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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리아나는 빈 양피지를 내밀었고, 몽블랑은 자신이 아는 모든 페스트 푸드의 종류를 적어 내려갔다.
아드리아나는 언듯 봐도 20개나 넘는 레시피에 눈을 부릅떴다.
“...나 당신한테 뽀뽀해도 돼요?”
“사양 하겠습니다. 어차피 이거 제대로 된 맛을 내려면 골치 꽤나 썩을 겁니다. 나도 대충 이렇게 만들어야지 라고만 생각했었거든요. 아무튼 내가 생각한 페스트 푸드 및 야식은 이걸로 끝!”
똑똑똑
“들어와요.”
문이 열리며 첼시가 들어왔다.
“몽블랑 예거 고객님께서 예치를 위해 가져오신 돈은 총 133만 8431페니입니다.”
“아, 그럼 이것도 플러스 해줘요.”
몽블랑은 당장 쓸 것을 제외한 지폐뭉치를 내밀었고, 아드리아나는 몽블랑의 계약서를 보여주었다.
“제 재량으로 쓸 수 있는 골드패 남아 있죠? 발급해 드리세요.”
“...아, 네!”
놀라며 나가는 첼시의 모습에 몽블랑은 아드리아나를 바라봤다.
“골드패를 가지고 있으면 총 5천만 페니까지 대출을 받을 수 있죠. 예치 이자율도 1%더 붙어요. 레시피에 대한 제 호의에요.”
“아~ 그래요? 고맙습니다. 그럼 성문 닫기 전에 가야 하니 일어나도록 하겠습니다. 내일은 일찍 출근해야 하거든요.”
“이런, 저녁에 대접해 드리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죠. 사정이 그러시다니 다음으로 미루죠. 앞으로 좋은 거래 부탁 드려요.”
몽블랑은 떠났고, 남겨진 아드리아나는 계약서를 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았어! 상단이 전 대륙으로 뻗어나갈 수단뿐만이 아니라 오빠를 넘을 수 있는 발판도 마련했어!”
한편 밖으로 나온 몽블랑은 아차하며 다시 들어갈까 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뭐니뭐니해도 마누라 손맛이 최고지.”
“신전이 왜 돈이 넘쳐나는 지 알겠더군요.”
“티끌모아 태산이니까요. 하지만, 걔들은 바위모아 태산이죠. 아, 땅 사야겠다.”
“땅 말입니까?”
“오늘 오신 분만 2천명이 넘죠. 앞으로 얼마나 더 올지 몰라요. 사람 입이란 건 그만큼 무섭거든요.”
만약, 땅을 늘릴 수 없다면 예배시간이라도 늘려야 했다.
*****
“정말 다물어 줄 거죠?”
루타냐는 가면 쓴 남자를 보며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입을 다무는 것뿐만이 아니라, 수고비도 넉넉히 주지.”
“...돈은 필요 없으니, 이번뿐이에요. 그에게 피해가 가는 일이었으면 난 돌을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거부 했을 거예요.”
“오~ 카쉬모프의 암거미에게도 이런 순정이 있을 준 몰랐는 걸? 그런데 이번만으로 끝내기에는 그렇지 않아? 좋은 일엔 서로 돕고”
“아가리를 찢어버리기 전에 닥쳐.”
달빛을 받아 번쩍이는 얇은 칼날을 본 헤이먼은 능글맞게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
“하라는 데로만 잘 하면 우린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거야.”
“이후로 오는 놈은 누구든 전신을 난도질 해버릴 줄 알아!”
루타냐의 외침을 뒤로하며 돌아선 가면 남자는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힌 어둔 골목길을 걷다가 어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단촐하게 꾸며진 방에는 해치가 있었다.
“승낙했습니다.”
“그 년을 더 이용할 수 없는 것은 아쉽지만 잘 됐군. 수고 했다. 헤이먼.”
가면을 벗은 헤이먼은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 줄 모르겠습니다. 저희가 버는 돈은 1페니도 없잖습니까.”
“바보 같은 놈. 이번 일은 그 사제 놈에게서 배경을 때어내는 아주 중요한 작업이야! 관청 관리들이 받들어 모시건 말건, 아커만과 체놈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야! 기다려봐라. 체놈과 틀어지면서부터 그 사제 놈이 설 자린 없을 테니까.”
“하지만 둘째 공자가 있잖습니까?”
“여기서 영도까지의 거리가 얼마지? 바로 옆에 두고도 제대로 살피지 못하는 게 사람이란 동물인데, 둘째 공자라고 다를 것 같으냐? 그가 개입 할 때쯤이면 이미 모든 일은 끝난 후야! 그 공과 사가 뚜렷이 구분되는 성격이 개입할 수 없도록 발목을 잡을 거다!”
“아아아! 역시 대단하십니다!”
