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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지 마란 말입니다.
이미 루한티한 협곡을 초토화시키며 트로이가 이끄는 알타이른 군을 후퇴시킨 2국 연합은 레인저 부대 출정을 감추기 위해 총공세를 감행했다.
마화포탄, 발리스타, 투석기 등을 아낌없이 퍼부으며 알타이른 군을 흔들었다.
이토록 엄청난 공세는 여태까지 없었기에 알타이른 군은 연전연패를 하며 성큼성큼 전선을 뒤로 물려야 했다.
그사이 레인저 군단은 산과 들을 누비며 알타이른군의 모든 병참선을 끊어 버리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국경을 흔들며 알타이른 제국 내부에 큰 혼란을 주었다.
안 그래도 아후라가 동부를 유린하고, 국경을 초토화시킨 메조른이 남동부에서 밀고 올라오고, 쿠할란의 해상함대가 남서부 해안가를 초토화시키고 있었다.
루타니아 왕국도 스튁스를 향해 해상함대를 출격시킨 지 한 달을 훌쩍 넘긴 마당이라, 북부와 서북부마저 위험해질 상황이었다.
여기서 50만이 넘는 대군이 파하란에서부터 밀고 올라오면 알타이른은 진정한 의미에서 사면초가를 당하게 되는 것이었다.
아니, 이미 알타이른은 사면초가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메조른에서 마화포를 공급받은 유페니언이 공세로 돌아서며 침공했던 알타이른 제국군을 국경으로 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카이사르 황제는 너무 빨리 야욕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다른 나라들이 모르게 유페니언과 파하란을 속국 내지는 공국으로 만들었어야 했다.
그랬으면 아마 동부 연합과 자웅을 겨뤘을지도 몰랐다.
모두 라르세리아 대륙의 유일 제국이라는 오만에서 비롯된 오판이었다.
그런 카이사르 황제에게 돌이킬 수 없는 비수가 날아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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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두둑 내리는 비 사이로 후끈한 열대바람이 밀려오고 있었다.
낮인데도 어둡게 물든 어느 산봉우리에 마치 수풀을 보는 듯한 색상의 로브를 입은 오천여 명의 무리가 숨어 어딘가를 지켜보고 있었다.
높은 나무 위, 멀리 볼 수 있는 마법인 이글아이가 걸린 아티팩트를 낀, 여리여리한 몸매의 소유자는 저 멀리 있는 산봉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도시 급의 마을처럼 높고 넓은 방책이 있고, 그 안에는 나무로 지어진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개미 떼처럼 보이는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그걸 가만히 지켜보던 로브인은 갑자기 몸을 뒤로 젖혔다.
자살을 하는 것이라 생각될 정도로 모든 것을 놓은 모습을 보이며 떨어져 내리던 그녀는 순간 몸을 뒤집으며 두꺼운 나뭇가지 위에 안착했고, 다시 몸을 뒤로 젖히며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런 식의 하강을 몇 번 반복한 그녀는 이내 나뭇잎이 가득한 땅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위험한 곡예를 하는 바람에 얼굴이 드러난 엘메이라는 온 몸을 수풀로 위장한 로브인들을 바라봤다.
“드러난 병사의 숫자는 약 오천여 명이다. 그보다 많은 숫자가 있을 테고, 그럴수록 임무 수행의 위험도는 높아진다. 하지만 우린 해내야 한다. 그래야 우리 가족이 산다!”
날카로운 음성이 대기를 가르자 주위에 모인 로브인들이 후드를 벗기 시작했다.
울프족, 사자족, 캣족, 하프 엘프, 그들은 이종족이었다.
그들의 눈은 죽음을 각오한 듯 단 한 점의 흔들림을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자원해서 떠나기 오기 전 성자님께서 해 준 약속을 기억하나?”
죽지 말라고 하였다.
절대 죽지 말고, 돌아와 가족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라 하였다.
설사 도망쳐 온다고 해도 그 누구보다 호사를 누리며 살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분께선 겨우 그것밖에 못해 줘서 미안하다 하셨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그것밖에 없는 데도 그분은! 더 못해 줘서 미안하다고 하셨다.”
그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몽블랑은, 아니 몽블랑뿐만 아니라 카우트예 학원 도시의 사람들은 이종족들을 인간처럼 대해 주었다.
그 어떤 차별도 없었고, 억압도 없었다.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었다.
