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화
“흠, 난 꼬맹이의 몸에는 관심이 없는데.”
라그나르의 말에 그게 무슨 뜻인지 곰곰이 생각하던 칼리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행동은 라그나르가 그녀를 짓누른 뒤 코에 검지를 가져다 대자 멈췄다.
“쉬잇. 조용히. 나와 밀담을 나누고 있다고 동네방네 떠들 생각인가?”
“으읏… 당신이 이상한 소리를 하니까 그런 거잖아. 내 말은 내 가신이자 기사단의 단장으로 삼아주겠다는 말이었어.”
“그럼 그렇게 얘기했어야지. 말하는 게 제법 의미심장하잖소. 남자란 단순해서 그렇게 돌려 말하면 오해하기 마련이오.”
뻔뻔하게 대꾸하는 라그나르의 모습에 칼리나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은 그래 보이네.”
“아무튼, 일단 난 당신을 도와줄 생각이오.”
“왜?”
“왜라니… 그야 당신이 용병을 구하고 나는 용병이니까? 그리고 내가 당신한테 날 용병으로 써달라 칼 들고 협박한 것도 아니고, 용병을 구하던 건 그쪽 아니오?”
“맞아. 하지만 그게 당신이 날 도와줄 이유가 되는 건 아니야. 용병들이라는 건 대가를 받고 일하는 자들이잖아?”
“그야 그렇지.”
“잘난 듯 얘기했지만 결국 내가 당신들에게 실제로 보상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내가 가지고 있는 거라고 해봤자 얼마 안 되는 패물들뿐이지.”
그녀는 그렇게 자조적으로 웃으면서 침대 한구석에 있는 패물함을 꺼내 열더니 탁자에 쏟았다. 그 안에서는 여러 가지 패물이 나왔는데 막말로 저걸 전부 팔아봤자 자신의 용병단을 이틀도 고용하지 못할 것이다.
“대강 견적을 내보니 이틀 치군. 그래도 뭐, 그대의 의뢰를 수행하는 데는 이틀이면 충분하오.”
아무리 오딘께서 신탁을 내렸다고 하나 나는 신앙심만으로 모든 걸 결정하는 사람은 아니다. 뭐, 그랬던 놈들도 있지만 그런 놈들은 이미 발할라로 승천한 지 오래다.
그 때문에 대충 카노사와 투스카니 공략에 대한 견적을 짜 보니 일만 잘 풀리면 이틀 안에 둘 다 함락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농담이지?”
“내가 농담을 즐기는 성격이긴 한데 일에 관해선 언제나 진지하오. 알지 모르겠지만, 용병에겐 신뢰가 제일 중요하거든.”
라그나르의 말에 칼리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패물들을 다시 담아 한구석에 치우며 물었다.
“이유 없는 호의는 없어. 그게 내가 이렇게 몰락하고 나서 첫 번째로 깨닫게 된 거지. 제노바 놈들도 날 어떻게 써먹을지 재고 있을걸?”
“그거야 그렇겠지. 그대의 말대로 이유 없는 호의는 없으니까.”
“내가 아무리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라도 이쯤 되면 내 행동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 내가 카노사를 되찾을 방법은 카노사를 탐내는 누군가의 명분을 위해 허수아비가 되는 것밖에 없겠지.”
“덤으로 결혼이라는 족쇄까지 매이게 되겠군.”
명분과 그 명분을 물려줄 후계자를 낳을 수 있는 몰락 귀족의 여성이라니, 그 누가 두 팔 벌려 환영하지 않을까? 덤으로 얼굴까지 예쁜데 말이다.
“맞아. 그러니 나는 죽을 때까지 내 것을 되찾기 위해 투쟁할 거야. 하지만 당신은 용병이잖아? 내 말이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왜 도와주는 거지?”
“흠….”
칼리나의 말에 라그나르는 고민했다. 눈앞의 영애에게 ‘사실은 오딘께서 신탁을 내렸소’라고 하면 과연 믿을까?
지금 그녀는 극도로 예민해져 있고 인간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상태다. 이런 사람을 설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럴듯한 말들을 해봤자 자기 나름의 논리로 전부 쳐낼 것이다. 그러니 좀 더 본질적이고, 물질적이며 납득 가능한 이유를 대기로 했다.
“우선 내 나름대로 며칠간 대가리를 굴려본 결과 어느 정도 성공 가능성이 보였기에 온 것이오. 설마 내가 오늘 그대를 보자마자 돕겠다고 할 리가 없잖소?”
“오늘 일부러 내 앞에서 무례한 행동을 한 것도 전부 다 의도됐다는 말이군.”
