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화
“출발하지.”
라그나르의 명령에 거진 60명에 달하는 인원이 카노사를 향해 행군했다.
칼리나와 라그나르가 제노바에서 볼로냐까지 오면서 개고생을 한 것과 다르게 카노사까지는 채 80km도 안 됐기에 집단이라고 해도 사나흘이면 충분히 이동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렇게 사흘째 되는 날 저녁. 카노사와의 거리를 5km 정도 앞둔 라그나르는 일부러 병력들을 사람들의 눈이 닿지 않는 숲에 숨겨두었다.
이번 공성전의 핵심은 요인 암살이다. 굳이 병력들을 적들에게 노출해서 좋을 건 없었다.
물론 숲에서 노숙을 하는 게 달가울 리 없으니 볼멘소리가 나왔지만, 카노사를 공략한 뒤 재물을 약속하자 그런 불만은 금세 수그러들었다.
“부관. 나를 비롯한 별동대가 잠입할 테니 이곳에서 저녁을 먹고 휴식을 취한 뒤 새벽 2시쯤에 공성을 진행하게.”
“알겠습니다.”
미리 몇 번이고 얘기한 작전이었지만 만일을 위해서 나는 한 번 더 얘기했다.
“칼리나. 중요한 건 네가 앞으로 나서는 거야. 카노사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진정한 카노사의 주인이 돌아왔음을 당당하게 선포해. 무슨 말인지 알았지?”
“물론이야.”
“그래. 너라면 잘할 거야.”
라그나르가 칼리나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고 칼리나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굳이 그 손길을 쳐내지 않았다.
아마 며칠 전의 자신이 이 모습을 보았다면 귀족의 긍지를 내버렸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지 않을까?
“좋아. 깔끔하게 성공하고 아침은 영주성 안에서 우아하게 먹자고.”
그렇게 라그나르가 떠나고 나자 혼자 남은 칼리나는 문득 외로움을 느꼈다. 생각해보면 최근 며칠간은 라그나르와 단둘이서만 지냈었기에 그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새벽이 밝아오기 전에 다시 볼 수 있겠지?”
하지만 그녀 스스로 말을 하면서도 울적함을 숨길 수는 없었다. 사실 그는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는 것마냥 쉽게 얘기했지만 영주를 암살하는 게 만만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게 쉬웠다면 밀라노와 투스카니에서 진작에 아버지를 암살하고 도와주는 체하면서 영지를 처먹었겠지.
만약 라그나르가 실패하면 어떻게 하지? 그는 말로는 자신을 팔고 도망치니 어쩌니 얘기하지만, 며칠간 본 그의 행동거지를 가늠해봤을 때 그럴 인물은 아니었다.
“무사히 돌아왔으면 좋겠는데….”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던 그녀는 문득 자신의 머릿속이 온통 라그나르에 관한 생각으로 점철된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고개를 내저으며 이 감정은 단순히 믿음직스러운 동료에 대한 걱정과 노파심이라 여기기로 했다.
실제로 자신은 라그나르에게 모든 것을 걸었고 그가 실패한다면 더 이상의 미래는 없었다. 당장 제노바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도망치지 않았던가.
거기에 자신은 카노사 가문의 마지막 남은 정당한 후계자다. 이전보다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선 당연히 그에 걸맞은 이를 만나야 했다.
물론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신이 스스로 높은 자리에 올라간다면 상관없는 얘기였다. 거기에 자신이 눈치를 볼 이들은 전부 죽지 않았던가.
만약 라그나르가 자신을 받쳐준다면….
“레이디 칼리나.”
그런 칼리나의 상념을 깨운 건 레이븐 용병단의 부관이었다. 망상에 빠져있다 보니 그가 오는 것을 깨닫지 못했지만 그녀는 표정을 다잡으며 오만한 어조로 대답했다.
“무슨 일이지?”
생각해보면 자신이 이런 위엄 있는 목소리와 말투를 사용한 건 어린 여자라고 얕잡아 보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라그나르와 대화할 때는 어느새 부드럽게 말을 놓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정도로 라그나르에게 마음을 터놓고 있었을 줄이야. 스스로 생각해도 굉장히 쉬운 여자라고 통탄하며 부관의 대답을 기다렸다.
“주무시고 계시면 저희가 이동하기 30분 전에 깨워드리겠습니다.”
“부탁하지.”
“그리고 실례지만 혹시 승마는 가능하십니까?”
“승마는 귀족의 소양이지. 어디 가서 욕먹지 않을 정도는 된다.”
“알겠습니다. 야간에 말을 타는 건 주간과는 많이 다르니 유의해 주십시오.”
말을 마친 부관은 예를 표하며 물러났고 칼리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라그나르야 자신을 도와준다고 했지만 그 밑에 있는 놈들이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라그나르까지 자리를 비운 상황이 아니던가. 막말로 자신을 납치한 뒤 잠적해버리면 어디에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다만 하는 걸 보니 라그나르와 자신을 배신할 낌새는 아니었기에 일단은 마음을 놓기로 했다.