“이제 조용히 기다리기만 하면 돼. 그럼 그놈은 알아서 내 손에 들어오게 될 거다. 이제 나도 사업을 확장할 때가 온 거야!”
“훌륭하십니다! 형님!”
“프하하하하하!”
*****
이른 아침 간수장 실을 나서는 몽블랑은 약간 힘이 없었다.
“역시나랄까...”
아커만은 땅의 매입을 잠정적으로 보류했다.
“함부로 처분 할 수 없는 건 알지만, 그래도 조금 실망이네.”
미안해하는 아커만의 얼굴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은 몽블랑은 도서관 공사장으로 향했다.
“저, 정말 그런 큰 공사를 나한테 맡겨주는 거야?”
쟝은 울 듯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에휴, 아커만이 땅을 줬으면 더 크게 지었을 텐데, 아쉬워요.”
“차라리 둘째 공자에게 서신이라도 보내 보는 건 어때?”
“그라면 허락해 줄 수도 있겠죠. 그런데 그거 다 빚입니다.”
땅을 매입하는 걸로 어떤 조건을 걸어올지, 대충 상상이 갔기에 몽블랑은 애초부터 아르민을 제쳐 놓았었다.
“그런데 블랑아. 우리 진짜 자작님 생신 때 나가는 거 맞아?”
놀랜드의 말은 도서관 공사장에 모인 모두의 궁금증이었다.
“맞다고 했잖아요. 오늘 가석방 명단 보니까, 모두의 이름과 노역번호가 써져 있었어요. 자작가에서 말이 내려왔다고 이번에 한 2백명? 그 정도 내려 보낸다고 하더라고요.”
사람들은 그제야 안도하다가 이내 숫자에 깜짝 놀랐다.
“그렇게나 많이 내려 보낸다는 말이야?”
“겨우 2백명인 거예요. 이번엔 여기 채석장에서만 내보낸다고 하더라고요. 이를 테면 시범운영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니 잘해야 해요. 가석방 기간에 죄나 팔려오면 가중 처벌이에요.”
“그건 걱정마. 안 그래도 보스가 허락해 줬어야.”
“정말요?”
“잭이나 나나 꽤 많은 죄를 뒤집어 썼제. 이번에 출소하믄 중간보스 자리를 준다는 조건으로 말이여. 그걸 포기한당께, 손가락 두 개로 용서 한다드라. 그것도 왼손으로.”
“나도 르벌과 똑같은 조건이다. 이렇게 약한 벌은 없었어.”
르벌과 잭은 후련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잘리면 바로 가지고 오세요. 붙일 수 있을 지도 몰라요.”
“그냐? 그때 부탁한다잉.”
사람들은 훈훈하게 웃으며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그것을 도우려던 몽블랑은 다가온 체놈에 의아해 했다.
“면회소 관리 안해요?”
“할 말이 있어서 말이야. 지금 시간이 아니면 힘들 것 같아서.”
따로 이야기 하자는 듯한 뉘앙스에 몽블랑은 체놈을 따라 사랑과 나눔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점심시간도 가까워지고 있으니 얼른 말 할게. 저택에 대한 내 지분 있지? 그것 좀 돌려 줄 수 있을까?”
몽블랑은 화들짝 놀랐다.
“돈 필요 하세요?”
“응. 급히 3백만 정도...”
“아니, 그렇게 많은 돈을 어디다 쓰려고요?”
“묻지는 말아줘. 부탁이야.”
“후우, 앞으로 십년만 있으면 그 두 배는 벌 수 있어요. 쟝씨 출소하면 신전을 엄청 크게 지을 거라고요.”
“...미안해.”
“...알았어요. 오늘 저녁에 찾도록 하죠.”
“고마워. 이로서 내 지분은 사라지는 거지?”
“...그냥 그때 드리는 것에서 제하는 걸로 할 게요. 단, 이번뿐이에요?”
“브, 블랑!”
체놈은 몽블랑의 손을 잡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은혜를 꼭 갚겠다고 말했다.
한결 나아지다 못해 얼굴에 서린 어둠이 가신 체놈이 물러나자 몽블랑은 머리를 긁었다.
“아오, 이거 받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빚쟁이 신세냐. 반년 안에는 충분히 갚겠지만... 에휴휴.”
*****
성문 닫기 전에 일을 끝내고 나오기 위해 평소보다 일찍 채석장을 나온 몽블랑은 귀네슈 상단을 찾았다가 큰 횡재를 하였다.
몽블랑이 들어오자마자 아드리아나가 어제 계약금을 주지 않았다면서 떡 하니 2백만 페니나 안겨 준 것이었다.
사람을 사귀는데 돈을 아끼지 말라는 상단주의 경영철학 때문이라고는 했지만, 몽블랑으로선 빚쟁이 신세를 면하였기에 하마터면 아드리아나에게 끌어안을 뻔 했었다.
