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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죽이는 게 아닌가 하며 공포에 질렸던 샤크티는 신이 내린 기적을 볼 수 있었다.
쩍 벌어졌던 살이 빠르게 아물고, 파리하게 죽어 가던 얼굴이 천둥소리보다 더 빨리 밝아져 갔다.
아흘라니는 그사이 즙을 낸 해열 약초와 항생에 좋은 약초를 섞은 포션을 샤크티의 모친의 입가에 흘러 넣었고, 여성의 숨소리를 빠르게 안정을 찾아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몽블랑은 남은 물에 손에 묻은 피를 씻어 냈다.
“일단 내일도 다시 들를 테지만, 아마 더 이상 아프진 않을 거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몽블랑은 계속 인사하는 샤크티를 두고 일어섰다가 천막 밖에 몰려 있는 사람들을 보곤 잠시 몸을 굳혔다.
경이로우면서도 무언가 복잡한 시선을 보내던 그들은 몽블랑이 쳐다보자 후다닥 넓게 길을 텄다.
몽블랑과 아흘라니는 그렇게 부락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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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몽블랑은 모든 일행들과 함께 다시 부락을 찾았고, 부락의 수드라들은 몽블랑과 일행들을 보곤 넙죽 엎드렸다.
몽블랑은 그중 수드라들의 뒤에서 달려와 자신의 앞에 엎드린 노인을 일으켜 세웠다.
“전 이 나라의 귀족이 아니니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 자비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못 알아듣는 일행들과 수드라를 위해 아흘라니가 동시통역을 해 주었다.
촌장은 눈치껏 손짓을 해서 부락의 수드라들을 일으켰고, 몽블랑은 샤크티의 천막으로 향했다.
천막 안에는 샤크티와 샤크티의 모친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고, 몽블랑은 한숨을 쉬며 그녀를 일으켰다.
“몸은 좀 어떠신가요?”
“모두 타국의 브라만 님의 은혜 덕분입니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녀는 꽤나 미색이 출중했다.
큰 눈에 뚜렷한 이목구비는 전형적인 아후라의 미인이었다.
혈색이 살아 있는 얼굴을 보자 몽블랑은 마지막 작은 불안을 떨칠 수 있었다.
“다 나은 것 같으니 다행이군요. 이건 생활에 보태 쓰십시오. 촌장에게도 드릴 테니, 부인의 것입니다.”
아흘라니가 몽블랑의 말을 통역한 그 순간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뚝 흘러내렸고, 몽블랑은 당황했다.
“왜 그러십니까?”
“이 미천한 것이 목숨을 걸고 자비를 바라오니, 부디 제 딸아이가 배만 곯지 않게 해 주옵소서.”
“……네?”
몽블랑은 자신이 제대로 들은 거냐며 아흘라니를 바라봤다.
아흘라니는 심각히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수드라는 브라만의 재산이다. 네가 함부로 팔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거냐? 내 주인을 곤란케 하지 마라.”
“타국의 크샤트리아시여, 당신이라면 충분히 브라만 릭샤 님과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왜 그래야 하지?”
샤크티란 존재는 일행의 전력을 약화시키게 할 짐이었다.
음식을 해 줄 노예가 필요하다면 전투 능력이 있는 바이샤를 고용해도 충분했다.
“미천한 수드라라고 해도 약속은 천금과 같은 것! 다른 주인을 섬기게 된 딸아이는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샤크티는 이 땅에서 태어나고 자라게 한 브라만 릭샤의 은혜를 저버리는 엄청난 죄를 저지르게 되었다.
몽블랑이 데려가지 않는다면 샤크티는 브라만 릭샤의 소유로서 부락을 떠날 수 없는데, 그리되면 죄를 지은 샤크티는 부락의 수드라들에게 맞아 죽거나 자결을 해야 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타국의 크샤트리아시여!”
