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 회: 4-11 -->
왕궁은 언제 시끄러웠냐는 듯이 다시 평소처럼 조용해졌다.
가르티안과 펠리칸은 청명한 검격음으로 이른 아침을 깨우고, 왕궁의 고용인들은 숨소리와 발소리를 죽인 채 분주히 돌아다녔다.
“차앗! 찻!”
왕실 근위 기사 로니에르는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트리온의 검을 받아 주며 빈틈을 지적했다.
“브라운 그리폰은 유려하면서도 현란한 검로로 적을 속이는 일루전 소드입니다. 여기엔 한 가지 전제가 있는데 바로 적이 속아 넘어갈 만큼 빠른 속도와 정확성입니다. 손목과 발목에 힘을 주고 유연하게 움직이십시오.”
“그건 너무 어려운 주문입니다, 경! 난 아직 열 살이라고요!”
“전 그 열 살에 블록의 기사를 제압했습니다, 트리파이온 저하.”
트리온이 아니라 트리파이온. 트리파이온 드 메조른, 그 이름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계승 서열 6위에 해당하는 왕손의 이름이었다.
현재는 1위의 계승 서열을 지닌 명실상부 이 나라 차기 국왕이었다.
“그러니 로니에르 경이 규격 외인 겁니다! 고작 서른 살도 안 되는 나이에 발보아가 말이 되는 건가요!”
“잔말 말고 어서 오기나 하십시오. 기사는 검으로 말합니다.”
이를 악물며 달려들던 트리파이온은 더 이상 검을 들기 힘들 정도로 지치고 나서야 로니에르의 입에서 ‘오늘은 여기까지’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푸하! 죽는 줄 알았다.”
“그래도 많이 느셨습니다, 저하.”
평소에는 어딘가 허술한 면이 있지만, 검 앞에서는 그 누구보다 엄격한 로니에르의 칭찬에 트리파이온의 입이 찢어졌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몽블랑 형이 메조르니아를 떠나는 날이군요. 아쉽네요. 한번 보고 싶었는데요.”
“어쩔 수 없습니다. 직계 혈족이라곤 저하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밖으로 나가신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알아요. 그래서 아무도 만나지도, 나가지도 않는 거잖아요. 또 그날의 연회도 참석하지 않은 것도 그 이유 때문이잖아요. 저를 살리시려는 할바마마의 노력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느끼고 있답니다.”
2왕자가 폐위되고, 그 아들들까지 폐위되었다.
또 전번 연회에선 1왕자와 그 아들까지 폐위될 예정이었다.
남은 직계 혈족이라곤 트리파이온 혼자였기에 가르티안 왕은 특단의 대책으로 트리파이온의 공식적인 활동을 허가하지 않았다.
예정된 배신에 눈이 돌아 버린 1왕자 알트란이 연회에 참석한 트리파이온을 피격이라도 했다가는 500년간 직계 혈족으로만 이어져 온 왕좌에 변동이 생길 수 있기에 가르티안은 애초부터 그를 연회에 참석시키지 않은 것이었다.
트리파이온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과 1왕자 알트란이 참석지 않은 트리파이온 때문에 위화감을 깨닫고 마음을 돌리기를 원하는 아비의 간절한 마음이 겹쳐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이었다.
“쿡.”
“왜 웃으십니까?”
“내년 책봉식 때, 제 얼굴을 보면 얼마나 놀랄까요?”
“하핫! 그거 썩 재밌는 광경이겠군요.”
둘은 마주 보며 크게 웃었다.
“그러면 이제 경은 서드아이를 관두는 건가요?”
“서드아이에겐 작은 틈도 있으면 안 되니, 전 곧 죽은 걸로 위장되어 카우쉬카로 향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여생을 아버지의 양아들로 살아가게 되겠지요.”
“좋겠네요. 아, 나도 이 지긋지긋한 왕궁을 나가고 싶다.”
“……다 쉬신 것 같으니, 일어나십시오. 예절 선생이 오셨습니다.”
연무장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깐깐한 인상의 30대 중년 남성을 본 트리파이온을 울상을 지었다.
“대련을 더 하면 안 될까요?”
“세 단계 높여서 할 건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밉습니다, 경. 정말 미워요.”
어깨를 늘어트린 트리파이온이 연무장을 나가자 로니에르는 하늘을 바라봤다.
“카우쉬카에 가면 카우트예 학원의 기사 학부 선생에 지원해 봐야겠군. 아니면 장사를 하든지 말이야. 아버지 덕을 이럴 때 보지 언제 보나. 하하하하핫!”
@
왼쪽으로 다섯 보, 뒤로 열 보, 앞으로 두 보, 오른쪽으로 세 보, 그리고 다시 앞으로 열다섯 보. 그리하니 다른 세계로 향하는 공간이 열렸다.
“……야, 그냥 성물만 찾으면 된다며.”
“나도 그럴 줄 알았지.”
피와 정기를 빨아 먹는 나무형 몬스터 트랜트, 무지막지한 괴력으로 고블린을 찢어발기는 머슬몽키 등등 수십에 이르는 몬스터가 이쪽을 보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그 자식은 이걸 어떻게 돌파한 거지? 혼자 왔으면 개털 될 뻔했잖아!’
“아, 오려고 한다. 모두 전투준비!”
