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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꾸며진 작은 방, 몽블랑은 본프레레 백작과 마주하고 있었다.
본프레레 백작은 무심한 얼굴로 몽블랑을 압박하고 있었다.
“세실의 깜찍한 행동도 네놈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겠지?”
“기쁘지 않으셨습니까?”
“...부정 할 수 없군. 나쁘지 않았다. 허나 후에 생각하니 불쾌해 지더군.”
“외람된 질문이지만, 여태껏 살아오신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다고 생각되십니까?”
“귀족은 가문의 존속을 생각하여야 하기에 언제나 고독한 존재다. 침대 위에 누워 일어 날 수 없다고 해도 뒷방의 늙은이는 될 수 없다.”
“아까 보니 큰 아들분이 40세는 넘어 보이는 것 같던데요. 이젠 믿을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나이 찬 손자손녀는 할아버지가 무섭지 않을 때, 애교를 부립니다.”
“흥! 내 주머니의 돈을 노리는 거겠지.”
“주면 좀 어떻습니까? 어차피 혈육 아닙니까.”
“말처럼 쉽다면 귀족이 여태껏 존속하고 있을 것 같으냐.”
“그걸 왜 혼자 지시려 합니까? 가족이 왜 있는지 모르십니까?”
본프레레 백작은 입을 다물었고, 몽블랑은 작게 웃었다.
“가문이 좀 망하면 어떻습니까? 너무 오냐오냐 키우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오냐오냐 키웠다? 이 내가 자식들을?”
“가신들이 자식보다 백작님을 더 따르니, 오냐오냐 키운 거 맞는 것 같습니다. 솔직히 저는 이런 귀족가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모르지만, 자식이 그 나이 먹도록 제 아버지를 넘어서지 못했다면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감히 네놈 따위가 본프레레의 일에 참견하는 것이냐.”
“참견이 아니라 객관적인 시선입니다. 가족에게까지 바란 대가, 죽어서 싸들고 가실 겁니까? 그러면 좋습니까? 재밌습니까?”
“닥치거라. 놈.”
나지막하게 으르렁 거리는 소리였지만, 그 무엇보다 섬뜩했다.
하지만, 이미 타버린 호랑이 등이었다.
“아버지가, 할아버지가 돼서 좀스럽지 마십시오. 베풀어야 돌아오는 법입니다. 그러고 보면 백작님도 참 불쌍합니다. 어떻게 그 나이 되시도록 이런 말 하는 사람 한명 없습니까?”
“...나를 자극해서 좋을 건 없을 거다.”
“이게 자극입니까? 당연한 말을 하는 거지. 전 삭막하기 그지없는 가정에서 자란 둘이 불쌍해서 그런 말 한 것뿐이었습니다. 가족이 가족을 믿지 못한다. 이 얼마나 끔찍한 말입니까. 서로 악을 지고 단절해도 가족인데... 쯧. 백작님은 가문은 다스렸을망정, 가정은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나를 실패자라 말하는 것이냐!”
“그렇게 받아들이신다면 더 이상 대화를 나눌 필요는 없겠군요. 그럼 일어나 보겠습니다.”
“어딜 가느냐!”
“설마 좀스럽게 바른 말 좀 했다고 목을 치진 않으시겠죠? 진정한 귀족께서 말입니다.”
목례를 하고 나온 몽블랑은 문이 닫히자 풀리려는 다리를 겨우 잡아 세웠다.
“빌어먹을, 살라고 별의별 소리를 다하네. 카쉬모프 자작이나 브라이텐 남작 때문에 군사는 내주겠지만... 에휴.”
입맛을 다시던 몽블랑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일단 코르체프 그놈이 어떻게 될 때까지는 카쉬모프 자작성에 무조건 붙어 있어야 하나? 아놔, 언제까지 있어야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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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후, 세베루스와 세실리아는 카쉬모프 자작가를 향해 출발해야 했다.
몽블랑은 두 대의 마차를 감싼 수백의 군사들을 보며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날카로운 군기는 그들 모두가 정병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이것을 주셨다.”
마차의 휘장이 닫히자 몽블랑은 기사가 넘겨준 쪽지를 읽어 내리다 피식 웃었다.
‘네놈의 말 때문이 아니라, 세베루스와 세실리아가 죽는다면 카쉬모프에서 얻을 게 없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도와주어야 하니.... 하략’
몽블랑은 편지를 다 읽지 않고 접어 버렸다.
“그냥 솔직하지 못한 분이셨네. 그렇게 살면 재밌나?”
몽블랑은 자신이 상관 할 일이 아니라며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더 이상의 생각을 접었다.
“...이거 정말 뒈지지 않으려면 세베루스 근처에 무조건 붙어 있어야겠네.”