“닥쳐라! 네가 지금 나의 사제님을 협박하는 것이냐!”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딸을 살리기 위한 간절한 바람은 처절하기까지 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계속 머리를 조아리는 그녀의 행동은 몽블랑을 정말 난처하게 했다.
그런데 더욱 난처한 상황이 벌어졌다.
“뭐냐, 이건! 하찮은 수드라 따위가 릭샤 님의 허락도 없이 다른 주인을 모시려는 거냐!”
허름하지만 그래도 비교적 깔끔한 옷을 입은 염소수염의 40대 초반의 빼빼 마른 중년인은 분노로 몸을 떨고 있었다.
그를 본 샤크티의 모친은 얼굴이 하얗게 변하였다.
“아, 알자드! 수드라를 관리하는 수드라!”
“괘씸한 년! 촌장! 당장 이년을 쳐죽여라!”
알자드의 말을 들은 촌장은 안절부절못하면서도 부락의 사내들에게 눈짓을 했고, 몽블랑은 점점 다가오는 그들을 보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잡았다.
“단장, 잠시 사태를 진정시켜 주세요.”
“……예, 사제님.”
못마땅한 심기의 아흘라니는 기사 패를 내밀었고, 알자드는 사색이 되어 엎드렸다.
“타, 타국의 크샤트리아 전사를 뵙습니다!”
비록 타국이라지만, 기사는 준귀족으로서 알자드는 감히 그림자조차 밟을 수 없는 고귀한 존재였다.
아흘라니는 몽블랑을 바라봤다.
몽블랑은 순간 사이에 많은 갈등을 하다가 한숨을 내뱉었다.
“브라만 릭샤에게 갑니다.”
“사제님!”
“알아요. 하지만 이렇게 어린 아이와 저분이 죽는 꼴을 볼 순 없잖아요.”
모두를 구할 순 없어도, 비참한 미래가 예견된 눈앞의 사람마저 외면할 순 없었다.
아흘라니는 샤크티와 그녀의 모친을 보며 살의를 머금었지만, 이내 한숨을 쉬며 물러났다.
“알겠습니다.”
아흘라니는 알자드를 바라봤다.
“브라만 릭샤에게 안내해라.”
“예, 옛, 타국의 크샤트리아 전사시여!”
* 여기선 안 돼요. 사람이 많아요
남쪽 국경의 지배자이자 아후라 왕국의 브라만인 릭샤 알 쿨 라하자는 미천한 종 알자드가 데려온 귀빈에 바쁜 걸음으로 접객실로 향했다.
자신이 다스리는 국경과 맞닿은 북부의 두 귀족과 친밀한 사이이며, 메조른의 현왕인 가르티안을 살려 낸 메조른의 성자인 몽블랑 예거는 아후라 왕국에서도 아주 유명한 이름이었다.
특히나 노환으로 죽어 가던 가르티안을 다시 살리다 못해 젊게 되돌렸다는 부분이 릭샤 같은 권력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대접은 잘하고 있는 거겠지, 수르?”
“수트라들로 하여금 접대하도록 하였습니다.”
수트라는 특정한 여성들을 지칭하는 단어인데, 브라만의 전속 무희면서도 잠자리 상대이고 호위를 뜻하였다.
릭샤는 총관 수르의 결정에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어느덧 접객실 앞에 선 릭샤는 수르가 열어 준 문을 통해 들어갔다가 안의 광경에 더없이 환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나 양옆에 무릎 꿇고 앉은 수트라의 접대를 능숙히 받고 있는 몽블랑의 모습이 그를 흡족케 하였다.
몽블랑은 풍채가 좋은 전형적 아후라 미남인 릭샤의 등장에 몸을 일으켜 허리를 숙였다.
“몽블랑 예거입니다. 호의는 거절치 않는 게 이 나라의 예법이라 하여 주인이 없는데도 이렇게 주인처럼 놀고 말았습니다.”
아흘라니의 통역에 릭샤의 얼굴엔 큰 미소가 어렸다.
