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 회: 5-14 -->
알 쿨 들은 그제야 조금이나마 후련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100년, 아니 수백 년이 흘러도 마르지 않을 것들, 그 조금 퍼준다고 티가 나겠소? 난 직물도 20% 싸게 판매하는 것도 제안하오!
-오오오! 하맛드 형님의 말이 옳소! 그럼 나는 말을 30% 싸게 팔 것이오! 물론 수드라들을 지원할 곡식도 일단 사서 그 값보다 30% 싸게 팔아야지!
알 쿨 들은 침을 튀겨 가며 어떻게 퍼 줄 것인지를 논의했고, 셈하자는 그런 그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몽블랑을 떠올렸다.
‘보았느냐, 성자여. 아후라의 사내들은 이렇게 화끈하다.’
@
몽블랑은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마을을 지나쳐 가야 했다.
그렇게 지나쳐 가는 마을 근처에 있는 수드라 부락들에서 몽블랑이 한 말은 브라만들이 적당히 각색하여 아후라 왕국 모든 수드라들에게 퍼트렸다.
그래서 셈하자나 알 쿨 들은 몰랐다.
사람은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는 것을 말이다.
몽블랑은 일곱 번째 마을인 도시에서 텔레포트 마법진을 타고 루타니아와 인접한 국경 마을로 향했다.
비밀리에 나온 시아르눅은 건투를 빈다는 말과 함께 막대한 돈과 물품을 주며 몽블랑을 배웅했고, 몽블랑은 몇 년 후에 뵙자는 말을 남기며 루타니아로 넘어갔다.
지도로 보면 고작 손가락 한 마디의 거리만 지났을 뿐인데, 루타니아의 기후는 아후라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서늘했다.
그래도 적당히 서늘해서 그런지 일행은 썩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루타니아의 국경 마을로 향했다.
고급 여관에 방을 잡은 몽블랑은 오늘도 샤크티의 목욕 시중을 뿌리치고 식당 층에 내려왔다가 절대 여기서 볼 수 없을 것이라 여겼던 얼굴을 보고는 두 눈을 끔뻑였다.
“……마리 상급 사제?”
옥타바 마리, 그녀는 영도 카쉬모프로 자리를 옮겼던 루나 교단의 상급 사제였다.
하지만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녀의 옆에 있는 훤칠한 미남이었다.
“그리고 넌 또 왜 여기 있는 거고!”
“하하하! 오랜만입니다, 형님!”
“아르민!”
카쉬모프 자작의 둘째 아들이자 차기 자작인 아르민 드 카쉬모프였다.
이 모든 것보다 더 경악스러운 건 마리와 아르민이 마치 연인처럼 서로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이었다.
@
“후우…….”
카우트예 경비대 복장을 입고서 담배를 입에 문 잭은 서늘히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서쪽 하늘을 보고 있었다.
‘잘 지내고 있는 거냐, 레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하지만, 연락 한 번 하지 않는 매정한 친구를 떠올린 잭은 씁쓸해지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여보.”
그의 부인이 된 안젤라는 어느새 다가와 잭의 손을 쓰다듬었다.
“가게는 어쩌고 왔어?”
“우리 여보, 도시락 주러 왔죠.”
분홍색 보자기에 잭은 낯부끄러워 슬쩍 헛기침을 하였고, 지나가다 그걸 본 사람들은 흐뭇이 웃었다.
“캬~ 우리 제수씨, 정말 지극정성이시네. 그런데 왜 조카는 생기지 않는지 몰라.”
순간 얼굴이 달아오른 안젤라는 한때 몽블랑과 악연이었던 망구스를 흘겨보았고, 잭은 이를 드러냈다.
망구스는 카우트예 학원도시의 목사로서 한참 주가를 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깐죽거리면서도 재밌는 입담은 신도들에게 웃음꽃을 피워 주었다.
망구스는 어마뜨거라 양손을 들며 능글맞은 모습을 보이다 입을 열었다.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좀 따라와라.”
“……그러지. 안젤라.”
“전 여기 있을게요. 멀리 가실 것도 아니잖아요.”
고개를 끄덕인 잭은 망구스를 따라나섰다.
둘은 안젤라에게서 약 20미터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
“네가 가장 좋아할 이야기다, 레벌에 관한 거.”
잭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소식이 온 거냐?”
망구스는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고, 잠시 실망하고 안도했던 잭은 의아해 했다.
“귀네슈에서 지에르를 알타이른으로 파견한다.”
“지에르면…… 아드리아나 양의 오빠? 폐인으로 살지 않았나?”
매번 술을 먹고 깽판을 치니 경비대인 잭이 모를 리 없었다.
망구스는 말소리를 낮췄다.
“이번에 텔레포트 마법진이 온전해진 거 알지?”
게스, 튠, 잭 등 몽블랑과 채석장에서부터 함께해 온 카우트예의 최고위 간부들만 아는 소식이었다.
망구스는 알버튼의 은 광산에서 큰 몫을 해 준 것으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게 되어 최고위 간부가 되었다.