라그나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대신한 뒤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이유인데… 사실 지금 아가씨의 몸은 값어치가 없소. 발정 난 변태 새끼들이야 좋다고 달라붙겠지만 나는 아니거든.”
“사람한테 값어치를 매기는 게 참 용병답네. 그리고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어서 더 짜증 나고.”
“그거야 당연하지 않소. 용병이란 자신의 목숨값을 담보로 일을 하는 거니까. 당연히 타인을 평가하는 잣대도 그럴 수밖에 없지.”
라그나르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녀의 힐난을 부드럽게 넘긴 뒤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들겼다.
“아무튼, 그대가 카노사와 투스카니를 되찾게 되면 순식간에 높으신 귀족 나으리가 되지 않겠소?”
“그때 내게 빌붙겠다고? 내 미래를 보고 투자한다는 건가? 하지만 아까 그 얘기는 했을 텐데?”
확실히, 칼리나는 라그나르에게 가신과 기사단장의 자리를 제안했었다. 하지만 라그나르는 고개를 흔들며 가볍게 거절의 뜻을 내비쳤다.
“아쉽지만 난 용병 생활이 더 좋으니 그딴 건 필요 없소. 아무튼, 아까 하던 말을 계속해보자면 내 취향은 긍지 높고 고귀한 여귀족 나으리를 내 밑에 깔려 앙앙거리게 만드는 거요. 내 나름의 로망이지.”
“무, 무슨…!!”
노골적인 말에 칼리나의 얼굴이 새빨개졌지만 라그나르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물론 지금의 아가씨는 조금 부족해 보이지만, 그래도 원판은 괜찮으니 3~4년 뒤면 충분히 성장하겠지. 그걸 위해서 미리 투자하는 거요. 막말로 내가 언제 지체 높은 귀족 나으리와 해보겠소?”
“당신 미친 거 아니야?”
“원래 용병 일은 미친놈들이나 하는 거요. 그리고 막말로 안 될 것 같다 싶으면 난 도망치면 그만이거든. 좆됐다 싶으면 아가씨를 붙잡아서 적한테 바치고 한자리 얻을 수도 있고.”
당당히 널 버리겠다는 라그나르의 말에 칼리나는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쳤다.
“지금 날 제물로 바치겠다는 얘기를 본인 앞에서 하는 거야?”
“궁금해하는 것 같아 답해주는 거요.”
“뭐 좋아. 방법은 있어? 솔직히 난 아직도 어떻게 카노사를 되찾아준다는 건지 모르겠어.”
“오. 간단하오. 이것저것 알아보니 최근 투스카니의 발리에르 가문이 실정을 하고 있다고 하더군. 뭐, 그쪽도 머리가 있으니 점령지를 그런 식으로 통치하면 안 된다는 건 알고 있겠지만 아무래도 밀라노에서 요구하는 게 많은 모양이야.”
“그야 그럴 테지. 그 미친 노인네는 지금 노골적으로 영지를 달라고 압박하고 있는 거니까.”
“투스카니 입장에서는 그건 싫을 테니 꾸역꾸역 밀라노의 요구 조건을 맞춰줄 수밖에 없지. 그리고 그를 위해서 카노사를 쥐어짜고 있는 상태고.”
“그 틈을 노리겠다?”
“자신들의 정당한 계승자가 온다는데 어느 정도 협조하겠지. 그리고 아가씨의 아버지께선 주변에서 상당한 존경을 받았다고 들었소만.”
“당연하지. 아버지께서는 그야말로 귀족들의 귀감이셨다.”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오자 칼리나는 자랑스러운 듯 가슴을 펴며 이야기했고 라그나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휘하의 봉신들도 이쪽이 어느 정도 승기만 잡는다면 돌아오지 않겠소”
“그 배신자 놈들을 받아들이라고!?”
“쉬잇. 조용히. 아무래도 그대는 평상심을 유지하는 법부터 배워야 할 듯하군.”
라그나르의 말에 씨근덕거리던 칼리나는 몇 차례 심호흡을 하며 숨을 가다듬었지만 여전히 분노에 떨리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아버지와 가문이 그렇게 망하고 나자 그들은 얼굴을 싹 바꿔서 나를 모른 척했다. 아버지께서 그렇게 잘 대해 주셨지만 그 누구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지.”
“그거야 당연한 거요. 누구든 제 목숨은 소중한 법이니까. 그들에게 복수하고 싶더라도 지금은 참아야 하오. 어찌어찌 카노사와 투스카니까지는 손에 넣더라도 밀라노와 싸우기 위해선 고양이의 손이라도 빌려야 하니까.”