“본국의 황제이신 셈하자 핫산 알 쿨 라하자의 다섯째 동생인 릭샤 알 쿨 라하자이오. 호의를 거절치 않아 주어서 고맙소. 다른 타국인들처럼 어려운 모습을 보였다면, 이번엔 나의 소중한 수트라들을 내쳐야 했을지도 모른다오.”
손님에겐 죄를 묻지 않는다, 그것이 아후라의 법도였다.
“그래서 메조른의 성자께서 본 왕을 찾은 이유는 무엇이오?”
“수드라 한 명을 내어 달라 간청하기 위해서입니다.”
릭샤의 얼굴이 굳어 버렸다.
“불가! 전생의 대역 죄인을 어찌 성자 같은 이에게 넘긴단 말이오! 그들을 관리하는 건 나의 업이오, 성자.”
업이란 단어에 자부심으로 빛나는 그의 눈을 본 몽블랑은 그가 타락한 귀족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관점의 차이인가? 나쁜 사람은 아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브라만 릭샤. 그 아이는 제가 데려가지 않으면 맞아 죽어야 할지 모릅니다.”
“……수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수르는 귓속말로 사정에 대해 설명하였다.
“감히! 수드라 따위가 목숨을 구걸했단 말이냐! 그놈들은 아직도 죄를 짓는구나! 미안하오. 내 그것들을 당장 물고를 내겠소.”
“그리 되면 전 다시 그들을 살려 내야 합니다. 그리되면 모녀는 또 저에게 은혜를 입었다 생각하겠죠.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브라만 릭샤.”
“끄으응.”
이 상황은 릭샤에게 아주 골치 아플 수밖에 없었다.
수드라가 전생에 큰 죄를 저질러 참회하라고 수드라로 태어난 것처럼, 브라만도 자신의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는 것과 동시에 모든 현상을 끌어안아야 하는 소명을 타고 태어난다.
수드라가 더 이상 죄를 짓지 못하게 관리하는 것 역시도 브라만이 해야 할 일이었다.
수드라가 자신의 품을 떠나 어떤 죄를 저지를지 몰랐기에 릭샤는 쉬이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모두 몽블랑을 위해서였다.
“나는 이 땅 모든 것의 대변자이자 지킴이오. 그들은 내 재산임과 동시에 내 몸이기도 하다는 말이오. 즉 나를 떠난 그들이 죄를 짓는다면, 결국 내가 죄를 짓는 것과 마찬가지라오. 내 사정을 좀 봐주시오, 성자.”
‘……정말 종교가 없는 게 이해되지 않아.’
사후의 환생을 생각하는 듯한 그의 말은 종교가 없으면 성립되지 않는다고 봐야 했다.
말을 잘하면 바이샤를 내줄 수 있다는 말을 떠올리며 이번 일을 쉽게 생각했던 몽블랑은 그것이 실책이었음을 느껴야 했다.
“그럼 거래를 하시겠습니까? 제가 후에 브라만 릭샤의 부탁을 들어 드릴 테니, 당신은 그들을 저에게 내주십시오.”
브라만이란 거대 권력자가 성자에게 바랄 것은 단 한 가지였다.
“내 목숨값이 겨우 수드라 두 명밖에 안 된다고 생각하느냐!”
분노로 얼굴이 벌개진 릭샤는 몽블랑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이미 이런 반응을 예상했던 몽블랑은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당신께서 그들의 죄를 사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건 당신의 가장 큰 권능일 테니 말입니다.”
“……죄를 사한다?”
“그들은 브라만 릭샤의 목숨을 구한 것입니다. 당신의 옥체를 만지지 않고서 말입니다.”
어떤 상황에서건 수드라가 브라만의 옷깃이라도 잡으면 극형에 처해지는데, 브라만의 몸을 만질 수 있는 것은 같은 브라만이거나 브라만이 허락한 자에 한해서만 가능했다.
몽블랑의 말은 릭샤의 구미를 당기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