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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르르 문이 닫히고 시간이 흘러 해가 완전히 저물었을 때 쯤, 돌연 눈을 뜬 몽블랑은 기지개를 펴며 일어났다.
“어후~ 정말 푹 잤다.”
편히 자고 제대로 먹으면서 돌아다녀도 어쩔 수 없이 쌓였던 피로가 모두 날아간 것 같았다.
곧 저녁을 먹을 시간이라 욕실로 들어간 몽블랑은 잠시 후, 머리를 탈탈 털고 나오다가 이불 위에 올려진 옷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 까먹지 않고 펑퍼짐한 걸로 가져다 놨네.”
빨래를 위해 따로 빼놓았던 옷들도 모두 사라져 있었다.
밝은 베이지색 계열의 옷을 입고서 침대에 걸터앉은 몽블랑은 곧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일어났다.
식당에는 불퉁한 얼굴의 세베루스와 개운한 얼굴의 카쉬모프 자작, 마루더즈만 앉아 있었다.
몽블랑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종이가 있는 자리에 앉았다.
“아버님도 한판 하셨어요?”
표정은 여전히 무심했지만 숨길 수 없는 뿌듯함이 서려 있었다.
세베루스는 그걸 보며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야, 말도 마라. 아들을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패는데…… 아버지, 정말 치사합니다! 어떻게 여태까지 실력을 그렇게 꽁꽁 숨기실 수가 있어요?”
“일정 경지가 넘어가면 굳이 검을 잡지 않아도 실력이 느는 법이다, 세베루스.”
세베루스는 카쉬모프 자작의 당당한 말에 어이가 없었다.
세베루스가 알기로 카쉬모프 자작이 손에서 검을 놓은 것은 자신이 태어난 이후부터였다.
그때부터 카쉬모프 자작은 발보아까지 오른 자신의 재능을 묻으며 영지와 가문을 다스리는 데 모든 시간을 보냈다.
가끔씩 몸을 푼다고 가문의 기사들과 검을 나누긴 했지만, 카쉬모프 자작의 실력은 점점 감퇴해 갔다.
그건 검을 휘두르는 모습만 봐도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틀렸다. 카쉬모프 자작의 실력은 변함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지금이 전성기인 것같이 맹렬하고 능숙했다.
오늘 연무장에서 검을 마주했을 때, 처음 보였던 어색함이 연기였다는 듯 말이다.
검격을 마음껏 나누어서 기분은 좋다고 하더라도 장인에게 만신창이로 당한 것은 충격이 컸는지 마루더즈는 말없이 주먹을 말아 쥐며 다음을 기약했다.
“정말? 큭큭. 세베루스, 너 그냥 때려치워라. 어떻게 검을 놓은 지 20년이 넘은 아버님한테 깨질 수가 있냐?”
“이건 무효야! 이럴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안 봐줬을 거야!”
“패자는 유구무언인 법! 그렇지 않습니까, 아버님?”
“음, 옳은 말이다.”
세베루스는 억울해 미칠 것 같아 가슴을 쿵쿵 쳤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나요?”
“아, 오셨어요. 어머니. 어? 제가 드린 거 차셨네요?”
“누가 준 건데…… 어때, 어울리니?”
“어머니는 뭘 걸쳐도 아름다우세요.”
입을 가리며 웃은 자작 부인은 세베루스를 곱게 흘기고선 자작의 옆에 앉았다.
“어머니, 저 없는 동안 아버지가 다시 검을 잡으셨습니까?”
“아니? 우리 블랑이 때문에 갑자기 바빠져서 검을 잡지 않으셨는데. 왜, 무슨 일 있었니?”
세베루스는 자신이 당한 억울한 일을 낱낱이 고해 바쳤고, 자작 부인은 뭔가 짐작 가는 것이 있다는 듯이 카쉬모프 자작을 흘겨봤다.
“여보, 역시 나 몰래 보약 먹는 거 맞죠?”
“헛소리. 그랬다면 세바스찬의 눈을 속일 수 없었겠지.”
“그건 맞는데…… 하지만 요새 허리 힘이…….”
“애들 앞에서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뭐 어때요. 얘들도 다 성인인데요. 그렇지, 아들~.”
세베루스는 완전히 찬밥이 된 듯 자작 부인은 몽블랑을 향해 물었고, 몽블랑은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럼요, 어머니! 아주 보기 좋습니다!”
“허흠!”
“나중에 또 이야기하게요. 그땐 부부 관계에 좋은 걸 알려 드릴게요.”