기사들이 검을 뽑으며 세베루스와 몽블랑의 뒤에 군진을 이뤘고, 그게 신호가 된 듯 머슬몽키 등등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끼이이익! 끽! 끽! 쿠워워워워워!
“씨발! 너 무조건 살려! 한 명이라도 죽였다간 너부터 죽는다! 모두 살아서 봅시다! 돌겨억-!”
“우아아아아아아!”
퍼억! 챙챙! 서걱! 푹!
피투성이와 먼지투성이의 거지꼴은 그들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웃고 있었다.
사상자 제로였으니 당연하다고 볼 수 있었지만, 그것 말고도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그중 제일 환하게 웃는 사람은 몽블랑이 아니라 세베루스였다.
“흐흐흐. 이게 홍염의 기사가 쓰던 화염의 르네라는 거지? 이런 아티팩트를 얻다니…… 음하하하하!”
코르체프의 함정인 줄 알았던 홍염의 기사의 유산은 진실이었다.
르네는 검신과 손잡이가 길고, 손잡이에 따로 ‘ㄱ’ 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두 자루의 기괴한 검은 손잡이 끝과 끝을 이어 붙일 수 있어 마치 창으로도 쓸 수 있는 무기였고, 여러 마법이 달린 최상급의 아티팩트였다.
기사들과 귀족들은 모두 세베루스를 부럽다는 듯이 바라봤지만, 이내 자신들의 수확물을 보며 흐뭇해했다.
카우트예의 성물이 있는 곳엔 1천 년 이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여러 아티팩트와 보물 들이 있었다.
배회하는 숲 중앙에 있는 발할라 교단 최후의 보루처럼, 이곳 역시도 카우트예 교단의 최후의 보루 같았다.
몽블랑은 양손으로 들고 있는 놋쇠 화로를 보며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꺼지지 않는 권능의 불은 영원한 성세의 등불이 되리니…….”
성화의 화로가 가진 능력이라고 할 만한 것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 왔다.
몽블랑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성화의 근처에서 심신을 연마하면 빠르게 능숙해지고…….”
‘이건 스킬 숙련도 증가라고 보면 되겠군. 스탯도.’
“하루에 세 번 몸과 마음은 강해지고 빨라지며…….”
‘4종 버프를 알아서 시전해 준다는 거군.’
“병마를 빨리 이겨 내게 하리라.”
‘이건 게임 시스템이 아니라 그냥 인간의 자연 치유력을 높인다는 거군.’
“씨발, 보상 스킬 같은 건 없는 거냐!”
몽블랑은 울컥 화가 나서 성화의 화로를 차 버리려다가 사람들의 시선에 어쩔 수 없이 발을 멈춰야 했다.
몽블랑은 한숨을 쉬며 가슴께로 손을 모았다.
“신성한 치료의 대지.”
화악!
순간 몽블랑의 몸에서 퍼져 나간 신성력의 바람이 반경 10미터 안에 있는 사람들을 휘감았다.
“오! 상처가 치료되었다!”
“몸이 조금 더 가벼워졌어! 대단한데?”
“역시 사제님의 신성 마법!”
몽블랑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그들을 보며 아쉬운 마음에 한 번 더 한숨을 내뱉었다.
배회하는 숲을 빠져나온 카쉬모프 자작은 세베루스와 세실리아, 기사들과 함께 빠르게 북상하였다.
본프레레 백작 역시도 전리품을 가지고서 빠르게 자신의 영지로 돌아갔다.
자작 부인의 산달이 얼마 남지 않아서 몽블랑도 루시아와 함께 영도 카쉬모프로 가고 싶었지만, 여기까지 오는 중 신전이 완공되었다는 소식에 어쩔 수 없이 카우쉬카로 돌아가야 했다.
“……엄청나네.”
거의 열 달 만에 다시 찾은 카우쉬카는 너무도 많이 변해 있었다.
겨울이라 공사를 중단했지만, 그 형태는 거의 완성되어 있었다.
채석장을 향해 뻗은 대로는 마차 네 대는 거뜬히 지나갈 만큼 넓었고, 그 양옆으로는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교차로에 의해 양옆으로 뻗은 길 역시도 마차 네 대가 지나갈 만큼 넓었고, 모든 길에는 보도와 차도가 나뉘어 있었다.
벌써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건지 보도에는 겨울옷을 꽁꽁 싸맨 사람들이 종종 걸음으로 길을 재촉하고 있었고, 어린아이들은 서로 뭉친 눈을 던지며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한눈에 다 담지 못하는 거대한 규모의 도시, 몽블랑의 전신이 전율에 의해 찌릿찌릿 울렸다.
‘이 모든 것이 온전히 나의 것.’
형언할 수없는 감동과 웅심이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다.
몽블랑은 자신과 같은 감정을 느낀 것인지 눈물을 흘리는 루시아의 손을 쓰다듬었다.
마차는 계속해서 채석장을 향해 나아갔고, 그럴수록 길을 재촉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점점 늘어가기 시작했다.
몽블랑은 왠지 그들의 종착지가 어딘지 알 것만 같았다.
오르막을 오르던 마차는 잠시 머리를 돌리더니 평지를 만나며 나아가다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린 몽블랑은 장엄하고 웅장한 신전을 보며 저릿한 가슴을 쓸어내렸다.
“와아아아아아! 사제님께서 오셨다!”
“어서 오세요 사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