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5화
그 흔한 언덕조차 없는 평원에서 싸웠기에 힘과 힘의 대결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건 결코 칼리나와 라그나르에게 유리한 상황은 아니었다.
“이런 젠장. 보기보다 능력 있는 노인네였군.”
라그나르는 말 위에 올라 도끼를 휘두르며 불만을 내뱉었다. 본래 자신의 장기는 좌익이나 우익에서 적을 빠르게 궤멸시킨 뒤 적 본대의 뒤를 잡는 전술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대신해 중앙에 내세울 만한 놈이 없었다. 아마 있다고 해도 불안해서 자신이 중앙에 섰겠지.
괜히 자신이 섣부르게 날개에 포진했다가 중앙이 뚫려서 칼리나가 사로잡히면 그때는 뭐 더 볼 것도 없이 전쟁이 끝나게 되니 별수 없었다.
총사령관의 존재는 그런 거였다. 고작 사람 하나 잡히는 게 아니라 여기에 모인 병력들은 오로지 칼리나만을 바라보고 모인 이들이었다.
분명 전투에 관해서는 자신이 칼리나보다 수백, 수천 배 나았지만 그뿐이었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용병이었고 저들을 이끌 명분이 없었다.
그러니 설사 질 때 지더라도 자신이 중앙에 있어야 했다. 그래야 전투에서 패퇴하더라도 칼리나를 데리고 도망칠 수 있었고 성공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후일을 기약할 수 있었으니까.
문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전투의 흐름이 적에게 넘어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사실이었다.
이쪽은 한 달도 안 되는 시간 안에 모여든 연합군이었다. 그렇게 모인 병력들 중 태반은 징집병인데다 무장조차 제대로 지급되지 못한, 그야말로 급조한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다.
반면 적은 엄청나게 쌓은 부를 바탕으로 조직된 그야말로 군대 그 자체였다. 그런 이들을 상대로 그나마 반나절이 넘게 버틸 수 있었던 건 자신과 자신이 이끄는 용병단 덕분이었다.
중앙이 조금 밀리더라도 병력을 빼서 양 날개를 지원해주었고 간신히 전선을 맞출 수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지금은 한계에 다다랐다.
사람인 이상 다들 지치기 마련이었고 아군은 이런 대규모 전투를 경험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반면 적들은 이런 전투에 도가 텄는지 교묘하게 예비대를 운용하며 아군을 압박하고 있었다. 저 노인네는 애초부터 이럴 속셈이었겠지.
일부러 상황을 비등비등하게 만들어 희망을 주고 그 희망에 눈이 돌아가 주변을 보지 못하는 사이 올가미로 목을 졸라가고 있던 것이었다. 마치, 짐승을 사냥하는 것과 같은 방법이 아니던가.
“단장님. 양 날개가 밀리고 있습니다. 더 이상 버티는 건 미친 짓입니다.”
온몸에 피칠갑을 한 부관의 보고에 라그나르는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전쟁이란 이런 거였다. 상대가 압도적인 병력의 양과 질로 밀어붙이면 혼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남은 예비대는 없나?”
“진작에 전선에 투입한 지 오래입니다. 몇몇 부대는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싸우고 있습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병력의 전투력을 보존하기 위해선 쉴 시간도 주고 밥도 먹이고 해야 한다.
그게 안 된다는 건 병력을 빼는 순간 무너져 내릴 게 뻔하니 어쩔 수 없이 밀어붙이고 있다는 말이겠지.
“병력들 사기가 말이 아니겠군.”
“솔직히 전선이 진작에 무너지지 않은 게 용할 정도입니다. 만약 레이디 칼리나가 퇴각하는 낌새를 보인다면 다른 귀족들도 눈치를 보다가 전부 다 도망칠 겁니다.”
솔직히 자신도 퇴각으로 마음이 기울긴 했다. 용병으로 살면서 수많은 전장을 경험했고 당연히 패배와 승리도 셀 수 없이 경험했다.
그 경험에 기반해보건대 이 전투는 패배한 전투였다. 시간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패배의 여파는 감당할 수 없이 커져갈 것이다.
하지만 지금 퇴각하면 그녀는 두 번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이다. 아마 평생을 도망쳐다니거나 아니면 지하에 숨어들어 살아가야겠지.
“단장님. 퇴각하셔야 합니다. 전쟁의 흐름을 사람 혼자서 뒤집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래야겠지.”
“허면….”
왠지 모르게 칼리나를 보고 있으면 힐데가르트가 생각났다. 생각해보면 그 꼬맹이도 나이에 비해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지.
아마 오늘 전투에서 패배한다면 그녀도 평생을 그런 멍에와 굴레에 매여 살아야 할 것이다.
“내가 죽으면, 레이븐 용병단은 자네가 이끌게.”
“예? 그게 무슨….”
스스로도 이게 멍청한 짓이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위해 승리를 가져와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던가?
“혼자서 전쟁을 뒤집는 게 불가능하다고 했나? 내가 오늘 불가능은 없다는 걸 보여주지.”
