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 회: 3-23 [당신과 난 친해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 -->
식사는 어떻게 마쳤지만, 저택 안은 자작 부인 때문에 발소리 하나 제대로 나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자작 부인에 대한 진단은 루나 교단의 사제가 하기로 하였다.
루나 교단과는 별다른 앙금이 없다시피 하였기에 몽블랑은 자신의 눈치를 보는 사람들에게 얼른 불러오라고 소리쳤고, 자작은 고맙다고 인사하며 다급히 루나 교단의 사제를 불렀다.
그렇게 불려 온 루나 교단의 사제는 몽블랑도 아는 사람이었다.
카우쉬카의 중급 사제, 아니 이번에 상급 사제에 오른 마리였다.
“음…….”
하얗게 물든 손으로 자작 부인의 상체를 쓸어내리는 마리의 얼굴은 급격히 굳어 갔고, 그에 방에 모인 모든 이들의 얼굴에 불안이 생겼다.
“그렇게 안 좋은 것이냐.”
고저 없는 자작의 음성엔 숨길 수 없는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아닙니다. 자작 부인께서는 건강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이걸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어서 말하라.”
“……후, 저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지만, 문헌을 보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축하드립니다, 자작님. 루오네 부인께서 임신을 하셨습니다.”
순간 방 안의 시간이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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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 17년 차의 동생이 생긴다 하자 세 남매는 얼이 빠졌고, 저택은 뒤집어졌다.
그렇게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가운데 수줍어하는 자작 부인과 쑥스러워 하는 카쉬모프 자작을 뒤로한 몽블랑은 마리와 대면하고 있었다.
“지그문트의 아실리 주교?”
“예, 그가 긴히 보자고 하더군요. 제가 상급 사제가 되기 위한 교육을 위해 영도로 도착한 이후, 지그문트의 엘핀토 상급 사제가 저에게 은밀히 접근했습니다.”
마리는 교육을 위해라고 속이고 있지만, 베아트리체 대사제가 그녀를 영도 카쉬모프에 보낸 이유는 자신들이 몽블랑과 적대하지 않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백날 멀리서 떠들어 봐야 들리지 않으니 바로 옆에서 말하려는 것도 있었지만, 몽블랑의 최후 목적지가 카쉬모프 자작가임을 베아트리체 대사제가 알아차렸던 것도 있다.
다정한 것까지는 바라지 않아도, 자작에게 몽블랑이 적대하지 않는 모습만 보여도 충분했다.
그러던 가운데 비밀리에 몽블랑과 만나야 하는 아실리 주교가 엘핀토 상급 사제로 하여금 마리에게 접근하도록 한 것이다.
무언가 의심쩍었지만 그냥 식사를 하건 완전히 틀어지건 아니면 손을 잡건, 그 어느 것이라도 나쁠 건 없었다.
“알겠습니다. 미안하지만, 날짜를 잡아 달라 전해 주십시오.”
“그렇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할 일을 다 마친 마리가 물러나자 카쉬모프 자작이 다가왔다.
“이야기 좀 하지.”
몽블랑은 루시아와 세 남매의 축복 속에 행복해하는 자작 부인을 한번 보고는 카쉬모프 자작을 따라나섰다.
카쉬모프 자작 부부의 옆방엔 카쉬모프 자작의 개인 서재가 있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있지, 아주 커다란 문제가.”
“세베루스 그 친구나 아르민, 세실도 모두 축하해 주고 있습니다.”
“그건 걱정하지 않네. 내가 말하는 커다란 문제는 바로 그날 이후에 일어난 내 몸의 변화 때문이네.”
“변화요?”
“오늘 세베루스와 대련을 하고 나니 확실히 알 수 있겠더군. 내 몸은 20대의 전성기로 돌아갔네.”
“예?”
몽블랑은 조금 황당한 말에 눈을 껌뻑였다.
“잠깐, 아버님 얼굴에 주름이 보이지 않네요? 그리고 피부도…….”
마치 젊은이의 그것처럼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잘 보았네.”
“이게 어떻게 된…….”
신체 나이가 역행하는 건 기적이 아닌 이상 불가능하다.
“그날 이후, 이런 변화가 일어난 거네. 혹시 짐작 가는 게 있는가?”
짐작 가는 게 있을 리가 없다.
부활은 죽어 버린 이를 최상의 상태로 다시 살려 내는 것뿐, 다른 효능은 없었다.
‘잠깐, 최상의 상태? 설마?’
@당신과 난 친해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무언가 있구나.”
짐작, 아니 확신이 가는 것이 있었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고, 설사 설명한다고 해도 카쉬모프 자작은 전혀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곰곰이 생각하던 몽블랑은 결국 경전을 토대로 이야기를 지어내기로 했다.
그것은 계속된 가뭄에 아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독초를 삼킨 아비와, 죽어 가는 어미를 업고 신의 대지를 찾은 늙은 아들의 이야기였다.
“그 슬픔에 눈물을 흘리신 카우트예 님께서 좌에서 내려오시며 가로되, 일어나라. 이제 너희에게 배고픔과 아픔은 없을 것이로다. 하나 이는 일시적인즉, 아비야 네 두 다리는 뿌리박은 나무처럼 단단해질 것이고, 네 팔은 네 아들을 거뜬히 안아 올릴 수 있으리라…….”