물론 그렇다고 아예 마음을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아무래도 오늘 밤은 자지 않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할 듯싶다.
하지만 눈꺼풀을 이기는 사람 없다고 하던가? 야심 차게 밤을 새우겠다고 다짐했지만, 그간의 피로가 몰려와서 그런지 자신은 깜빡 잠들었고 그런 자신을 깨운 건 부관의 목소리였다.
“레이디 칼리나. 시간이 됐습니다.”
그제야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난 칼리나는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상황을 파악했다. 침대의 이불이 흐트러져 있는 걸 보니 앉아서 졸다가 잠이 든 모양이었다.
다만 자세가 안 좋았는지 몸 여기저기가 쑤셔왔지만 잠에서 깨기 위해선 이 정도의 통증이 딱 필요하던 참이었다.
막사 안에서 가벼운 복장으로 옷을 갈아입은 칼리나가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용병들은 캠프를 철수한 채 이동할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말에 오르시지요.”
부관의 에스코트를 받아 말 위에 오른 칼리나는 앞서 나가는 행렬을 뒤따랐다.
부관의 말대로 새벽에 말을 타고 이동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칼리나는 복수라는 일념 하나로 앞 사람의 뒤를 묵묵히 따라갔다.
그렇게 약속 시간 안에 도착한 용병단은 잠깐의 휴식을 취한 뒤 곧바로 카노사 성을 향해 진군했고 부관은 라그나르에게 신호를 보내기 위해 허리춤에 매달려있는 뿔나팔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제지한 건 칼리나였다. 그녀는 긴장한 표정으로 부관을 바라보며 물었다.
“부관. 내가 적들에게 선전포고를 해도 되겠나?”
그 말에 부관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물러나 고개를 숙였다.
“고귀하신 분께서 원하시는 대로.”
부관이 자리를 비켜주자 칼리나는 긴장된 표정으로 말 위에 오른 채 카노사 성을 바라보았다. 다시는 못 볼 거라 생각한 성을 마주하자 온갖 감정이 북받쳤지만, 그녀는 그 감정을 눌러 담았다.
아무리 야밤이라지만 이 이상 시간을 끌면 적들에게 들킬 게 뻔했기에 칼리나는 폐 속 깊숙이 숨을 들이마신 뒤 있는 힘껏 소리쳤다.
“자랑스러운 카노사의 백성들이여! 그대들의 진정한 지배자가 지금 여기에 돌아왔노라!!”
부우우우우우웅!!!!
그녀의 외침이 끝나자마자 부관은 곧바로 뿔피리를 불었고 그 신호만을 기다리고 있던 용병 단원들은 괴성을 내지르며 성벽을 향해 달려갔다.
“저, 적습이다!!!”
“다른 녀석들을 전부 깨워!”
수많은 이들의 야밤에 괴성과 함께 달려오는 이유는 뻔했기에 성벽 위에 서 있던 경비병들은 기겁하며 미친 듯이 종을 때렸다.
“돌격! 성벽을 넘어라!!”
그런 그들을 몰아붙이듯 부관은 능숙하게 병력들을 지휘했다. 물론 외치는 말과는 정반대로 병력들이 들고 있는 장비는 공성을 위한 장비가 아니었다.
오직 방패와 활뿐이었고 그마저도 화살은 이게 정말 살상력이 있는가 싶을 정도로 조잡했다.
누가 봐도 의도가 명확했지만 갑작스러운 기습에 정신이 없는 이들이 그 진의를 꿰뚫어 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거기에 방패 벽에 둘러싸인 채 화가 난 듯 소리치고 있는 인물도 수비병들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드는 데 한몫했다.
“이 무엄한 녀석들! 네놈들이 지금 누구에게 창과 활을 겨누는지 알고 있느냐!? 나는 칼리나 디 카노사! 카노사의 정당한 지배자이니라!”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익숙한 목소리였기에 병사들은 화살을 날리는 데 심리적으로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카노사의 영주가 실정을 펼친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선정을 펼친 데다 그가 어떤 식으로 최후를 맞이했는지 다들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발리에르 가문의 실정이었다. 폭정을 펼치며 카노사를 쥐어짜듯 긁어가는 영주를 위해 진심으로 충성을 바치는 이들은 없었다.
“이 멍청한 놈들!! 카노사 가문은 멸문했다! 저딴 계집애가 내뱉는 소리에 휘둘리지 마라! 당장 화살을 쏴서 저놈들이 성벽을 넘지 못하게 해!”
경비대장으로 보이는 듯한 이가 고래고래 소리쳤지만, 확실히 이전에 비하면 공격이 드세지는 않았다. 거기에 실제로 병력들이 성을 넘을 생각이 없었기에 공성은 지지부진하게 흘러갔다.
