다.

가지고 나온 것은 모두 어머니가 준 것뿐.

아이는 세상을 떠돌며 세월을 지새우다 여자가 되었다.

“푸후, 털어놓으니까 속이 좀 후련하네요. 이후로는 블랑도 아는 이야기예요. 같이 있었으니까요.”

“황제는 왜 트리샤에게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된 걸까요?”

“한 가지예요.”

“정략이군요.”

“비정하고 잔인한 알타이른에서 황녀의 쓰임은 오직 그것뿐이니까요.”

‘아니면 정보국의 정보로 인해 내가 블랑과 인연이 있다는 것을 빌미로 블랑을 포섭하려고 했던 것일 수도 있어. 아니, 그게 정확할 거야. 자신의 권좌에 너무도 집요한 인간이었으니까.’

카이사르 전 황제뿐만이 아니라 알타이른이라는 성을 쓰면서도 지금까지 살아 있는 모든 황족이 그랬다.

황제란 자리에 관심이 없어도 죽는 곳이 바로 알타이른 황실이었으니 말이다.

“고마워요.”

“네? 뭐가요?”

“비밀을 말해 줘서요. 그래서 미안해요.”

뜬금없는 사과에 의아해 하던 그녀는 곧 그대로 굳어 버렸다.

“……나, 난 안 되는 건가요?”

“잔인하게 들릴지 모르지만은…… 네. 안 돼요.”

“왜죠? 왜 난 안 되는 거죠?”

눈물에 젖어 가는 두 눈은 가슴을 참 답답하게 했다.

“당신은 좋은 여자예요. 하지만 제 가슴이 허락지 않네요. 친구로 남자는 말은 못 하겠어요. 다 개소리니까요. 난 그런 잔인한 짓 못 해요.”

“이유를 확실히 설명해 줘요! 블랑!”

“……약속했어요. 평생 같이하기로요. 그런데도 이렇게 또 어겨 버렸네요. 당신에게 호감이 없는 건 아니지만, 미안하게도 그게 사랑은 아닌 것 같네요. 희망 고문만큼 잔인한 짓은 없으니 이렇게 선을 그을게요. 그게 저에게도 그리고 트리샤에게도 좋을 테니까요. 그럼 먼저 일어날 게요.”

몽블랑은 왈칵 눈물을 쏟아 내는 그녀를 매정히 뒤로하며 야영지로 향하였다.

바스락바스락!

수풀이 짓눌리는 소리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씁쓸한지 몰랐다.

잠시 멈춰서 하늘에 뜬 세 개의 달을 바라본 몽블랑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야?”

바스락!

몽블랑의 옆에 선 나무에서 세베루스가 걸어 나왔다.

“글세, 언제부터라고 할 것은 없겠군. 처음 만난 순간부터 눈길은 갔으니까. 예쁘잖아.”

“사랑해?”

“아니, 하지만 발전해 보려고 한다. 가만 놔두기에는 레이디 트리샤는 너무 멋진 여자니까.”

“그래, 멋진 여자지. 가 봐. 혼자 있고 싶을 테지만, 위로가 필요할 거야.”

“……넌 잔인한 놈이다.”

‘그리고 난 얍삽한 놈이지.’

“알아. 하지만 사람 마음을 가지고 노는 건 루시의 한 번으로 충분하다 생각해.”

“……한 대 때려도 되겠냐? 기사로서 여자를 울린 불한당에게 한 방 먹여야 속이 풀릴 것 같다.”

“맘대로”

뻐억!

“큭!”

돌아간 턱을 잡은 몽블랑은 무심한 얼굴의 세베루스를 바라봤다.

세베루스는 콧방귀를 뀌었다.

“후회할 거다.”

몽블랑도 콧방귀를 꼈다.

“자신은 있냐?”

“내 명예와 이름을 모두 걸 거다.”

“사랑하려면 목숨까지 걸어.”

몽블랑은 부탁한다는 듯 세베루스의 어깨를 두드리곤 다시 걸었다.

바스락!

멀어지는 발소리에 씁쓸히 웃은 몽블랑은 방금 맞은 턱을 매만졌다.

“퉤! 씨발 놈, 더럽게 아프게 때리네. 아~ 진짜 오늘따라 유난히 밝다!”

몽블랑은 그렇게 진득하게 달라붙는 미련을 털어 냈다.

“루시랑 통화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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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지녔던 마음을 잔인하게 쳐 냈는데도 트리샤의 행동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 마음을 정리한지는 몰라도 어색해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트리샤가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어 예전보다 더 시선이 갔지만, 몽블랑은 애써 돌아가는 눈을 참아 냈다.

