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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바이킹이 되었다-204화 (204/205)

▣ 204화

“…오랜만이오. 칼리나 영애.”

칼리나의 인사에 녹초가 다 된 노인은 간신히 고개를 들어 그녀에게 인사했다.

따로 고문을 가하지는 않았지만 그와 같은 고령의 노인에게는 그저 감옥에 갇혀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문이나 다름없으리라.

애초에 그를 괴롭히는 건 육체적인 괴로움이 아니라 정신적인 괴로움이었다. 이유야 어찌 됐건 자신은 패배했고 눈앞에 서있는 건 자신을 원수로 생각하는 이였으니까.

“그래. 내가 당신을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당신은 절대 모를 거야.”

물론 저게 좋은 의미로 하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자작은 오히려 유쾌하게 받아쳤다.

“푸흐흐, 이 노인네에게 구애라도 하는 것이오? 쿨럭…아직 나도 안 죽었구만.”

“허세 부리기는. 뭐 그래도 난 그런 허세 싫어하지 않아. 그 오만한 콧대를 짓밟을 때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거든.”

말 한마디 한마디에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칼리나의 모습에 자작은 두 눈을 감고 한숨을 쉬더니 이내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내 아들내미는 진작에 죽어서 하느님의 곁으로 갔다지?”

“혹시 아들을 못 볼까 걱정인가? 그럴 필요 없어. 당신도 곧 아들을 보게 될 테니까. 어쩌면 돌아가신 당신 아버지도 보게 될지도 모르지.”

죽음을 확정 짓는 칼리나의 모습에 자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지만, 자신이 죽은 뒤 가문과 영지가 어떻게 될지는 너무 뻔했다.

“그래서 자작.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어?”

“남길 말이라…나와 내 아들의 피로써 이 증오의 연쇄를 끊을 생각은 없소?”

“내 아버지와 가족들이 살아있었다면 능히 그랬을 거야. 하지만 이젠 아니지. 핏값은 오로지 피로만 받을 수 있는 거야. 나도 아는 걸 노회한 당신이 모를 리가 없겠지?”

딱히 기대했던 바도 아니었는지 노인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핏값이 과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아마 칼리나에겐 그조차 모자랄 것이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는 마. 이대로 당신만 죽으면 억울하잖아? 당신을 비롯한 당신 가문의 사람들도 전부 만나게 해주지.”

“지독할 정도로 잔인하구려. 칼리나 영애.”

“현생에서 시궁창같이 사느니 하느님의 부름을 받아 가는 게 더 낫지 않겠어? 오히려 내 자비를 칭송해 마땅하지 않을까?”

네놈들을 전부 죽여버리겠다는 말을 정성스럽게 포장해서 이야기하는 칼리나의 모습에 자작은 입을 다물었다. 저 여자는 결코 자신들에게 자비를 베풀 생각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자비를 베풀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적어도 자신을 비롯해 가문의 일원 중 누구도 고문을 당하지 않았으니까.

물론 자작은 편안한 죽음을 원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녀가 자신들을 고문하기를 원했다.

이는 자신이 마조히스트라서가 아니라 그런 식으로 자신들의 처절하게 죽은 게 외부에 알려지면 그녀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 테니까.

“기억하시오. 오늘은 그대가 승리했지만, 그 승리가 영원하지는 않을 테니까.”

“마지막 유언치고는 꽤 비루하군. 패배한 개가 짖는 거라 그런가?”

비웃듯 자작을 바라보던 칼리나는 들고 있던 검으로 정확히 자작의 목을 꿰뚫었다. 안 그래도 기력이 쇠해있던 노인은 단말마와 함께 숨을 거뒀고 칼리나는 들고 있던 칼을 떨어뜨렸다.

칼리나는 다시 검을 줍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처음 해본 살인에 그녀의 손은 이미 스스로의 통제를 벗어날 정도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라그나르는 그녀의 손을 감싸 쥐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곳에 갇혀있는 이들의 숫자를 생각해볼 때 그녀가 전부 죽이는 건 불가능하리라.

그렇기에 라그나르는 그녀를 대신해 자신이 나서기로 했다. 그게 용병의 의무가 아니겠는가?

사실 본래라면 밖에서 공개 처형을 해야 했지만,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귀족이 귀족을 죽이는 건 금기로 여겨졌고 엄청난 비난을 받았기에 아직 기반이 불안정한 그녀에겐 굉장한 부담이었다.

