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화
“레이디 칼리나. 단장님께서 투스카니를 함락시키셨습니다.”
“허… 참… 어이가 없네.”
전령의 보고에 칼리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투스카니를 점령했다는 게 기쁘다기보다 ‘대체 어떻게’라는 의문이 먼저 들었다.
물론 라그나르가 투스카니를 점령할 방법을 말하긴 했었다. 하지만 입으로만 그럴듯하게 나불거리는 것과 결과물을 내오는 건 별개의 이야기 아니던가.
“그래서, 라그나르가 뭐라고 하던가?”
“단장님께서 주변의 정세를 물어보셨습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출진하기 전에 레이디 칼리나에게 직접 말씀드린 게 있다고 하더군요.”
전령의 답변에 칼리나는 팔짱을 낀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그가 떠나기 전에 말했던 걸 시행하며 정신없이 지냈고 나름의 성과를 얻어냈다.
“이게 말로 하기는 제법 긴데 편지를 써주겠네.”
그녀의 말에 전령은 굉장히 난처한 얼굴로 대답했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레이디 칼리나. 단장님께서는 글을 읽지 못하십니다.”
그 말에 칼리나는 멈칫했다. 사실 그녀는 편지 안에 자신의 사심을 일부 집어넣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가 직접 보지 못하면 누군가 읽어줄 게 아닌가? 그건 굉장히 부끄러운 일이었기에 한숨을 내쉬며 눈앞의 전령에게 공적인 얘기만 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말로 전할 테니 전달해주게. 일단 카노사를 안정시키는 데는 성공했네. 자네도 이곳에 오면서 느꼈겠지만 굉장히 안정되어 있지 않던가?”
“예. 그런 것 같더군요.”
“하위 귀족들도 그가 얘기한 대로 접수했네. 그 빌어먹을 개새… 크흠. 아무튼, 그들은 내게 충성을 맹세했고 그들의 힘을 이용한다면 밀라노의 공격을 막아내기에 충분할 걸세.”
사실 자신이 먼저 그들에게 손을 내밀 것도 없었다. 그 박쥐 같은 놈들은 자신이 카노사를 접수하자마자 어떻게 그 소식을 들었는지 선물을 바리바리 싸 들고 찾아와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들을 보면 가관이었는데 말의 구성은 다를지언정 그 뜻은 하나같이 일맥상통했다.
그 배신자들이 하는 말의 요점은 ‘자신은 선대 영주님을 배신한 게 아니다.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전투였고 백작님께서 운명하셨기에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라는 거였다.
그 말에 그러면 왜 자신을 도와주지 않았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녀는 간신히 눌러 담았다. 백작이란 자리는 자신 마음대로 뻗댈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자신이 사자공처럼 황제를 위협할 수 있을 정도로 세력이 큰 영주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아직 밀라노의 위협이 남아있었다.
거기에 라그나르가 투스카니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일단은 저들과 제대로 된 관계를 구축해야 했다.
그렇기에 칼리나는 오히려 그들의 충성을 칭송하며 대인배스럽게 그들을 받아들였다. 아무리 자신이 정치적 감각이 없다고 해도 그들까지 적으로 돌리면 곤란하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제노바는 안타깝게도 중립을 지키겠다고 하더군. 다만….”
사실 칼리나는 제노바가 중립만 지켜줘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생각이 어떻건 제노바 입장에서 보자면 밀라노와의 분란을 감수하고 지켜줬는데 몰래 빠져나가서 홀라당 카노사를 먹어버린 셈이니까.
분명 자신을 괘씸하게 생각할 테지만 그들은 상인답게 신중하게 나왔다. 아마 단 하루 만에 카노사를 먹은 게 유효했겠지.
자신이 어떤 비장의 카드를 들고 있는지 모르니 이쪽의 카드 패를 확인하기 전까지 제노바는 조심스럽게 나올 것이다.
만약 라그나르가 투스카니까지 먹는다면 병력의 지원은 무리여도 물자 같은 건 암암리에 지원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건, 다시 한번 편지를 보내봐야겠군.
“백작님?”
자신이 말을 하다 중간에 멈추자 전령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칼리나는 작게 헛기침하며 사과했다.
“아, 미안하네. 잠시 생각을 정리하느라 그랬네. 아무튼, 현재까지는 제노바가 중립을 지키고 있지만, 라그나르가 투스카니를 점령했으니 어떤 식으로든 제노바와의 관계도 변화할 걸세.”