원래의 이야기는 그렇게 죽은 아비는 매일매일 과일이 맺히는 거대한 나무로 다시 탄생했다는 것이지만, 몽블랑은 그 뒤의 구절을 함구했다.
“현재 신도들에게 나누어 준 번역본이 아니라 원본에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알아들으시겠지.’
“그랬군, 그랬어.”
카쉬모프 자작은 이제야 모두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입을 꾹 다물 것이라 맹세했다.
‘죽은 자를 되살리는 것도 기적이거늘, 젊음까지 찾아 준다니……’
만약 이 말이 퍼진다면 하루라도 더 권력을 누리고 싶어 눈에 핏발이 선 이들이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입을 다물어야 했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웠다.
‘이 기적이 좋은 자들을 위해 쓰인다면…….’
세상엔 오래 살아야 할 이들이 너무 많다.
그중 카쉬모프 자작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인물은 현왕인 가르티안 드 혼 메조른이었다.
‘그분께서 다시 젊음을 되찾으시어 병상을 털고 일어난다면…….’
“……혹시 말이다. 그 부활에 제약이 있나?”
“음, 노환이나 병처럼 천명으로 죽는 자들은 안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사제 스킬 팁에도 그렇게 써져 있었지.’
“그래…….”
몽블랑은 크게 낙담하는 카쉬모프 자작을 보며 살짝 당황했다.
‘살리고 싶은 분이 있는 건가? 하지만 죽은 지 5분 안에 살려야 해서 옛날에 죽어 버린 사람은 못 살리는데…….’
몽블랑은 가만히 생각해 보았지만, 딱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
카쉬모프의 부모는 이미 예전에 천명을 다해 죽었고, 본프레레 백작은 여전히 정정하다.
언제 갈지 모르는 나이라곤 하지만, 최소 20년은 더 살지 않을까 하는 게 몽블랑의 생각이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저도 아들이라면서요. 편히 말씀해 주세요.”
머뭇거리던 카쉬모프 자작은 현왕 가르티안의 상태와 그의 업적에 대해 설명했다.
몽블랑은 안타까워했다.
‘그런 성군이 천명을 다해 죽다니…….’
그의 가장 큰 업적은 평민의 세금을 동결시키고, 귀족 및 상인들의 세금을 인상시킨 것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영지마다 평민들이 내는 세금이 달랐고, 가장 심한 곳은 60%나 됐었다.
지금은 최고 17%를 넘지 못하게 하였다.
“대단한 분이시네요.”
“내가 왕실파라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분께서는 정말 오래 사시며 메조른을 다스려야 하실 분이다. 그래서 안타까운 것이지.”
노환과 병의 제약이 너무도 아쉬운 카쉬모프 자작이었다.
“그래도 그분의 뜻은 왕자들에게 승계될 테니, 너무 아쉬워하지는 마세요.”
“후,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그, 그 정도로 안 좋은 거예요?”
“안 좋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인물이 없다. 그나마 한 분이 계시긴 하지만 그분은 너무 어리시지. 이제 겨우 여덟 살이니 누가 믿고 따를 수 있을까.”
어떻게 자라날지 모르기에 왕실파 귀족들로서는 쉽사리 접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몽블랑은 그게 조금 이상했다.
“아, 왕실파는 말 그대로 왕실을 위해 존재하는 파벌이다. 1왕자나 2왕자를 따르는 파벌은 따로 있다. 태평성대를 펼칠 왕의 재목이 없다면, 우린 왕의 반대 파벌이 되는 것이다.”
“그럼 귀족파, 왕당파 같은 파벌은 없는 건가요?”
“귀족파? 어느 귀족이건 제 권세가 많아지길 원한다. 그건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귀족은 대부분 자신의 권세를 더 높여 줄 리더나 허수아비를 찾는다.”
“중립 같은 건 없나요?”
“귀족에게 중립은 없는 법이다. 고고하게 사는 학 따윈 그대로 잡아먹히기 때문이지.”
“복잡하면서도 살벌하네요.”
“정치가 어디 쉽더냐. 후우, 전하께서 10년만 더 사시어 온전히 후계를 기르시면 좋으련만…….”
몽블랑은 왠지 조금 미안해졌다.
“그러게요. 아쉽네요. 아, 그런데 만약에 현왕이 돌아가시고 나면 아버님께 해가 되는 일은 없어요?”
“왜 없을까. 하나 더러운 짐승이 되느니, 굶어 죽더라도 귀족의 긍지를 지키겠다. 그게 진정한 귀족이며 본 카쉬모프의 자긍심이다.”
‘조금은 숙여도 될 텐데…….’
몽블랑은 못내 안타까우면서도 카쉬모프 자작이 존경스러웠다.
고난에 고개를 숙이지 않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을 이 왕국의 역사와 함께 고수해 온 것인가. 진짜 귀족이란 건 정말 대단하네.’
“이거 왠지 제가 부끄러워지네요.”
“하핫! 카쉬모프의 성자라 불리는 네가 말이냐?”
“에이, 그건 어쩌다 된 거고요.”
“하하핫!”
카쉬모프 자작은 저를 숙이는 몽블랑의 모습이 너무도 기꺼웠다.
그들은 자작 부인이 부를 때까지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