그렇기에 죽일 때 죽이더라도 이런 식으로 몰래 죽인 뒤 명목상 행방불명으로 처리해야 했다. 비록 이게 눈 가리고 아웅에 불과할지라도 의심과 확신은 엄연히 다른 법이니까.

그렇게 라그나르의 손에 감옥에 있던 이들 모두가 하느님의 부름을 받게 되자 칼리나는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눈물이 원수를 갚은 것에 대한 기쁨인지, 아니면 죽은 자신의 아버지와 가족들에 대한 추모의 눈물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칼리나가 자신의 눈앞에서 울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없었기에 라그나르는 그녀에게 다가가 꼭 끌어안아 주었다.

“칼리나. 내가 너의 모든 빈자리를 채워주마. 그 자리가 아버지든 동료든 스승이든 어떤 자리든 간에.”

그 소리를 들은 칼리나는 더욱 더 소리 내어 울었고 라그나르는 말없이 그녀의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 * *

그다음 날, 칼리나는 어젯밤에 보인 추태에 대해 자책하고 있었다. 아무리 마음이 울적해졌다고 해도 라그나르의 앞에서 그렇게 아이처럼 펑펑 울다니…수치스러워서 죽을 것만 같았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라그나르가 자신을 위로하면서 했던 말은 그녀의 뇌리 속에 깊게 남아있었다. 분명 자신의 빈자리를 전부 채워준다고 했던가?

자신에게 있어 빈자리는 가족이었다. 그러니 어제 그가 했던 말은 자신과 가족을 이루자는 말이 아니었을까?

“칼리나…칼리나 로드브로크…음…어감이 나쁘지는 않은데….”

카노사라는 이름을 버리고 라그나로크라는 성을 붙이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고 그녀는 망상에서 퍼뜩 깨어나 정신을 차렸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노크를 해도 반응이 없어?”

“어, 어?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그보다 무슨 일이야 라그나르?”

그녀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대꾸했고 다행히 라그나르는 칼리나를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도 본론을 이야기했다.

“이제 슬슬 황제에게 지원 요청을 하려고.”

“황제? 프리드리히한테 지원을 요청한다고?”

칼리나가 탐탁지 않은 목소리로 대꾸하자 라그나르는 그녀의 맞은편에 있는 소파에 앉으며 대답했다.

“황제는 묘하게 북부 이탈리아에 집착하니 대충 충성맹세를 하면 도와주긴 할 거야. 직접 군사를 보내주지는 않아도 명분은 만들어주겠지.”

“힘이 동반되지 않은 명분은 허상에 불과해. 거기에 황제는 이전에 아버지의 지원 요청을 묵살했던 전적이 있는데 도와주겠어?”

“과거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닐걸? 그 누가 카노사와 투스카니의 지배자가 하는 말을 무시할 수 있겠어?”

라그나르의 말에 칼리나는 냉소를 지었다. 하긴, 아무리 황제가 북부 이탈리아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다 망해가는 가문의 지원 요청을 들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참 각박한 세상이네. 라그나르 당신도 내가 힘이 없으면 떠날 거야?”

“당연한 거 아니야?”

물론 칼리나는 저 말이 거짓말임을 알고 있었다. 애초에 그는 자신이 아무것도 없을 때 도와주지 않았던가. 솔직하지 못한 남자다. 물론 그 점이 또 매력적이었지만.

아무튼, 황제는 라그나르의 예상대로 칼리나의 충성맹세를 대가로 카노사 가문에 대한 지지를 천명했다.

그뿐 아니라 황제는 발데크 가문이 카노사 영지를 얻기 위해 뒤에서 갈등을 조장시키고 카노사 가문의 영주를 살해를 사주한 것에 대해 강력하게 비난했다.

그게 칼리나가 전쟁을 이길 거라 생각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단순히 밀라노의 발데크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건 전쟁을 할 명분은 충분했다.

거기에 암암리에 물자를 지원해주는 교황청의 도움을 받아 빠른 시간 안에 투스카니까지 안정시킨 칼리나는 곧바로 밀라노를 향해 영지전을 신청하며 선전포고했다.

이쯤 되면 서로 잃을 게 많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 마냥 지내기에는 이쪽이나 저쪽이나 쌓인 게 많았다.

거기에 칼리나 입장에서도 한번 기세를 탔으니 이 기세를 쭉 이어나가야 했다. 이쪽이 동원할 수 있는 카드는 한정되어 있는 반면 저쪽은 아니잖은가.

칼리나로서는 큰 모험이나 다름없었지만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에게 승리를 가져다줄 비장의 무기를 바라보며 물었다.

