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화
처음에는 도망친다고 해서 어떻게 도망치는 걸까 궁금했는데 눈앞의 사내는 생각보다 미친놈이었다.
갑자기 자신을 끌고 성벽까지 가더니 품속에서 갈고리가 달린 로프를 꺼내는 모습에 칼리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뭐 하긴, 여길 탈출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 아니오?”
“그러니까 지금 그걸로 성벽을 올라가겠다는 거야?”
당연한 것 아니냐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라그나르의 모습에 칼리나는 말문이 막혔다. 이 사람과 대화를 하고 있자니 괜스레 자신이 바보가 되는 기분이었다.
“이 야밤에 그런 멍청한 짓을 하겠다고? 들키면 곧바로 고슴도치가 될 텐데?”
“그럼 다른 방법 있소? 여긴 제법 경계가 삼엄한 곳이라 개구멍 따위는 없소. 아마 지하에 있는 시설에도 경비병들이 있겠지.”
“그렇다고 성벽을 넘는 발상은 대체 어디서 나온 거야?”
칼리나의 말에 라그나르는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손가락을 튕기며 대답했다.
“바로 그 점을 찌르는 거요. 아가씨라면 어떤 미친놈이 성벽을 넘는다고 생각하겠소?”
“으음, 그렇게 얘기하니까 또 그럴 법하긴 한데….”
“더 좋은 생각이 있다면 따르리다. 하지만 없다면 내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거요. 앞으로 10분 안에 경계병들이 이곳으로 올 테니까.”
라그나르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칼리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녀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이곳을 탈출할 뾰족한 수는 없었으니까.
“알겠어. 당신 말대로 할게.”
그녀의 승낙에 라그나르는 갈고리가 연결된 밧줄을 꺼내 몇 번 돌리며 감을 잡더니 성벽 위에 난 턱을 향해 힘껏 던졌다.
시원한 밤공기를 가르며 날아간 갈고리는 정확히 성벽의 턱에 걸렸고 몇 번 당겨봐서 단단히 걸렸나 확인한 라그나르는 곧바로 줄을 붙잡고 단숨에 성벽을 올랐다.
“이제 아가씨 차례요. 내가 끌어 올려 줄 테니 줄을 꼭 붙잡으시오.”
육중한 몸과는 별개로 날다람쥐마냥 올라가는 라그나르를 멍하니 바라보던 칼리나는 그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알겠어. 그냥 붙잡고만 있으면 되지?”
“내가 끌어 올려 줄 테니 그냥 눈 감고 꽉 붙들고만 있으면 되오.”
라그나르의 말에 칼리나는 밧줄을 부여잡은 뒤 두 눈을 질끈 감았고 라그나르는 천천히 줄을 당기며 그녀를 끌어 올렸다.
자신의 몸이 허공에 체류하는 게 느껴지자 칼리나에게서 작은 비명 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주변에 있는 경비들을 끌어올 정도는 아니었기에 라그나르는 묵묵히 밧줄을 끌어당겼다.
그렇게 칼리나에게는 지옥과도 같았을 시간이 지나자 라그나르는 그녀를 무사히 성벽 위로 끌어 올릴 수 있었다.
“으으, 두 번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야.”
“안타깝지만 그 경험을 한 번 더 해야 할 것 같소.”
올라왔다면 또 내려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 말뜻을 깨달은 칼리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무섭다고 계속 여기에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줄을 회수한 라그나르는 이번에는 반대쪽에 갈고리를 빼고 로프만으로 고정한 뒤 살짝 무릎을 굽히며 얘기했다.
“업히시오.”
사실 본래라면 올라올 때도 자신이 업고 올라올까 생각해봤지만, 높이가 7m나 되는 데다 줄이 두 사람의 무게를 견딜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렇기에 천생 올라오는 건 따로 왔지만 내려가는 건 함께 갈 수밖에 없었다. 중간에 줄이 끊어져도 3~4m 정도라면 발이 접질리는 선에서 끝나지 않겠는가.
“어?”
“업히는 게 뭔지 모르시오?”
“아니, 그건 아는데 갑자기 왜….”
“여길 혼자서 내려갈 수 있소?”