그렇게 30분 정도 지나자 적들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적들의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해 조금 더 공세를 강화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저 안에서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투는 끝났다! 네놈들의 영주를 살리고 싶으면 전부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해라!”
전장을 뒤흔드는 라그나르의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고 진짜 자신들의 영주가 웬 괴한에게 사로잡혀 있는 걸 확인한 병사들의 눈에 당황스러운 빛이 스쳤다.
얼마나 얻어맞았는지 얼굴이 떡이 되긴 했지만, 인질로 붙잡혀 있는 사내는 자신들의 영주였기 때문이다.
“뭐, 뭐 하는 거야!? 말 안 들려? 빨리 무기를 내려놔!”
안 그래도 전 영주의 딸이었던 칼리나에게 무기를 겨누는 게 부담스러웠던 수비 병력들은 영주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곧바로 무기를 내던졌다.
“거기 너. 지금 당장 성문을 열어.”
라그나르의 지목에 엉거주춤 서 있던 수비병이 성문을 열기 위해 움직이자 옆에 서 있던 경비대장이 라그나르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안 돼! 성문을 열지 마! 명령이다! 이대로 성문을 열면 우리 전부… 컥!”
잘난 듯이 말을 내뱉던 경비대장의 가슴팍에서는 어느새 기다란 칼날이 삐쭉 튀어나와 있었고 그는 제대로 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숨을 거뒀다.
그렇게 경비대장을 죽인 용병은 어깨를 으쓱이며 수비병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마지막 항전 의지를 지닌 이까지 쓰러지자 굳게 닫혔던 성문이 활짝 열렸다.
내부의 사정을 알 리가 없던 칼리나는 성문이 열리자마자 병력을 끌고 들어왔고 이내 인질로 잡혀있는 영주와 무사한 모습의 라그나르를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몸은 괜찮아?”
“뭐 보시다시피. 사실 나보단 이쪽이 문제지.”
라그나르는 붙들고 있던 영주를 바닥에 내동댕이쳤고 안 그래도 반쯤 묵사발이 되어있던 영주는 고통에 가득 찬 신음 소리를 내며 윽박질렀다.
“크윽… 쿨럭… 네놈들… 감히 내가 누구인지 알고….”
“쯧쯧. 이 지경이 돼도 정신을 못 차리는군. 칼리나. 혹시 아는 사람이야?”
하도 얼굴이 떡이 돼서 그런지 눈살을 찌푸리며 바라보던 칼리나는 혀를 차며 대답했다.
“발리에르 가문의 장남이야.”
“그래? 이거 생각보다 월척을 건졌군.”
“근데 왜 안 죽였어? 혹시 나한테 원수를 갚을 기회를 주려고 그런 거야?”
칼리나가 살벌한 얼굴로 칼을 뽑아 들고 자신에게 다가오자 발리에르 가문의 장남은 기겁해서 소리쳤다.
“이, 이게 무슨 짓이오. 칼리나 영애?”
“무슨 짓이긴? 가문의 원수를 갚는 중이지.”
“이, 이 일을 아버지께서 아시면….”
“걱정할 것 없어. 먼저 가 있으면 네 애비와 네 가문의 일원들 전부 사이좋게 목 없는 귀신으로 만들어줄 테니까.”
칼리나는 본인이 내뱉은 말을 지키려는지 칼을 치켜들었지만, 라그나르가 손을 뻗으며 그녀를 만류했다.
“아, 지금은 죽이지 마. 나중에 따로 써야 될 때가 있거든.”
라그나르의 만류에 칼리나는 이를 갈더니 그대로 사내의 사타구니를 걷어찼고 발리에르 가문의 장남은 비명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거품을 물며 기절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라그나르는 재밌다는 듯 박수까지 치며 키득거렸다.
“휘유~ 제법 터프한데?”
“아부는 됐어. 그나저나 저 녀석을 쓰겠다는 건 무슨 말이야? 설마 살려준다는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니니까 눈에 힘 좀 풀어. 일단 자세한 얘기를 하기 전에… 부관. 지금 즉시 성문을 다 닫고 주민들을 통제하게.”
“주민들은 왜? 이런 때일수록 다독여야 되는 거 아니야?”
“원래라면 그게 맞지만 지금은 아니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밀라노에 이 소식이 전해지는 걸 늦춰야 돼. 만약 우리가 카노사를 탈환한 소식이 전해지면 발데크 가문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병력을 끌고 이곳까지 올 거야.”
라그나르의 말에 칼리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이 소식을 들은 밀라노에서 병력을 끌고 오면 순식간에 무너질 터였다.
“젠장. 산 넘어 산이네. 따로 생각해 둔 방법은 있어?”
칼리나의 물음에 라그나르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이대로 여세를 몰아 투스카니까지 점령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