“라그나르. 이번에도 날 위해 승리를 가져다주겠어?”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 * *

며칠 뒤 칼리나는 물경 2천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밀라노로 진군했다.

이는 내부의 위협이 현존하는 상황에서 굉장히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밀라노 가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실제로 칼리나가 직접 총사령관으로서 전쟁에 참전한 것만으로 그녀가 이 전투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녀가 직접 칼을 뽑는 일은 없을 테지만 그래도 총사령관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병력들의 사기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런 칼리나의 도발에 발데크 가문의 영주도 그 노쇠한 몸을 끌고 전장에 나설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두 개의 군대는 대평원에서 서로를 마주했다.

다만 바로 전투가 벌어지지는 않았다. 상대측에서 대화를 요구하는 사절을 보냈고 칼리나 역시 상대와 할 이야기가 많았기에 승낙했기 때문이다.

“라그나르. 내 호위로 함께 해주겠어?”

“당연한 얘기를 하는군. 나 말고 누가 그 영광된 자리에 함께할 수 있겠어?”

내 말에 칼리나는 피식 웃었고 그렇게 나와 그녀는 말 위에 올라 정확히 중간에 처져있는 막사로 향했다. 회담 장소에는 발데크 가문의 영주가 앞서 도착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칼리나 영애. 아버지에게 약속 시간에 늦으면 안 된다고 배우지 못했던가?”

첫 대화부터 의도적으로 죽은 아버지의 이름을 꺼내며 비아냥거림은 물론이요 백작도 아닌 영애로 부르는 모습에 열이 뻗칠 만도 했지만 그동안의 경험 때문인지 칼리나는 넉살 좋게 대꾸했다.

“사람과 사람이 하는 약속이면 모르지만, 짐승 새끼랑 하는 약속에 일일이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잖아?”

그녀의 무례한 받아치기에 영주의 호위로 와있던 이의 손이 검 손잡이에 올라갔지만, 밀라노 백작은 손을 올리며 그를 만류한 뒤 그녀에게 와인을 권하며 물었다.

“그나저나 우리가 어쩌다가 이런 사이가 됐는지 모르겠군. 이랬거나 저랬거나 우리는 혼담이 오가던 사이 아니었나?”

“혼자 망상에 빠져있는 걸 그렇게 포장하는 재주도 놀랍네. 내가 당신 손자랑 나이가 비슷하지 아마?”

“사랑에 국경과 나이가 무슨 상관이던가? 그래서 하는 말인데…다시 나와 결혼을 할 생각은 없나? 그리하면 카노사와 투스카니는 그대의 영토로 놔두지. 물론 우리 간에 서로 해묵은 감정도 정리할 수 있고 말이야.”

밀라노 백작의 말에 칼리나는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는 쉬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자네와 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밀라노와 카노사, 투스카니를 아우르는 대 영지를 가지게 되는 거지.”

“어처구니가 없군.”

“남부에는 중부의 황제, 북부의 사자공처럼 강력한 구심점이 필요해. 그리고 그 구심점은 당연히 대도시 밀라노의 영주인 내가 되어야 하지 않겠나? 하다못해 내 자손이 되어야 하지.”

“하, 고작 네놈의 그 알량한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가문의 일원들이 희생된 건가?”

“말이 조금 이상하군. 그들을 죽인 건 내가 아니라 발리에르 가문일세. 그리고 자네는 직접 복수를 해줬지 않나? 그런 상황인데 우리 사이에 더 이상 남아있을 원한이 있나?”

“뻔뻔한 것도 능력이군. 내 반드시 네놈의 목을 베어서 아버지께 올려주마.”

“안타깝군. 말로 해결할 수 있는 걸 굳이 피를 보려 하다니.”

“뭐, 내 피가 흐르긴 했지. 여기 있는 이 친구한테.”

칼리나의 말에 백작의 시선이 내게 닿았고 이내 코웃음 치며 비아냥거렸다.

“하, 어디서 병력이 솟아났나 했더니 용병에게 가랑이라도 벌렸나 보군. 어차피 벌릴 거라면 내게 벌리는 게 더 나았을 텐데 말이야.”

“말했듯 난 수간 취미는 없어서 말이야.”

칼리나의 대꾸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밀라노 백작은 와인을 마저 들이킨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서로의 목적이 확고했기에 이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었다.

그렇게 둘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고 이내 전장을 뒤흔드는 나팔 소리와 함께 전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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