‘그건 그렇고, 많이 가까워진 것 같네.’

트리샤와 세베루스가 연인이 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둘 사이의 거리가 상당히 좁아지기는 했다.

‘다행이네.’

몽블랑은 스스로에게 웃어 주며 힘차게 발을 내디뎠다.

“바로 알버튼으로 갈 거냐?”

트리샤의 주위를 맴돌던 세베루스가 다가왔다.

몽블랑의 고개를 저었다.

“일단은 모두 모일 때까지 기다릴 거야. 그리고 작은 장치도 해 놔야지. 우리의 전장이 될 장소에 말이야.”

“전장이 될 장소?”

몽블랑은 작게 속삭였고, 세베루스는 어이없어했다.

“원래부터 그자가 불쌍하긴 했지만, 지금만큼 불쌍해 보이는 적도 없군. 어쩌다 이놈을 적으로 돌려서는…….”

“잡초는 뿌리를 완전히 뽑아 버리지 않는 이상 다시 자라나기 마련이잖아? 한데 모아서 깡그리 태워 버려야지.”

“음. 그자가 먼저 움직일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나?”

“아니, 알로호모라가 더 다급해지도록 열심히 사제들을 정화시키러 다녀야지.”

“밀라노 왕에게 협조를 구하는 게 낫지 않겠냐?”

“뭐 그런 방법도 있긴 하지만…….”

몽블랑은 왠지 얼굴이 어두운 마틴과 루터를 바라봤다.

메조른 밖에서만큼은 제국의 정보국이 질과 양의 모든 면에서 최고였다.

메조른과 제국 정보국이 움직이는 이상 파하란의 협조는 필요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들이 알게 되면 더 귀찮은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다.

“왠지 파하란엔 빚을 지기 싫네.”

“크큭, 너도 메조른 사람이라는 거로군.”

“언젠 아니었냐?”

어이없다는 듯 콧방귀를 뀐 몽블랑은 통신 수정구를 꺼내었다.

“게스 형님, 다음 포인트는요?”

* 아직 부족합니다, 알로호모라 님!

파삭!

알로호모라는 엄지 한 마디만 한 투명한 유리병을 손아귀에서 부숴 버렸다.

또 한 명, 아니 이번엔 다섯 명이 한꺼번에 소멸되어 버렸다.

벌써 삼천 명이 넘는 수족들이 소멸되었다.

그중 가장 뼈가 아픈 손실은 헌트 바슘과 리네 마하트마를 비롯한 율리나의 추기경급 이상의 사제들을 모두 잃어버린 것이었다.

목 아래서 단검을 찔러 넣기 위해 등잔 밑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그게 도리어 활동 범위를 제한해 버렸다.

그렇다고 지금 움직였다가는 행적이 들통 나고 말 터였다.

까드드득!

“반트, 강림의 준비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느냐!”

반트 몰록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직 부족합니다, 알로호모라님!”

당연히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혈정은 검은 태양을 이 땅에 강림시키기 위한 제물임과 동시에 강림진을 만들 매개체이기도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다 만들어 놓긴 했지만…….”

나머지 중요한 것 몇 개와 그리 중요하진 않지만 있어야 하는 것들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모두 혈정이 부족해서였다.

쾅! 쾅쾅!

알로호모라는 분노를 터트리며 책상을 부숴 버렸다.

“으아아아아! 이 빌어먹을 몽블랑 예거! 대체 얼마나 내 앞을 가로 막아야 만족할 것이냔 말이다!”

반트 몰록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방 안을 난장판으로 만든 알로호모라는 짙은 살기가 가득한 눈으로 반트 몰록을 노려봤다.

“방도를 구해라! 이 도시에 있는 놈들을 지금 당장 죽여서라도 구하란 말이야!”

“……예.”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이죽거린 반트 몰록은 거칠게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왔다.

“빌어먹을!”

반트 몰록은 갑자기 술을 한잔하고 싶다는 욕구에, 숨기 위해 알버튼의 외각에 얻은 작은 저택을 나서 버렸다.

“일루전 페이스.”

그의 손가락에 껴진 허름한 반지의 보석이 반짝이더니 반트 몰록의 얼굴이 40대 중년인의 평균적인 평범한 외모로 바뀌었다.

흐릿한 하늘을 보자 더욱 술이 마시고 싶어진 반트 몰록은 저택을 돌아보며 이를 갈았다.

“두고 보자, 알로호모라!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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