본프레레 백작이 이렇게 정예 군사를 내어준 이상, 코르체프는 자신들이 카쉬모프 자작성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할 터였다.
문제는 카쉬모프 자작성에 도착한 이후였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코르체프라면 어떻게든 제거할 기회를 노릴 것이고, 그 마수에서 목숨을 부지하려면 무조건 세베루스나 세실리아, 아르민 근처에 있어야 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문제는 자신이 어떤 액션도 취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흘라니에게 부탁해 볼까 하던 몽블랑은 고개를 저었다.
잘못되면 그와 극단 안단테에게도 피해가 가기 때문이었다.
‘나 살자고 남을 죽일 순 없지.’
“에휴, 집에 돌아가는 길이 왜 이렇게 힘드냐.”
몽블랑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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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영도 카쉬모프로 향하는 길은 순탄했다.
본프레레와 카쉬모프가 붙어 있는 영지라서 그런지, 카쉬모프 자작이 보낸 듯한 기사와 병사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이, 로트멧 경.”
“모시러왔습니다. 대공자님. 아가씨.”
세베루스와 세실리아의 얼굴은 밝아졌다.
기사의 네 번째 칭호인 발보아이자 카쉬모프 자작가를 수호 했던 사자 기사단의 부단장이며, 결정적으로 현 카쉬모프 자작을 지지하는 자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능숙하게 본프레레 백작이 보낸 군사들을 밀어내며 마차를 밀착 호위하였고, 본프레레의 군사들은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로트멧은 마차에 타 있는 몽블랑을 게슴츠레 바라보았다.
세베루스는 어색히 웃었다.
“로트멧 경.”
로트멧은 싸늘히 몽블랑을 일견하고는 무리의 선두로 향했다.
세베루스는 혀를 찼고, 몽블랑은 미간을 좁혔다.
“원래는 저러지 않았었는데, 한번 변하더니 계속 저런 모습이군.”
“진짜 이름만 대도 누구나 알아볼 수 있게 세를 키우던가 해야지. 여기서 치이고, 저기서 치이고. 서러워서 살수가 있나.”
“거기서 더 키우겠다고?”
“예전에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결론은 여태껏 일어났던 일들 모두가 결국 내게 힘이 없어서였다는 거야. 최소한 이 자작령 정도는 신도님들을 퍼트려 놔야 다신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아.”
“...본격적으로 나서려는 거군.”
“여태까지도 진심이었어. 다만, 나는 넓다고 생각했던 그 반경이 좁았을 뿐이야.”
처음은 먹고 살기 위해, 그 다음은 엘리샤를 빼내오기 위해 돈을 벌려 노력했었다.
만족스럽다는 것을 넘어 넘치도록 들어오는 돈에 어깨가 우쭐해지고 하루하루가 행복하고 즐거웠었다.
대체 돈을 어디다 써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할 정도였기에, 더 이상은 욕심이었고, 능력 밖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한 달 사이에 일어난 일은 몽블랑으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결국 내게 힘이 없었던 것뿐이야.’
몽블랑은 다신 어떤 것이든 잃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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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는 됐느냐.”
“예, 아버지.”
“가자.”
코바치와 코르체프는 기사 네 명을 대동한 체 내성의 성문을 향해 걸었다.
내성 문 밖, 마침 있던 가신들과 사자 기사단을 대동한 체 아르민을 옆에 두고 서있던 카쉬모프 자작은 다가온 그들에 입술을 비틀었다.
“네가 올 줄은 몰랐구나.”
“변을 당한 큰 조카와 막내 조카가 오는 길 아닙니까. 삼촌으로서 당연히 와 봐야지요. 아이작 형님.”
“혹여 시체로 돌아오는 것은 아닐까 희망을 가진 것은 아니고?”
“끔찍한 말씀을 하시는 군요. 어찌 삼촌이 되서 조카들이 죽는 걸 원한단 말입니까.”
“그거 재밌는 말이구나. 언제부터 너와 그 아이들 사이에 친족의 정이 있었단 말이냐.”
“...가신들의 앞에서 면박을 주실 겁니까? 제 체면도 세워주시지요.”
카쉬모프 자작은 콧방귀를 뀌었지만, 더 이상 말하지는 않았다.
코바치 준 남작의 말대로 그는 카쉬모프 자작가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래도 네가 친 형제이기에 그만한 온정을 베풀었다고 생각했다.”
“저 역시 형님으로 모셨지요.”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원망과 질투로 빛나는 눈에 카쉬모프 자작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번 일은 절대 잊지 않으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아들아,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글쎄요. 아직 미숙한 저로서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죄송합니다. 백부님. 아니, 자작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은 카쉬모프 자작은 입술을 비틀고는 외성문에서 이곳으로 오는 길을 바라보았다.
“오는 군.”