그 질문에 칼리나는 조심스럽게 발을 옮겨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았고 이내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밤이라서 그런지 꼭 지옥의 밑바닥을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시간이 없소. 서두르시오.”
라그나르가 한 번 더 재촉했지만, 외간 남자의 등에 선뜻 업히는 게 부끄러웠던 칼리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이내 두 눈을 딱 감고 라그나르의 등에 업혔다.
“꽉 잡으시오. 원래 사람을 업을 때는 업는 사람이 업히는 사람을 받쳐줘야 되는데 줄을 타고 내려가야 해서 그건 불가능하니까.”
그 말에 칼리나는 라그나르의 목을 조르는 것마냥 꽉 끌어안았고 라그나르는 히죽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그러고 보니 아가씨께서는 옷을 입으면 말라 보이는 모양이구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아가씨 가슴이 제법 크단 말이오.”
“읏… 다, 당신 죽여버릴 거야.”
그제야 자신이 가슴으로 그의 등을 짓누르고 있는 걸 깨달은 칼리나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대꾸했고 라그나르는 키득거렸다.
“그건 좀 봐주시오. 난 이왕지사 죽을 거라면 전쟁터에서 죽어야 하거든.”
“전쟁터?”
“그렇소. 나와 같은 바이킹들은 언제나 전쟁터에서 싸우다 죽길 원하지. 그래야 발할라로 갈 수 있거든.”
“그곳이 천국 같은 곳이야?”
“당신들이 이야기하는 천국과는 다르지만 큰 틀에서 보면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거요.”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성벽 아래에 다다른 라그나르는 그녀를 바닥에 내려놓은 뒤 묶어놓았던 로프를 회수했다.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은 도망칩시다. 아가씨가 사라진 걸 알면 저쪽에서도 난리가 날 테니까.”
힘들게 도망쳤는데 다시 새장 안으로 끌려 들어가고 싶지 않았던 칼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라그나르와 함께 어둠 저편으로 달려 나갔다.
* * *
제노바에서 탈출한 라그나르는 칼리나를 데리고 계속 서쪽으로 향했고 나흘 만에 합류하기로 약속했던 볼로냐 인근까지 올 수 있었다.
“고생 많았소. 그래서, 노숙에 대한 감상은 어떻소?”
“두 번 다시 못 할 짓이야.”
사실 칼리나는 노숙을 처음 해본 건 아니었다. 카노사에서 도망쳐 제노바로 갈 때 노숙을 하긴 했었는데 문제는 그때와 지금의 간극이 천지 차이였다는 점이었다.
우선 그때는 호위를 해주던 병사들도 있었기에 자다 깨서 불침번을 설 일도 없었고 무엇보다 식사의 질도 비교를 불허했다.
꽤 많은 수의 시종들이 있었기에 길바닥에서도 그럭저럭 먹을 만한 음식들이 나왔고 잠자리도 나쁘지 않았지만, 라그나르와 함께 한 노숙은 밑바닥 체험을 톡톡히 했다.
우선, 제노바의 추적자들을 피하기 위해서 길이 아닌 산을 타고 이동했기에 체력 저하가 심각했고 제대로 씻을 수조차 없었다.
식사는 말 그대로 살기 위해 먹는 것에 불과했으며 잠자리 또한 휴식이 아니라 다음 날 몸을 움직이기 위한 행위에 불과했다.
그나마 그마저도 라그나르 없이 자신 혼자였다면 얼마나 끔찍한 시간을 보내야 했을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아마 불을 못 피워서 저체온증에 걸리거나,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이상한 걸 주워 먹고 산속 깊은 곳에서 쓸쓸하게 죽어갔겠지.
“아무튼, 고생하셨소. 이제 곧 볼로냐에 들어갈 텐데 그 전에 사람답게 정비 좀 합시다.”
거울이 없어서 자신의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라그나르의 상태만 봐도 자신의 몰골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 마을에 가도 되는 건가?”
“설마 여기까지 쫓아오지는 않겠지. 최대한 추적 당하지 않게 산길을 타고 흔적도 남기지 않았는데도 붙잡히면 운명인가보다 하고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
딴에는 또 그렇다며 피식 웃은 칼리나는 라그나르를 따라 이름 모를 마을로 들어갔다.