전황이 생각한 대로 돌아가자 밀라노의 영주는 칼리나가 도망갈 것을 우려했는지 본인이 직접 전장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병력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나는 그 점을 노릴 것이다. 총사령관이 붙잡혀서 좆되는 건 굳이 이쪽에만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었으니까.
“전능하신 오딘이시여. 영원한 빛으로 날 보호하소서. 거룩하신 지혜로 날 이끄시고 내 가는 길 어둠에 싸여 있어도 신성한 빛으로 내 영혼을 이끄소서.”
기도를 끝마치자 몸속을 가득 채우던 두려움은 용기가 되었고 한 줌 남아있던 공포는 투지가 되어 나를 이끌었다.
나는 내가 다시 겁을 집어먹기 전에 말의 옆구리를 걷어차 단숨에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수많은 창과 화살이 나를 가로막았지만 나는 굴하지 않고 계속 말을 몰았다.
한 발자국 내딛을 때마다 화살이 박히고, 또 한 발자국 내딛을 때마다 창이 몸을 꿰뚫었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칼을 휘둘렀다.
적의 피가 솟구쳐 자신의 몸에 낙인처럼 눌어붙었고, 또 자신의 피가 그 위를 덮어쓰며 발을 붙잡는 족쇄가 되었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무수한 고통과 상처를 대가로 영주에게 다가간 나는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 손도끼를 꺼내 들었다.
이미 몸은 엉망이 됐고 손은 고통으로 덜덜 떨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해야만 했다. 내가 아니면, 대체 누가 이 전쟁을 끝낼 수 있겠는가.
“으아아아아아!!!!”
그렇게 고통과 비명, 절규를 한데 모아 고함치며 집어던진 손도끼는 정확히 영주의 미간에 꽂혔고 그 순간 전장은 정적과 함께 얼어붙었다.
그 찰나의 시간이 흐르자 이내 영주가 쓰고 있던 투구가 쪼개지며 사방으로 피가 튀었고 그의 몸은 천천히 허물어져 내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말 위에서 낙마하는 순간 나는 고통에 정신이 희미해져 감에도 정신을 다잡으며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소리쳤다.
“적장이 쓰러졌다! 전군! 진군하라!!!!!”
그렇게 마지막 의무를 끝마친 나는 몸에서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마지막까지 전장에 서고 싶었지만 내 몸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한도를 넘어서 몸을 움직인 대가를 치를 시간이었다.
그렇게 나는 말 위에서 정신을 잃은 채 쓰러졌고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사흘이나 지난 무렵이었다.
“끄응….”
몸 여기저기에 붕대가 감겨있고 부드러운 침대에 누워있는 걸로 봐서 적어도 전쟁에서 패배하진 않은 모양이다.
만약 자신이 패배했다면 진작에 목이 잘려있었을 것이다. 적의 영주를 죽였으니 잘 쳐줘도 차가운 감옥 바닥에 던져져 있었겠지.
“라, 라그나르!? 어떻게, 몸은 괜찮아!? 어디 아픈 데는 없고?”
침대 근처에 기대어 자고 있었는지 내 인기척에 눈을 뜬 칼리나는 내게 다가와 허둥지둥대며 몸 여기저기를 매만지며 물었다.
“상처는 좀 안 건드렸으면 좋겠는데.”
“아, 미, 미안해. 저기, 그래서 몸은 좀 괜찮아?”
“글쎄…아직 발할라에 갈 때는 아닌 모양이야.”
이대로 발할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건만 아직 오딘께서는 자신을 거둘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내 말에 이제야 안심이 됐는지 칼리나의 눈가에는 눈물이 글썽였다. 보아하니 눈가가 새빨간 게 며칠 내내 울었던 모양이다.
“흐윽…난 당신이 잘못되는지 알고….”
그렇게 울먹이던 칼리나는 내가 어떻게 할 틈도 없이 내 품에 안겨서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었고 나는 정신이 들자마자 그녀를 달래는데 진땀을 빼야 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그녀의 흑역사가 하나 늘은 건 말할 것도 없었고.
* * *
정신이 들었다지만 내가 입은 부상은 몇 달간 안정을 취해야 할 정도로 컸기에 온종일 침대에 누워 있는 게 내 일과의 전부였다.
하지만 편하게 쉬어서인지, 아니면 칼리나가 지극정성으로 간호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몸은 빠르게 좋아졌고 한 달 정도 지나자 가볍게 움직일 정도가 됐다.
“괴물 같은 회복력이네.”
“누가 밤낮으로 울면서 간호해줘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
“그, 그때 빼고는 안 울었잖아!”
얼굴이 새빨개져서 항변하는 그녀의 모습이 제법 귀여웠기에 키특거리던 나는 그녀의 부축을 받은 채 정원을 거닐었다.
사람이 방안에만 처박혀 있다 보니 우을증에 걸릴 것 같았기에 이렇게 가끔 산책을 나와서 거닐었고 그녀는 그때마다 괜찮다는데도 날 부축해주었다.