“그분께서 나를 조용히 불러 한 가지 말해 주신 것이 있다. 2계급 특진이 무엇인지 아냐고. 그것은 전사자만 할 수 있는 특진이라고!”
이종족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씁쓸히 웃었다.
“역시 그랬나? 훗. 우린 이미 죽었다는 건가?”
그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진급에 의문을 품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니다.”
이종족들은 엘메이라를 바라봤다.
“우리가 살아 돌아온다면, 그리고 이번 전쟁이 끝나면 지금의 계급에서 또 1계급 진급과 함께 제대를 시켜 주신다 하였다. 지금 계급에서 1계급 진급하면 나는 오백인장이 된다. 상등병과 오백인장이 받는 혜택은 하늘과 땅차이다. 그건 제군들도 알 것이다.”
“만약 죽는다면?”
흥분했던 이종족들은 엘메이라를 바라봤다.
순간 입술을 깨문 엘메이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2계급 진급!”
이종족들이 순간 술렁였다.
중등병에서 죽으면 오백인장으로 죽는다는 것이었고, 상등병에서 죽으면 천인장으로 죽는 것이었다.
오백인장부터는 군 간부라 불리며, 장교라고도 불린다.
일반 병사와 군 간부의 혜택 차이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죽는다면 지금 월급의 몇 배에 달하는 위로금이 자식이 장성할 때까지 지급된다고 봐야 했다.
이종족들은 눈에 불을 켜며 서서히 전의를 깨우기 시작했다.
“딸내미 둘이 장성하려면 30년은 더 있어야 하니까, 그럼 받는 돈이…… 뭐야, 이거. 엄청나잖아?”
“게다가 장교로 죽을 테니, 시립묘지 안착은 당연한 것일 테지?”
“오오, 그럼 난 영웅으로 죽고, 내 자식은 영웅의 자식 취급을 받게 되는 거야? 인간들에게? 푸핫! 죽이네!”
“들어 보니까 시립묘지 관리를 사제님들이 한다더라!”
“오오오오오!”
엘메이라는 목숨을 버리려는 모두의 모습에 울컥 화가 솟았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그녀 역시도 데리고 있는 고아 엘프 이십여 명이 풍족하게 자라도록 하기 위해선 자신이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엘메이라는 하늘을 바라봤다.
“모두 조용,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이종족들은 입을 다물며 엘메이라를 응시했다.
“시계를 꺼내 작전시간에 맞추도록 해라. 폭파조는 01시 정각에 잠입을 시작하여 02시 30분까지 모든 건물에 폭탄 설치 완료하고, 혼란조는 02시 35분에 돌입한다. 시간이 되면 별도의 신호 없이 바로 작전에 돌입한다.”
이종족들은 품에서 손바닥 크기의 마법 시계를 꺼내 시간을 맞췄다.
“작전 완료 후 81지점에서 모이기로 한다. 질문 있나?”
이종족들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럼 지금부터 흩어져 각자의 포인트로 이동한다.”
사사사삭!
땅바닥에 납작 엎드린 그들은 굼벵이가 기어가는 듯이 느리게 움직였다.
자세히 본다고 해도 누가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그들의 위장은 완벽했고, 이동은 은밀했다.
마지막 이종족이 산을 내려갈 때쯤 해는 완전히 저물었고, 그것을 기점으로 이종족들의 이동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래 보았자 굼벵이가 기어가는 속도에서, 지렁이가 기어가는 정도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이동하던 그들은 배가 고프면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손톱 크기의 육포를 녹여 먹었고, 목이 타면 물에 적신 천을 빨아 먹었다.
자신의 포인트에 도착한 엘메이라는 20미터 앞에 있는 방책을 바라보았다가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00시 12분인가? 대충 예상했던 시간이군.’
엘메이라는 로브를 벗어 무기를 조립하고 착용하기 시작했다.
그 속도는 정말 느려서 무엇이 움직인다고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엘메이라는 마지막으로 자기 주먹 두 개만 한 마화포탄을 손에 들었다.
금속은 은이었는데, 이미 숯과 흙을 발라 놓아 광택을 완전히 죽여 놓은 상태였다.
‘00시 59분. 폭파조가 움직이기 시작했겠군.’
엘메이라는 방책 쪽을 바라봤다.
횃불이 환하게 켜진 방책 위에는 병사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한참 동안 모든 신경을 기울여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다시 시계를 보았다.
‘현재 시각이 02시 21분, 잘 움직여 주고 있나 보군.’
