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화
사흘 뒤, 여기저기 퍼졌던 수하들이 카노사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들을 물어왔다.
물론 시간도 촉박했고 대부분이 뜬소문이었던 만큼 정보의 질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나름 그럴듯한 정보들을 몇 가지 얻을 수 있었다.
우선, 카노사에서 몇 개월 전에 전쟁이 터졌었다.
카노사 가문과 그 근처에 있던 투스카니의 발리에르 가문 간에 전쟁이 벌어졌는데 나름대로 위세가 있던 카노사 가문은 제대로 힘도 쓰지 못하고 그대로 패배했다.
그리고 카노사 가문의 영주는 자살했고 영지는 투스카니를 다스리던 발리에르 가문에 넘어갔다. 문제는 영지는 발리에르 가문이 다스렸지만 그곳에서 나는 이권의 대부분은 밀라노에서 가져간다는 점이었다.
“뭔가 냄새가 나는군.”
“예.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무언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파보면 내막을 알 수 있을 테지만 그랬다간 영주의 귀에 우리의 행적이 들어갈 것이다. 아니, 이미 지금쯤이면 들어가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 이상 헤집는 건 좋지 않다. 안 그래도 자신들에 대해 경계하고 있을 텐데 조심해야겠지.
“그리고 자살한 카노사 가문의 영주에게 딸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아는 걸 밀라노의 발데크 백작이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진작에 암살당했을 걸세.”
용병 생활을 하면서 하나 깨달은 게 있다면 후환은 절대 남겨둬선 안 된다는 것이다. 상대의 가문을 멸하고 영지를 뺏을 거라면 그와 관계된 모든 걸 죽여야 했다.
거기에 백작의 자식이라면 정당한 계승자가 아니던가? 어떤 식으로든 이용될 여지가 있었다.
“그게 또 그렇지도 않은 게 곧바로 제노바로 도망쳤다고 합니다.”
“제노바라… 확실히 거기에 있으면 밀라노에서도 개입하기 어렵겠지. 근데 제노바에서 그걸 알면서도 받아주던가?”
“따로 행동을 취하는 건 아니고 묵인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제노바 측에서 백작의 영애를 자신들의 울타리 안에 두고 있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받아는 주지만 따로 액션을 취하지는 않는다는 거군. 어쩌면 제노바는 지금 밀라노와 물밑으로 협상을 진행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제노바 입장에서는 끈 떨어진 백작 영애를 보호하는 것보다 잘나가는 밀라노와 관계를 개선하는 게 더 좋을 테니까. 거기에 최근 베네치아와의 경쟁에서 밀리고 있다지 않은가?
“계속 여기에 있으면 재수 없는 일에 휘말릴 수도 있겠군.”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밀라노를 다스리는 발데크 가문은 주변에서 힘 좀 쓴다는 대귀족이었고 그의 힘이라면 자신과 레이븐 용병단 정도는 얼마든지 쓸어버릴 수 있었다.
물론 아무 이유 없이 자신들과 맞서 싸울 리는 없겠지만, 본인들의 치부를 캐고 다니는 우리가 곱게 보일 리가 없잖은가.
“내일 새벽이 밝는 대로 이곳을 떠나도록 하지.”
“제노바로 가실 겁니까?”
부관의 물음에 라그나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북쪽에서 왔다는 용병단이 느닷없이 카노사에 대한 소문을 듣더니 제노바로 향한다?
이건 바보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이었기에 몇 차례 주변을 돌며 흔적을 지워야 했다. 원래 용병들이란 이런저런 소문을 통해 자신들을 고용해줄 고용주를 찾지 않던가.
“자네들은 좀 이곳저곳 돌면서 흔적을 지우게. 나는 따로 제노바로 가지.”
“혼자 가실 생각이십니까?”
“그게 더 낫지 않겠나? 괜히 제노바의 심기를 긁을 필요도 없고.”
서른 명이 넘는 무장한 용병들이 한 번에 들어가면 소문이 나기 마련이다. 아직 제노바가 어떤 스탠스를 취하고 있는지 모르니 굳이 시선을 끌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내가 직접 그녀를 설득할 테니 자네들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최대한 용병들을 끌어모아 볼로냐에서 기다리고 있게. 기간은 2주, 길어도 3주면 될 것 같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마친 나는 그날 새벽에 병력을 끌고 밀라노를 나섰다. 물론 그 와중에 밀라노의 영주에게 입성을 허가해줘서 고맙다고 성의를 표시하는 건 덤이었다.
이랬거나 저랬거나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고 약간의 성의로 이쪽의 호의를 표시해줄 수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남는 장사였으니까.
* * *
밀라노를 나오자마자 수하들과 헤어진 나는 홀로 말 위에 올라 제노바로 향했다.
대충 거리도 150km 안팎이었고 무역로도 형성되어 있어 도로도 깔려있었기에 사나흘이면 충분히 주파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렇게 일감을 찾아 제노바로 온 용병을 연기한 나는 들어오자마자 카노사 영애를 찾아가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비록 자신이 야만인이라지만 그동안 용병으로 살아오면서 쌓인 경험이 있었다. 자신의 지식이 모자랄지언정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가 모자란 건 아니었으니까.
우선적으로 나는 그녀가 머물고 있는 곳이 어딘지부터 확인한 뒤 곁에 머물며 관찰했다. 그렇게 사흘 정도 그녀를 관찰한 결과 몇 가지를 알아낼 수 있었다.
우선, 그녀의 이름이 칼리나 디 카노사라는 것. 그녀는 이곳에서 용병단을 모집하고 있다는 것, 그들을 이용해서 다시 가문을 일으키고 영지를 되찾을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들이었다.