뭔가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는 것 같지만, 힘든 일을 많이 겪은 망구스의 정보 분석과 정보 취득, 정보 교란 능력은 놀랜드보다 월등했고, 그 능력 때문에 진리안의 최고위 단원이 될 수 있었다.
진리안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망구스의 능력은 대단했다.
그는 곧 진리안의 최고위 단원이자 목사로서 곧 대륙을 떠돌며 카우트예의 이름을 알릴 예정이었다.
“그게 어쨌다는 거냐?”
“내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지에르의 상재는 아드리아나 양보다 뛰어나다. 그런 지에르가 정신을 차리고 알타이른으로 간다는 거다. 텔레포트 마법진을 운용하는 운송로를 틀어쥐고서 말이야.”
텔레포트를 통한 유통의 혁명은 카우트예의 최고위 간부라면 모두 아는 이야기였다.
잭은 순간 낯빛을 굳혔고, 망구스는 입술을 비틀었다.
“그래, 지에르는 레벌의 마르지 않는 돈줄이 되어 줄 거다. 오는 길에 진리안에 들러보니 벌써 접선 날짜를 잡았다더군.”
“괘, 괜찮다고 하냐?”
“아직까진 이상 없단다. 제국 정보국에서 신경을 쓰는 건지 안 쓰는 건지는 모르지만, 레벌은 곧 돈이란 날개를 달고 알타이른 전역을 휘저을 거다.”
“……다행이군.”
“그래, 다행이지. 그럼 수고해라. 난 오후에 예배가 있어서 가 봐야 해.”
“아, 그래. 수고해라.”
멀어지는 망구스에게 시선을 뗀 잭은 다시 서쪽 하늘을 바라봤다.
‘너도 수고해라. 레벌.’
@
“귀가 무자게 간지럽네잉. 어떤 쓰불 놈이 내 욕을 할까잉?”
레벌은 얼굴을 사납게 일그러트리며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니들이냐잉?”
인부 대기소처럼 허름하고 더러운 공간 안에 있던 십여 명의 사람들은 황급히 시선을 돌렸고, 나머지 다섯 명의 사람은 어색히 웃었다.
어색히 웃는 다섯 명의 사람은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그들은 인부 작업복처럼 흙과 먼지로 뒤덮인 옷을 입고 있는 레벌과 십여 명의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았다.
레벌은 금발의 미청년을 보며 순박하게 웃었다.
“우리 떠벌이만큼 뺀질거리게 생긴 놈은 또 처음이네. 반갑다잉. 레벌이여.”
“하하하, 지에르입니다. 레벌, 아니 돈이라 불러 드려야 할까요?”
인부 작업복을 입은 십여 명의 눈에 살의가 돌았다 사라졌다.
알타이른 제국 남부의 골칫거리 돈 패밀리.
그들은 마약, 매춘, 납치, 인신매매, 살인 등등 돈이 되는 건 뭐든지 한다고 알려졌는데, 알타이른 제국 남부 일부 지방에서 공포와 절망 그리고 희망의 상징이었다.
희망은 그들이 어려운 자들을 상대로 자선사업을 벌이기 때문이었다.
돈 패밀리가 노리는 목표는 오로지 권력가, 재벌 등 남의 것을 착취하여 잘 먹고 잘 사는 놈들이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토벌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진정한 구성원이 드러나지 않아서였다.
많은 평민들이 그들을 감싸 주며 도와주는 것도 있지만, 보스부터 시작해 간부 삼백명의 정체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돈 패밀리의 숨겨진 보스가 레벌이었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인비지블, 세력은 작으나 돈 패밀리는 알타이른 제국 남부 권력가들의 골칫거리였다.
“돈은 개뿔, 그냥 레벌이라고 불러야.”
“그럼 형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지에르는 한번 실패를 겪긴 했지만, 상당히 명석하고 눈치가 빠른 자였다.
그런 그가 레벌을 스스럼없이 형님이라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레벌의 몸에서 풍기는 위압감 때문이었다.
사람을 부릴 줄 아는 사람만 가진 분위기, 그것은 거의 귀족에 필적하다고 볼 수 있었다.
“화끈하구마잉. 그래서 우리한테 돈을 대 주러 왔다고?”
“귀네슈와 레블잭 상단과 파트너십을 맺기 위해서죠.”
레블잭은 레벌이 세운 상단인데, 싼 가격에 여러 물건을 팔지만 그중 제일은 사람 장사였다.
말이 사람 장사지, 결국 인부를 대여해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남부 다섯 개의 영지에 지부가 있었다.
“그게 그거제. 따라와야, 앞으로 같이 일 할 사람들을 소개 시켜 줄랑께.”
레벌이 안내한 공간에는 수십 개의 칸막이들이 처져 있었는데, 그 안에는 긴 담뱃대를 물고 있는 여성들로 가득했다.
게슴츠레 하게 뜬 채 훑어보는 눈들이 꼭 유혹을 하는 것 같아 절로 눈살이 찌푸려진 지에르는, 이 공간의 끝에서 상의를 벗고 있는 레벌을 보곤 이를 악물었다.