“알겠습니다. 카노사의 안정, 하위 귀족들의 접수, 제노바와의 관계. 이렇게 세 가지를 전해드리면 되겠습니까?”
“거기에 한 가지 더 추가하게. 신이 우리의 방파제가 되어줄 거라고.”
라그나르는 제노바가 거절할 경우 교황에게 부탁해보라고 조언했다. 사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교황청에 중재를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얘기였지만 카노사 가문은 그게 가능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하인리히 4세는 당시 교황이었던 그레고리오 7세에게 제발 파문을 취소해달라고 빌었던 사건이 있었다.
이는 후대에 ‘카노사의 굴욕’이라고 이름 붙여졌는데, 카노사라는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이 사건은 카노사에서 일어났고 그 당시 카노사의 영주는 ‘마틸데 디 카노사’ 여백작이었다.
그녀는 교황을 직접 보호해줄 것을 천명했고 실제로 하인리히 4세로부터 교황을 보호해주었다.
당시 황제였던 하인리히 4세가 굉장히 뛰어났으며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걸 생각해보면 카노사 여백작은 나름대로 승부수를 던진 셈이었다.
물론 그 이후 그레고리오 7세가 삽질을 하긴 했지만 어쨌건 이 사건 이후로 카노사 가문은 교황청과 꽤 돈독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물론 칼리나가 생각할 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 싶었다. 결국, 자신의 가문이 무너지고 영지가 불타오르자 교황청도 못 본 척 눈을 돌려버렸는데.
지금 와서 지원을 요청한들 그들이 콧방귀나 뀔까 싶었지만, 라그나르는 고개를 저으며 자신을 설득했다. 그가 말하기를 ‘그때는 명분이 부족했지만 지금은 아니다’라고 했던가?
사실 따지고 보면 교황청도 억울한 게, 그 사건을 듣고 개입하려고 하자 영주가 죽고 카노사가 점령당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미 끝난 상황에 끼어들기도 뭐하고 칼리나를 도와줘봤자 얻을 게 없었기에 그저 침묵으로 일관한 것뿐이겠지.
하지만 이제 라그나르의 말마따나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자신은 다시 카노사를 되찾아 카노사의 여백작이 되었고 정식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그레고리오 7세의 지원에 기꺼이 응한 선대의 여백작의 의리를 고작 백 년의 시간이 지났다고 헌신짝처럼 내던진다? 이는 교황청에게 씻을 수 없는 불명예를 줄 터였다.
결국. 그들은 라그나르의 생각대로 자신과 밀라노 백작의 사이를 중재하기로 해줬다.
물론 교황청 소속의 성기사들을 보내주는 게 아니라 적당히 주교를 파견해 혓바닥만 나불거릴 테지만, 당장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냥 그렇게 전해주면 알 걸세.”
전령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는 말의 전달이었지 판단이 아니었으니까.
“라그나르가 전한 말은 이게 전부인가?”
“아닙니다. 만약 카노사가 안정됐다면 단장님께서 전리품과 포로들을 끌고 이곳으로 온다고 하셨습니다.”
“라그나르가 투스카니를 비우는 것보단 내가 가는 게 더 낫지 않겠나?”
“그 부분은 제가 판단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긴, 전령은 말을 전하는 자였지 판단을 하는 자리는 아니었다. 애초에 그건 전권대사지 전령이 아니잖은가.
“그나저나 현 투스카니는 어떤 상황이지? 본 백작이 라그나르를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사람에게는 각자 잘하는 능력이 다르지 않던가?”
라그나르의 심계가 굉장히 뛰어나고 허를 찌르는 책략을 조언해주긴 했지만, 옆에서 보좌를 하는 것과 전면에 나서는 것과는 천지 차이였다.
참모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있고, 장군의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있고, 영주의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있지 않던가?
물론 그녀는 최대한 자신의 말이 라그나르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전달되기를 바랐기에 최대한 말을 고르며 이야기했다.
자신이 몇 달간, 온 힘을 다해도 하지 못했던 일을 라그나르는 고작 하루 만에 하지 않았던가? 거기에 원수까지 처단할 수 있게 해줬으니 그의 능력은 의심할 바가 없었다.
물론 용병들은 받은 만큼 일한다지만, 라그나르가 이룬 업적에 비해 자신이 내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설사 자신의 몸을 내어준다 한들 그 대가를 치를 수는 없으리라.