아무것도 모른 채 멋대로 이야기를 진행하는 라그나르의 모습에 화가 났지만, 솔직히 그의 말은 합리적이었기에 칼리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뭐 좋아. 다 당신 말대로 한다 치자고. 정작 중요한 카노사와 투스카니 공략은 어쩔 셈이지?”
“카노사는 간단하오. 나와 휘하 용병들 서넛이 카노사로 잠입할 거요. 그리고 약속된 시간에 맞춰 병력들을 시켜 외부에서 성을 공격해주시오. 허면 내가 그 틈을 타서 영주의 목을 취하겠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무슨 기발한 대책이라도 내놓는 줄 알았건만 고작 한다는 소리가 영주 암살이었다. 사람을 암살하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었다면 지금쯤 귀족들 태반이 목 잘린 시체가 되어있을 것이다.
“안 될 게 뭐가 있소? 그리고 내 예상이 맞다면 카노사에는 그대의 가문만 알고 있는 비밀통로가 있는 걸로 짐작되오만… 맞소?”
“…맞아. 고대 로마 시절에 만들어졌던 통로가 남아 있어. 원래는 하수 시설로 썼던 것 같은데 지금은 폐쇄된 지 오래야.”
“그대가 그곳으로 도망쳐 나온 걸 보면 우리도 충분히 들어갈 수 있겠군. 거길 통한다면 좀 더 손쉽게 암살을 할 수 있을 거요.”
처음에는 개소리처럼 들렸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럭저럭 괜찮은 방법이었다. 애초에 적은 숫자로 빠르고 확실하게 승리하기 위해선 우두머리를 쓰러뜨리는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위험을 무릅쓰는 건 자신이 아니라 라그나르가 아니었던가. 물론 이게 다 자신을 꼬드기기 위한 라그나르의 밑그림일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밑도 끝도 전부 의심하다간 아무것도 못 할 터였다.
“좋아. 그럼 투스카니는?”
“안타깝지만 무료로 얘기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요. 계약을 하면 완전히 말해주리다.”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얘기가 어디 있어?”
하지만 라그나르는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입을 다물었고 칼리나는 눈앞의 사내를 노려보며 그의 속을 떠보려 했지만, 그녀가 알아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애초에 이제 막 열일곱 살이 된 귀족의 영애가, 전쟁터에서 구르고 구른 용병을 상대로 심리를 읽어낼 수 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결국, 한참 동안 눈싸움을 하던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종이와 펜을 꺼냈고 그 모습을 보던 라그나르는 히죽 웃었다.
“오, 드디어 계약할 마음이 들었소?”
“이게… 이게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아마 관에 들어가기 전에 살면서 이게 제일 잘한 일이라고 회상하게 될 거요.”
칼리나는 눈앞의 사내가 용병치고는 입담이 제법이라고 느끼며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나저나 당신. 글도 못 읽는다면서 계약은 어떻게 하려고?”
“아가씨가 써주면 되지 않소?”
“내가 계약서에 무슨 소리를 적을 줄 알고?”
“아가씨가 귀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면 이 불쌍한 야만인 용병을 등쳐 먹는 일은 안 하겠지. 안 그렇소?”
“당신. 그러다 언젠가 등에 칼 꽂힐 거야.”
나름 진지한 충고였지만 라그나르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한마디 보탰다.
“아, 그리고 아까 내가 말한 조건도 써넣어 주시오.”
그 말에 칼리나의 얼굴이 새빨개졌지만, 계약은 계약이었기에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 내용을 적었다.
과년한 귀족 영애의 처녀를 예약하는 미친놈과 용병 계약을 맺는 게 정말 맞는 걸까? 지금이라도 이 계약을 취소해야 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머리를 휘감았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저 변태 같은 취향이야 둘째 치고 그의 말대로 해서 성공만 한다면 카노사를 되찾을 수 있을 테니까. 거기에 줄어드는 패물도 문제였다.
아마 이대로 시간이 더 흐르면 용병은 둘째 치고 이곳에서 머무르는 것조차 힘들어지리라.
“자, 여기 서명해.”
라그나르는 내용을 보지도 않은 채 두 장의 계약서에 서명한 뒤 품속에 집어넣으며 가볍게 박수를 쳤다.
“좋소. 이걸로 계약은 성립된 거요. 그럼 이제 도망칩시다.”
“도망치자고? 왜?”
“아가씨가 가고 싶다고 제노바가 잘 가십시오 하면서 보내줄 것 같소? 원래 이런 건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지만 나갈 땐 아닌 법이오.”
하긴, 겉으로는 자신을 도와주고 있었지만 감시하고 있지 않았던가. 만약 제노바가 마음먹고 자신을 구금한다면 새장 속에 갇힌 새가 되는 건 시간문제일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