‘잘못 본 것인가? 역시나 태생이 암흑가라더니…….’
“잘 닦아라잉. 이번에도 국물 흘러서 궁뎅이골 적셔 블믄 딴 년으로 교체할 거여.”
“걱정 마요, 오빠~.”
아리따운 여성은 물 적신 천으로 레벌의 몸을 닦기 시작했고, 레벌은 소파에 털썩 앉아 다른 미녀가 넘겨주는 술을 입에 물었다.
하지만 그 눈은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지에르를 날카롭게 살피고 있었다.
“오면서 우리 이쁜이들 봤제?”
“……그렇습니다, 형님.”
“우리 이쁜이들이 누군지 알어?”
지에르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니가 생각한 게 맞어. 바지씨들이 오입질 하는 년들이제. 근디 얘들이 왜 내게로 굴러들어 왔을까? 그건 생각해 봤냐? 못 했제?”
“…….”
“내 몸을 닦는 이년은 원래 꽃집 아가씨였다잉. 요년은 제 아빠가 학자였고, 저기 저년 아비는 도박꾼이었제. 이렇게 각자 사는 생활이 다르던 년들이 왜 지금 여기 있을까?”
“……돈을 잘 못 쓴 거겠죠, 자신이나 그 아비나.”
“맞아야. 그런디 그냥 잘못 쓴 걸까? 수작은 없었을까? 이년들의 또 한 가지 공통점을 말이여, 죄다 지그문트 개호로 잡놈의 새끼들이 수작 부려서 몹쓸 짓을 당했다는 거여. 그리고 버려진 거제. 보통 사람이라면 인생 막장에도 안 가는 쓰레기 창녀굴에 말이여. 버려진 이유도 별거 아녀, 나이가 찼다는 것뿐이제.”
지에르의 표정이 다른 이유로 굳어졌다.
“그럼 그 말은…….”
지에르는 자신의 생각이 억측이기를 바랐다.
정말 그렇다면 이 여인들이 당한 고통이 자신은 짐작도 할 수 없을 만큼 끔찍했을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사납게 웃는 레벌의 얼굴은 그것이 사실이라고 말해 주고 있었다.
“하따, 대가리 기똥차게 돌아가는 구마잉. 맞아야. 이년들이 앞으로 지그문트를 비롯해 요 알타이른을 밑바닥에서부터 부숴 버릴 암거미들이여. 진즉부터 활동하고 있제.”
레벌의 두 눈은 살의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새끼들은 지들이 만들고 키운 독거미한테 잡아먹혀 봐야 세상 이치에 맞는 거제. 안그냐, 란드야?”
“그렇죠, 형님.”
한쪽 눈에 카우트예 문양을 한 안대를 한 사내가 꼬질꼬질한 법복을 입은 채 들어오고 있었다.
지에르는 란드란 이름에 깜짝 놀랐다.
“당신이 빈민가의 난봉꾼 성자 란드?”
말은 괴상했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건드린 여자들은 죄다 권력과 돈이 있는 가문의 유부녀와 미망인이었는데, 그녀들은 란드를 내치기는커녕 죽고 못 산다는 것이었다.
자신 외에도 다른 여자가 있는데도 말이다.
은밀한 소문에 따르면 그녀들끼리 따로 사교 단체까지 만들어서 정보 교류를 한다고 했다.
란드는 그런 그녀들의 돈으로 빈민가를 돕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건 돈을 대 준 유부녀와 미망인 들의 명예도 덩달아 높아졌다는 것이었다.
비천하고 더러운 빈민에게 무한정 돈을 퍼준다는 것에 그녀들은 란드를 내치지 않고 오히려 더 많은 원조를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들 스스로도 어느 정도 빈민들을 돕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들이 얻는 지지와 신망은 알타이른 제국의 고위 귀족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였다.
분명 사회통념상 나쁜 짓을 저지르고 있는데도 말이다.
“끄응. 로맨티스트 성자란 말이 좋은데요. 반갑습니다. 란드, 아니 놀랜드입니다. 제국 모든 레이디를 저의 피앙세로 만들고 싶은 꿈을 가진 남자죠!”
정신이상자나 지껄일 법한 허황된 포부였지만, 지에르는 결코 비웃지 못했다.
실제로 놀랜드와 이야기라도 한 번 나눈 권력가의 부인들은 그가 없으면 죽고 못 사니 말이다.
그것이 겨우 두세 달 사이에서 일어난 일인 것을 보면 정말 엄청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아직 놀랜드의 손길이 닿지 않은 빈민들이 애타게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인들로 하여금 아래에서 무너트리고, 내부에서 쥐고 흔든다.
결코 쉽지 않은 방법이지만, 태연히 해내는 이들의 모습에 지에르는 전율을 느껴야 했다.
‘지그문트가 정말 상대를 잘못 골랐구나! 이들로 인해 지그문트와 알타이른은 속에서부터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리되면 상계도…….’
지에르는 온몸의 피가 끓는 것을 느꼈다.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은 오히려 나다!’
란드와 레벌이 틀어쥐고 있는 남부의 사정은 그에게 너무도 절실히 필요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