그렇기에 칼리나는 이성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그를 반드시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성적으로는 당연히 그의 능력이 뛰어남은 물론 그 이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이가 없기에 반드시 잡아야 했다. 능력은 뛰어나도 상대를 믿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거기에 자신은 스스로도 알 수 있을 만큼 이미 라그나르에게 빠져있었다. 이미 호감의 영역을 넘어 애정의 수치까지 가 있지 않을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락까지 끌려 내려갔던 십 대 소녀에게 라그나르는 백마 탄 왕자님이자 구원 그 자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단장님께서 푹 쉬어두라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자신의 역할이었지만 이후부터는 레이디 칼리나의 영역이라고 하셨습니다.”
하긴 정치적으로 자신을 조언해줄지언정 직접 무대에 나서는 건 자신이어야 했다. 카노사의 정당한 계승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알겠네. 내 이곳 일을 마무리하는 대로 투스카니로 찾아가도록 하지. 대충 일주일 뒤에 도착한다고 전해 주게.”
그렇게 전령을 보낸 뒤로 라그나르를 하루빨리 만나기 위해 칼리나는 미친 듯이 안정화 작업에 들어갔다.
그게 빛을 발했는지 밀라노 백작은 카노사는 물론이고 투스카니의 함락 소식까지 들었는데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하다못해 감옥에 들어가 있는 발리에르 가문의 일원들이라도 살려달라 청원할 줄 알았건만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뭐, 사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갈피도 못 잡았을 테고 교황까지 나서서 중재를 하니 어쩔 수 없었겠지.
다만 그렇다고 해도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는 건 위험했기에 칼리나는 기병 십여 기만 끌고 투스카니로 향했다.
말들을 혹사시킨 보람이 있는지 사흘 만에 투스카니에 도착한 칼리나는 자신을 마중 나오는 라그나르를 볼 수 있었다.
“오랜만이야 라그나르.”
“그러게. 열흘 만이던가? 제법 얼굴이 좋아졌는걸?”
“당신 덕에 일생의 소원을 이뤘으니 당연한 거겠지. 혹시 어디 다친 곳은 없어?”
듣기로 그는 최전선에서 직접 적들과 맞서 싸웠다고 했다. 보기에 상처는 없어 보였지만 옷 안에 감춰진 틈까지는 볼 수 없기에 칼리나는 걱정과 염려를 담아 물었다.
“보다시피. 아마 행운의 여신이 해 준 키스가 유효했던 모양이야.”
장난스레 대꾸하는 라그나르의 말에 칼리나는 얼굴이 새빨개지는 걸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고 말머리를 나란히 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그 빌어먹을 새끼들은 어디에 있지?”
그 빌어먹을 새끼가 발리에르 가문의 일원들을 뜻하는 걸 깨달은 라그나르는 곧바로 대답했다.
“발리에르 가문의 장남을 제외하고는 전부 다 지하 감옥에 가둬놨어.”
“그 개자식들이 전부 지하 감옥에 처박혀 있다니 그것 참 기대되는 광경이네. 얌전히 있어?”
“처음에는 반항했는데 몇 번 두들겨 패주니 얌전해지더라고.”
슬쩍 주먹을 흔들며 얘기하는 라그나르의 모습에 그녀는 새삼스레 그가 야만인임을 느꼈다. 아무리 용병이라지만 저런 식으로 귀족을 대하는 용병이 어디 있단 말인가.
“바로 처리할 거야?”
“미뤄둬서 좋을 건 없겠지. 원래 후환은 깔끔하게 제거해야 하잖아?”
라그나르 역시 칼리나의 말에 십분 동조하는 바였기에 곧바로 그녀를 데리고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지하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칼리나를 덮쳤지만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얌전히 라그나르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내려가자 감옥에 갇혀있는 이들의 인영이 보였고 횃불을 통해 안에 갇혀있는 이들을 확인한 칼리나의 눈에 희열이 맺혔다.
그녀는 상대를 확인하자 곧바로 허리춤에 있는 검을 뽑아 들었고 그런 그녀를 라그나르는 조용히 지켜보았다.
어쨌거나 복수의 주체는 그녀였고 스스로 피를 묻히고자 한다면 마땅히 그녀의 의견을 존중해줘야 했다.
허나 당장 검을 휘둘러 죽일 거라는 생각과는 다르게 그녀는 차가운 눈빛으로 눈앞의 노인을 바라보며 분노 섞인 어조로 말을 건넸다.
“오랜만이야. 발리에르 자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