그들은 처음 보는 외지인들에게 배타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라그나르가 은화 몇 닢과 함께 한 끼 식사와 목욕, 그리고 잠자리를 부탁하자 활짝 미소 지으며 자신들을 맞아주었다.
그렇게 나흘 만에 따뜻한 물에서 목욕을 마치고 나온 칼리나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미소 지으며 맞은편에 앉았다.
“하아, 일상의 소중함을 이런 식으로 느낄 줄은 몰랐네.”
“솔직히 중간에 퍼질 줄 알았는데 끝까지 따라올 줄은 몰랐소.”
“내가 당신을 따라가겠다고 했으니 악으로 깡으로 버텨야 하지 않겠어?”
“마음가짐은 되어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오. 아무튼, 먹으면서 들으시오.”
라그나르는 빵 한 조각을 찢은 뒤 스프에 적시며 이야기했다.
“볼로냐에는 내 휘하 용병들이 모여있소. 다만 최근에 모집한 놈들도 있다 보니 그대의 정체는 최대한 숨길 생각이오.”
“남장이라도 하라고?”
“하, 설마 익숙하지도 않은 남장을 한다고 속아 넘어갈 거라 생각하지는 않겠지? 그리고 종종 취향이 특이해서 이쁘장한 남자들한테 발정하는 놈들도 있소만.”
그 말에 칼리나는 질겁하는 표정을 지었고 라그나르는 키득거리며 말을 이었다.
“뭐, 좀 기분이 나쁠 수도 있겠지만 일단 명목상으로 아가씨께서는 내 아내처럼 행동해야 할 거요.”
“아내…? 설마 부인을 얘기하는 거야?”
“기분이 나쁘더라도 어쩔 수 없소. 그래도 용병단장의 아내라고 하면 다들 관심을 끄지 않겠소? 솔직히 50명이 넘는 남자들 소굴에서 추파를 받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하오만.”
그 말에 먹던 걸 멈추고 잠시 고민하던 칼리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결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그런 역할을 하는 것뿐 아닌가.
“그러지 뭐.”
물론 이마저도 추후에 소문이 나면 자신에게 안 좋은 상황을 만들 것이다. 가령 몸을 팔아 용병단장을 매수했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문제란 말인가. 이미 부모님의 원수를 갚고 자신의 것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거기에 며칠 보지 않았지만 라그나르라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칼리나는 허겁지겁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망상을 꺼트렸다.
그는 야만인이고 자신은 긍지 높은 귀족이다. 애초에 물과 기름처럼 어울릴 수 없는 관계가 아니던가. 헛된 망상은 접어두는 게 서로에게 이로울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칼리나는 마을에서 하룻밤 묶은 뒤 다음 날 볼로냐로 입성했다. 이미 안에 레이븐 용병단이 머무르고 있어서인지 경비병들은 별다른 검문 없이 들여보내 줬다.
그리고 볼로냐 내부에서 라그나르의 말대로 50명이 넘는 용병단원들을 마주한 칼리나의 눈동자에는 희망이 깃들었다.
“진짜였어….”
“하, 그럼 아가씨께선 내가 거짓말을 했다 생각한 거요?”
“아니, 그게 아니라… 그, 당신도 알다시피 별 이상한 놈들이 다 달라붙었었거든. 솔직히 얘기해서 당신이 내건 제안은 본인이 생각해도 내게 너무 유리한 것들이었잖아.”
짐짓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라그나르를 향해 칼리나는 변명하듯 대답했다.
사실 그와 계약서도 쓰고 카노사를 되찾아주기로 약속도 받았다지만 그녀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막말로 라그나르가 자신을 그럴듯한 말로 꼬드겨 밀라노에 팔아치우려 했다고 해도 자신은 꼼짝없이 팔려 나가야 했다.
그렇기에 불안 반 기대 반으로 따라왔는데 다행히 자신이 제대로 된 선택을 한 모양이었다. 어쩌면, 라그나르의 말대로 다시 카노사를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무튼, 오늘은 이곳에서 쉬고 내일 출발하자고. 칼리나.”
평상시에 붙이던 아가씨라는 호칭과는 다르게 그는 수하들 앞이라서 그런지 대범하게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 손길이 묘하게 기분 나쁘지 않았기에 칼리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