체놈은 몽블랑이 준 3백만 페니와 따로 찾은 돈을 챙겨서 바로 루타냐에게로 달려갔다.
“이 정도면 충분히 갚을 수 있지? 만나면 차용증 꼭 받아. 아니 그냥 나랑 같이 가자. 그런 놈들은 나 같은 놈이 가야 딴 마음 못 먹어.”
루타냐는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두꺼운 지폐다발을 바라보았다.
예상보다 너무 빨랐고, 그래서 체놈이 자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너무 화가 났다.
“...당신 바보에요? 내가 꽃뱀이면 어쩌려고 이런 거금을 함부로 주는 거예요! 왜 남을 의심하지 않는 건데요!”
“그냥 주는 거 아닌데? 우리 결혼 자금이야. 우리 결혼하면 당분간 여기 서점에서 자야해. 아차, 이 말부터 해야지. 루타냐, 우리 결혼하자. 내 아이를 낳아줘.”
내밀어지는 반지에 루타냐는 순간 굳어버렸다.
너무 무드 없는 고백과 싸구려 보석도 박히지 않은 금가락지 때문이 아니라 너무도 해맑게 웃는 체놈의 미소 때문이었다.
‘이 사람 변하질 않아... 그때도, 지금도...’
몇 달 전 루타냐는 목적을 가지고 체놈에게 접근을 했었다.
지금은 조금씩 주목을 받고 있지만, 안 그랬었던 그 때의 체놈은 여태까지 솔로인데다 술과 시거를 하지 않아 모아 놓은 돈이 많을 것 같았고, 또 월급도 평민으로선 꿈꿀 수 없는 액수였다.
어둔 밤거리에서의 운명적인 만남이 그녀가 짠 극본이었다.
그녀는 양아치 무리를 구하여 체놈의 휴가만을 기다렸다가 작전을 펼쳤다.
하지만, 그녀의 시나리오는 초반을 넘어서자마자 박살났다.
도망쳐 온 루타냐를 뒤로 돌린 체놈이 양아치 무리에게 그냥 맞아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에게 양아치가 오려고 하면 기를 쓰고 막았다.
각본이 깨져 화가나 왜 맞고만 있었냐고 말하니 대답이 가관이었다.
‘옷차림을 보니 아가씨가 평소에 다니는 길 같아서 맞아 준 겁니다. 저런 놈들은 어설프게 대하면 복수를 하는데, 아가씨가 당할 수 있잖습니까. 누구보다 법을 준수해야 하는 간수가 돼서 죽일 수는 없으니 그냥 맞아 준겁니다. 다친 곳은 없습니까?’
그러면서 짓는 바보 같은 미소에 그녀는 흔들려 버렸다.
이 남자 저 남자 만나봤지만, 이렇게까지 욕망없이 순수하게 호의를 보낸 사람은 체놈이 처음이었다.
자신은 그만큼 미인이었고, 몸매도 좋았으니 말이다.
결정타는 집 앞까지 데려다 주고 미련 없이 돌아선 모습이었다.
그 넓은 등판에 그녀는 왠지 화가 나면서도 사랑에 빠진 자신을 볼 수 있었다.
이후로 가끔씩 내려온 체놈은 언제나 바보같이 웃으면서도 진지하게 부딪쳐 왔다.
그 모습은 정식적으로 교제를 시작한지 두 달 씩이나 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손이라도 잡으면 얼굴이 벌게져 버벅 거리면서도 길을 걸을 땐 자연스럽게 어깨를 잡아 자신이 집들이 있는 쪽으로 걷게 하였다.
루타냐는 프러포즈를 했으면서도 흔들림 없는 그 모습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대체 무슨 자신감인지... 하지만, 이런 모습이 좋지?’
그래도 이렇게 무드 없이 프러포즈하는 것은 용납이 안됐다.
“나만을 위한 고급식당, 꽃다발, 그럴듯한 연주!”
“으, 응?”
“그렇게 준비해놓고 다시 해요. 어디서 도둑놈처럼 홀랑 채가려는 거예요? 나이도 나보다 9살이나 많으면서! 흥!”
“...우왓! 고, 고마워! 정말 고마워! 내가 행복하게 해줄게!”
루타냐는 안으려는 체놈의 팔을 쳐내며 눈을 샐쭉 떴다.
“결혼식 전까지는 스킨쉽 금지!”
“어... 손잡는 것도 안돼?”
“뽀뽀까지는 용서해 줄게요.”
또 바보처럼 웃는 체놈을 보며 루타냐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누구든 방해만 해봐. 갈기갈기 찢어버릴 거야.’
루타냐는 흉심을 삼키며 체놈의 턱 밑을 긁었고, 체놈은 그것도 좋다며 바보같이 웃으며 강아지 마냥 그르렁 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