자작 부인은 기대한다는 눈빛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자작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부모님의 야릇한 장면이 떠오르자 세베루스는 다급히 화제를 돌렸다.
“이놈들은 시간이 다 됐는데도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아르민은 누구와 달리 영지 일 때문에 바빠서 조금 늦을 거고, 세실은 꾸민다고 조금 늦는다더라. 카루트 양과 트리샤 양은 세실을 돕는다고 했단다.”
뼈가 있는 말에 세베루스는 못 들은 척 식당의 벽을 바라봤고, 몽블랑은 혀를 찼다.
“그러게 평소에 좀 잘하지 그랬냐.”
“끄응, 어떻게 나는 너만 오면 찬밥 신세냐.”
“인과응보다, 쨔샤. 아버님, 어머니, 저 배고픕니다!”
“호호호, 그래. 아르민과 그 아이들이 오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으니 먼저 먹자꾸나.”
자작 부인이 손뼉을 치자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음식을 향해 손을 뻗으려 할 때, 식당 문이 열리며 세실리아가 들어왔다.
들었던 포크를 내려놓던 몽블랑은 세실리아 뒤에서 수줍게 고개를 숙이고 따라오는 루시아를 발견하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색이 고운 하늘색 드레스에 머리를 틀어 올리고, 옅은 화장을 한 루시아는 화려한 장신구가 없다고 해도 너무 아름다웠다.
청초한 백합을 연상시키는 듯한 모습에 몽블랑은 넋을 잃었다.
그것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같은 여자인 자작 부인이었다.
“카루트 양, 정말 아름다워요. 사교계에 데뷔하면 모든 남성들의 혼을 빼 놓겠는데요?”
“엄마, 정말 예쁘지 않아? 조금만 꾸며도 이렇게 예뻐지는 얼굴을 그렇게 방치하고 있었다니…… 블랑 오빠, 반성해요.”
“그래, 반성해야겠네. 원래도 예쁘긴 했지만…….”
몽블랑은 놀랍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고, 루시아의 얼굴은 사과처럼 붉어졌다.
훈훈한 분위기가 감도는 와중, 세베루스가 세실리아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트리샤 양은?”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불참. 루시, 네 이름이 있는 자리에 앉으면 돼. 어디보다, 아. 블랑 오빠 옆이네. 어서 앉자, 다들 기다리시잖아.”
세실리아는 당황해서 저항하는 루시아를 몽블랑의 옆에 앉히고 자신은 마루더즈의 옆에 앉았다.
루시아는 고개를 들지 못했고, 몽블랑은 다시 루시아를 의식하게 되어 몸을 굳어졌다.
연륜 가득한 부부, 깨가 쏟아지는 예비 신혼부부, 맞선 자리에서 처음 만난 커플. 세베루스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부러우면 얼른 며느리를 데리고 오렴, 아들.”
“……얼른 밥 먹죠! 배가 등에 붙을 지경입니다!”
“으이그, 저건 언제 자식 노릇 할지…… 많이 들어요, 사위, 그리고 카루트 양.”
“네, 잘 먹겠습니다.”
카쉬모프 자작을 필두로 모두가 포크와 나이프를 들며 식사를 시작하자 자작 부인은 떠들썩하니 좋다고 작게 웃으며 스푼을 들었다.
수프를 떠 입에 가져가던 자작 부인은 순간 배 속에서 올라오는 역겨움에 입을 막았다.
“욱!”
“괜찮은가?”
“괘, 괜찮아요. 속이 조금 좋지 않나 봐요.”
“조금이라도 떠. 굶으면 좋지 않아.”
남편의 배려에 살짝 웃어준 그녀는 다시 수프를 떴다.
“우욱!”
이번의 헛구역질 소리는 상당히 커서 모두가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자작 부인은 계속 해서 올라오는 구토기에 신경 쓸 겨를 이 없었다.
자작 부인은 끝내 입을 틀어막은 채 벌떡 일어나 뛰어 나갔고, 자작은 굳은 얼굴로 멀어지는 그녀의 등을 응시했다.
식당안 사람들 역시도 마찬가지로 얼굴이 굳어 있었다.
“……엄마, 혹시 임신 아니야?”
“……설마~ 어머니 연세가 몇인데…….”
그녀의 현재 나이는 마흔일곱이고, 여성으로서 아기를 가지기에는 한없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카쉬모프 자작은 포크를 내려놓고 일어섰다.
“오늘은 너희들끼리 먹어라. 난 너희 엄마를 살피마. 됐다, 일어나지 마라, 세바스찬!”
카쉬모프 자작이 그렇게 나가자 식사는 조용하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