저 멀리서 뛰어오는 익숙한 복장의 전령에 카쉬모프 자작은 느긋이 뒷짐을 졌다.
옆에 서 있던 아르민은 마주잡은 손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보며 순간 자신이 잘 못 보았나 생각했다.
평소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카쉬모프 자작의 얼굴을 본 아르민은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
‘아버지께 이런 모습이 있었던가?’
너무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한 아르민은 그냥 머리에서 지우기로 하며 앞을 바라봤다.
저 멀리서 군사들의 행렬이 보이자 아르민은 작게 웃었다.
“빨리 와. 형.”
어느덧 다가온 마차는 멈춰서 문을 열었다.
“아빠~”
달려 나온 세실리아는 카쉬모프 자작에게 와락 안겼고, 순간 당혹해한 카쉬모프 자작은 머뭇거리다가 세실리아의 등을 토닥였다.
어색한 그 손놀림에 가신들과 사자 기사단의 얼굴이 경악으로 흔들렸다.
아르민은 그 모습을 보며 고소를 지었다.
‘원래 속내를 보이지 않는 분이시긴 했지만, 그래도 모두 속아버렸군. 자식인 나까지 말이야.’
아르민은 말에서 내려 다가온 세베루스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어서와, 형. 수고 많았어.”
“음. 아버지께 인사가 먼저다. 갔다 오마.”
세베루스는 여전히 금이 간 가면을 쓴 체 어색해 하고 있는 카쉬모프 자작의 앞에 섰다.
“다녀왔습니다. 아버지.”
“...고생 많았다. 세베루스. 그런데.”
세실리아를 내려놓은 카쉬모프 자작은 누군가를 찾아 고개를 돌리다 마차에서 내리는 몽블랑을 발견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신 로트멧. 자작님의 명령을 완수하였습니다.”
황급히 다가오는 몽블랑에게서 눈을 땐 카쉬모프 자작은 다가온 로트멧의 어깨를 두드렸다.
“수고 많았네. 로트멧 부단장.”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지금 역시도 말입니다.”
푸우욱!
결코 들려선 안 될 소리가 들리자 모두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주목 되었다.
로트멧은 불신가득한 표정에 씁쓸히 웃었다.
“잘 가십시오. 자작님.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로트멧의 검이 비틀어지며 완벽한 죽음을 선사했다.
“크륵!”
“...아, 아빠--!”
“주군! 이 개 같은 놈이-!”
사자 기사단장의 검에 로트멧의 목이 날아 갈 때, 코바치 준남작과 코르체프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지금이다! 쳐라!”
우아아아아아아!
“모두 전투태세! 아버지와 동생들을 보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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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마차에서 내려 카쉬모프 자작의 앞에 섰던 몽블랑은 눈앞에서 날아간 목과 분수처럼 솟구치는 피, 가슴을 잡은 체 쓰러진 카쉬모프 자작과 그를 잡은 체 흔들고 있는 세실리아, 그리고 사방에서 들려오는 함성소리와 비명소리가 마치 꿈만 같았다.
“사제님! 어서 아버지의 치료를!”
“아, 네!”
몽블랑은 급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며 신성한 치료를 시전 했다.
한 번 두 번 계속해서 시전 했지만, 상처가 아물려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 광경은 세실리아, 아르민에게 절망을 안겨주었다.
“아버지...”
“사, 살려주세요! 제발 아빠를 살려주란 말이에요! 제가 뭐든지 다 할 테니, 부디!”
몽블랑은 매달리는 세실리아의 행동에 이를 악물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신이 아니고서는...”
말을 하다 말고 눈을 끔뻑인 몽블랑은 카쉬모프 자작을 향해 다급히 손을 뻗었다.
‘제발 되라! 숙련도도 중급으로 올랐잖아!’
몽블랑은 절규하듯이 외쳤다.
“카우트예의 부름--!”
파아아아앗!
순간 몽블랑과 카쉬모프 자작의 몸에서 눈이 멀어버릴 듯한 빛이 폭사 되며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하늘을 꿰뚫는 거대한 빛기둥에 전투는 잠시 멈추며 모든 이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빛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그 자리엔 손을 뻗고 있는 몽블랑과 바닥에 누운 카쉬모프 자작이 있었다.
꿈틀!
사람들은 순간 제가 잘 못 본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분명 심장에서 피를 분수처럼 뿜으며 죽음을 맞이하였던 카쉬모프 자작의 손이 움직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전신이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카쉬모프 자작이 급히 상체를 일으켜 숨을 내뱉었다.
“...난 죽은 게 아니었던가?”
실눈을 뜬 몽블랑은 멀쩡한 카쉬모프 자작을 보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안도감에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자작님을 보호하고 역도를 처단하라!”
“모두 손속에 사정을 두지 마라! 역도일 뿐이다!”
우아아아아아아!
2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