“그나저나 내가 바쁜 사람 붙잡고 있는 게 아닐까 싶네.”
“그게 무슨 소리야?”
“솔직히 바쁘잖아?”
밀라노 백작이 죽고 밀라노가 병합된 지 이미 2주가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직까지 뒤처리에 골머리를 썩여야 했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는 꼬박꼬박 나를 찾아오고 있었다. 단적으로 말해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하루에 반 이상을 내 방에서 나와 함께 있었다.
“그런 얘기 하지 마. 내게 최우선 순위는 당신이니까.”
“밖에서 무슨 소문이 떠돌고 있는지 알아?”
이유야 어쨌건 외부에서 볼 때 그녀가 하루에 반 이상을 야만인 용병의 방에 들어가 있으면 절로 이상한 소문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소문들은 그녀에게 악영향만 끼칠 터였다.
“남들이 뭐라고 떠들던 그게 무슨 상관이야?”
별로 그 주제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지 않은 모양인지 칼리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난 뒤 그녀는 사랑을 고백하는 소녀처럼 라그나르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흐음…흠. 라그나르.”
“왜 그러지?”
“혹시 당신 결혼했어?”
“어때 보이는데?”
“못 했을 것 같은데? 애초에 당신을 감당할 수 있는 여자가 있을까?”
“하긴, 내게 좀 크긴 하지.”
내가 허리를 씰룩이며 천박한 농담을 하자 칼리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젠장. 예전에는 놀려먹는 재미라도 있었는데 이제는 내성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래서 어떤데?”
“글쎄…그건 비밀로 하자고.”
굳이 과거를 얘기하고 싶진 않았기에 적당히 얼버무렸는데 그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칼리나는 양 볼을 부풀리며 불퉁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흐음…뭐, 괜찮아. 남자들은 자기가 동정이라는 걸 얘기하기 껄끄러워하잖아? 나는 마음이 넓으니까 그 정도는 이해해 줄 수 있어.”
“하하, 들켜버렸네.”
넉살 좋게 웃어넘기는 그 말에 칼리나는 괜히 심술이 났다. 자신은 유니콘이 순결을 보증할 정도의 처녀였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눈앞의 라그나르는 경험이 많아 보였다.
자신이 모르는 라그나르의 모습을 누군가는 알고 있다는게 괜히 심통이 나서 되도 않는 허세를 부려 보았지만, 그는 다 알고 있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그런 불쌍한 당신을 내가 구원해줄 수 있는데…어떻게 생각해?”
최대한 섹시한 표정을 지으며 얘기해봤지만 그는 피식 웃더니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헝클며 웃어넘겼다.
“푸하하하, 꼬맹이 주제에 조숙하기는. 가슴 좀 더 커지고 오는 게 어때?”
“가, 가슴이 작긴 하지만 그래도 당신 말대로 고위 귀족이 됐잖아. 며칠 뒤면 황제가 변경백으로 임명해 준다고 했어. 그때는 당신이 얘기한 긍지 높고 고귀한 여귀족이 되니까….”
칼리나의 말에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던 라그나르는 손을 튕기며 가볍게 탄성을 내질렀다.
“혹시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한 얘기를 말하는 거야? 아니, 그건 그냥 하는 말이었지. 설마 그걸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네.”
“읏. 나는 틀림없이 당신이 그런 취향을 가진 줄 알고….”
“흐음, 내 취향에 맞춰주려고 했던 거야? 제법 기특한데?”
얼굴이 새빨개져서 대답하는 칼리나의 모습에 라그나르는 키득거리면서 그녀를 놀렸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그는 슬슬 자신이 떠날 때가 왔음을 느꼈다.
자신이 진정으로 이 아이를 아껴주고 위한다면 그녀의 곁을 떠나야 했다.
자신처럼 언제 죽을지 모르는 야만인 용병이 아닌, 진정으로 그녀를 아껴주고 사랑해 줄 수 있는 그런 남자를 만나야 했다. 그녀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그렇기에 라그나르는 그녀가 업무에 치여 곤히 잠들어 있는 새벽에 휘하의 용병들과 함께 길을 떠났다.
다행히 말을 탈 수 있을 정도로 몸 상태가 좋아졌기에 떠나는 데 큰 무리는 없었다. 물론 자신도 그녀와 헤어지는 건 아쉬웠지만 헤어짐이 영원한 이별을 뜻하는 바는 아니잖은가.
오딘께서 이 만남을 인도하셨듯이 언젠가 다시 그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반드시.
《게임속 바이킹이 되었다 205 완결》
<작가의 말>
이걸로 게임 속 바이킹이 되었다의 외전까지 전부 끝났습니다.
거진 반년이 넘는 긴 여정을 함께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글이 길어졌지만 그래도 생각했던 것들을 전부 풀어낼 수 있어서 다행이네요.
다음에는 더 재미있는 글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