엘메이라는 수통을 풀어 마화포탄에 뿌려 숯과 흙을 제거했다.
‘02시 34분이군.’
물기를 깨끗이 닦은 그녀는 그 안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웅-!
‘작전 시작! 실프, 날려 보내!’
휘이이!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마화포탄을 솟구치게 했다가 방책 안으로 떨어트리게 하였다.
쿠웅!
“어? 이게 뭐지?”
‘3, 2, 1, 꽝.’
꽈과광!
엘메이라는 석궁을 손에 쥐며 달려 나갔다.
그녀는 왼쪽 10미터 밖의 망루 안에서 당황하며 허둥거리는 두 병사를 향해 석궁을 발사했다.
퉁! 퉁!
“커헉!”
“끄아아악!”
망루의 두 병사가 떨어져 내리자 다시 석궁에 시위를 잰 그녀는 마화포탄이 터지며 만들어 낸 방책의 커다란 구멍을 향해 몸을 날렸다.
꽈과광! 콰콰쾅!
사방에서 폭발 소리가 터지며 경보음이 방책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순간 석궁을 버리고 활을 꺼내 들며 사방을 향해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크악!”
“끄아아악!”
엘메이라는 무조건 방책 안에서 제일 커다란 건물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마, 막아! 저곳이 박살 나면 안 돼!”
“씨발! 화살을 쏘란 말이야! 맞히라고!”
화살이 날아오고 창도 날아왔다.
게다가 기사로 보이는 자들까지 달려왔다.
“칫!”
화살과 창을 이리저리 피하며 나아가던 엘메이라는 기사들을 보자마자 그들에게 화살을 날리고는 달려왔던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어? 어? 자, 잡아! 잡으라고!”
“거기 서라!”
엘메이라는 사방에서 들리는 고함과 비명 소리에 작전이 순조롭게 풀리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작게 웃었다.
그 순간 그녀의 옆으로 폭파조를 맡았던 캣족 남성이 나타났다.
흠칫 놀랐던 엘메이라는 듬직한 캣족 남성의 표정에 작게 안도했다.
“더 빨리 달려야 할걸. 20초 후 폭발해. 18초. 17초.”
“달려-!”
엘메이라는 허벅지에 힘을 가득 주며 달리기 시작했고, 그건 캣족 남성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달리는 와중에도 그들의 마음 속 카운트는 계속 줄어만 갔다.
엘메이라와 캣족 남성이 방책을 뛰어넘는 그 순간, 등 뒤에서 빛이 번쩍였다.
“엎드려!”
엘메이라와 캣족 남성은 방책 아래로 떨어지자마자 몸을 둥글게 말며 머리를 땅에 박았다.
그 순간 알타이른의 비밀 공방이 만들어진 마을의 모든 건물에서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꽈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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챙그랑!
카이사르의 손에서 떨어진 크리스탈 잔이 대리석 바닥을 물로 적셨다.
언제나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던 그 얼굴은 경악과 불신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무어라? 뭐가 박살 나?”
“모, 모든 마, 마화포 생산 공방들이 모두 박살 났다고 합니다. 거기다 기술자와 마법사 들도 죽었다고 하옵니다. 죽여 주시옵소서!”
마화포 생산 공방은 한 곳이 아니었다.
열 곳의 마화포 생산 공방이 남부 전체의 곳곳에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중 네 곳은 네 귀족의 영도들에 있기도 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설에 그리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모두 박살 났다.
“하, 하나도 남지 않았다고?”
“그, 그렇사옵니다!”
“율시스 드 퍼르난디 후작은! 그는 어떻게 되었느냐-!”
황궁 전속 마탑의 탑주인 율시스 드 퍼르난디 후작은 이번 마화포 생산의 총괄 기술자이자 책임자로서 네 귀족 중 한 곳의 영도에 내려가 있었던 상태였다.
모든 기술을 알고 있는 율시스 후작만 있으면 마화포 공방은 다시 세울 수가 있었다.
“……죽여 주시옵소서!”
“그딴 말을 지껄이지 말고 제대로 보고하란 말이다!”
“그, 그게 퍼르난디 후작님께선 사, 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고 하옵니다. 방어 마법을 펼치셨는지 즉사는 면하셨지만…….”
팔 한쪽과 다리 한쪽이 없었고, 서클이 깨져 버렸다.
그런데 머리를 다친 것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머, 머리를 다쳐! 어떻게! 얼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