문제는 몰락하다 못해 가진 게 몸뚱어리밖에 없는 그녀를 믿고 따를 용병들이 없다는 점이었다. 거기에 목표 자체가 터무니없었다. 어디 산적들 소탕하는 것도 아니고 공성전을 벌여 영지를 되찾는 것이었다.
야전과 공성전은 드는 비용부터가 남달랐다. 물론 미친놈들이라면 사다리만 가지고 들이박겠지만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불가능에 도전하는 용병들은 없었다.
당연히 공성 병기들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런 돈은 대체 누가 대주겠는가? 아니 설사 모든 준비가 갖춰진다고 해도 공성을 용병들로만 하는 건 자살행위였다.
애초에 그게 가능할 정도로 투스카니의 병력들이 오합지졸이었다면 카노사 백작이 영지전에서 패배할 리도 없었겠지.
즉, 모르긴 몰라도 투스카니의 배후에 누가 있다는 뜻이었고 그걸 눈치 빠른 용병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결국, 저 불쌍한 백작 영애가 하는 짓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아니 그것보다 더 멍청한 행위에 불과했다.
“칼리나… 칼리나라.”
라그나르는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미 그녀에 대한 기본적인 조사는 전부 다 끝마쳐뒀다. 이제 남은 건 그녀와 접촉하는 것뿐인데 문제는 이게 맞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오딘께서는 카노사를 구원하고 자신의 운명을 쟁취하라 신탁을 내렸다. 허나 그 신탁에서 말하는 구원이 이르는 게 칼리나라는 아가씨를 구원하는 것과 같은 얘기인가?
사실 이런 문제는 백날 고민한다고 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신탁이라는 건 늘 그렇듯 애매모호했고 결국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니까.
결국, 고민하던 라그나르는 자신의 직감을 믿기로 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오딘께서 이야기한 신탁의 의미를 알 수 있게 될 테니까.
* * *
칼리나는 지금 굉장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가문이 망하고 영지를 빼앗긴 뒤로 근 6개월간 이곳 제노바에 머물고 있었지만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급하게 도망쳐 나왔기에 가지고 온 재물도 많지 않았고 그마저도 시간이 지날수록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거기에 함께 왔던 시종들은 처음에는 자신의 곁에 붙어있었지만, 재물이 떨어지는 걸 보더니 이내 제 살길을 찾아 떠나버렸다.
결국 제노바로 온 지 3개월이 지났을 때 이곳에 남은 건 자신 혼자뿐이었고 그 이후로도 자신은 계속 죽 혼자였다.
용병들 역시 처음에는 귀족가의 영애가 의뢰를 내거니 관심을 가졌지만, 자신이 목표를 얘기하자 질겁하며 떠나버렸다.
몇몇 이들이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그놈들은 진심으로 자신을 도와주는 게 아니라 전부 다 자신을 어떻게 해보려는 놈들밖에 없었다.
며칠 전에도 늙은 백작이 자신의 아내가 된다면 도와주겠다고 하기에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밀라노 백작 그 늙은이의 아내가 되기 싫어서 거부한 대가로 가문이 멸문했는데 그런 놈들의 정부로 들어가서 뭐 하겠는가.
설사 자신의 몸을 팔아 영지를 되찾는다고 한들 그게 자신의 것이 될 리가 없잖은가? 결국, 자신은 귀족들에게 카노사를 차지할 명분에 불과했다.
“후우….”
오늘도 꽝인 모양이었다. 이렇게 무력하게 있을 수밖에 없는 자신이 한심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실제로 자신은 무력했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까.
밀려드는 무력감을 애써 떨쳐내며 밥을 먹으려는 때 갑자기 자신의 앞에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사내가 자리했다.
“여어, 아가씨. 혼자인가?”
아직도 이런 무뢰한이 남아있구나 하는 생각에 칼리나는 한숨을 내쉬며 쳐다보지도 않고 묵묵히 밥을 먹었다.
맞은편에 앉아있는데도 술 냄새가 풀풀 풍기는 걸 보면 누가 봐도 진탕 술을 마신 게 분명했다. 이런 취객과 말을 섞어봤자 자신만 손해였기에 칼리나는 늘 그랬듯 무시하기로 했다.
“하하하, 제법 콧대가 높은 아가씨구만.”
대놓고 무시를 당했으면 이쪽의 의도를 알고 물러날 법도 한데 상대는 오히려 히죽 웃으며 자신이 마시고 있던 술잔을 테이블에 올려놓더니 한술 더 뜨며 이야기했다.
“내가 한잔 사지. 쭉 들이키라고.”
“무례하구나. 기본적인 예의도 지키지 못하는 건가?”
“흐흐, 내가 이렇게 술까지 사줬는데 너무 비싸게 굴지 말라고. 응?”
사내는 음탕하게 웃으며 자신의 몸을 쭉 훑어보더니 이내 손을 내밀어 자신의 왼손을 살포시 덮었다.
안 그래도 짜증 나 있던 상황이었는데 이렇게 노골적으로 무례하게 굴자 칼리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대로 상대의 뺨을 있는 힘껏 후려쳤다.
짝!!!
엄청난 파공음과 함께 상대의 고개가 그대로 돌아갔고 주점에는 정적만이 느껴졌다. 모두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리는 게 느껴졌고 눈앞의 사내는 재밌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퉤. 이거 손맛이 제법 매운 아가씨였군.”
볼 안쪽의 살이 터졌는지 그는 핏기가 섞인 침을 뱉으며 겁박하듯 이야기했다.
“어디 그럼 내 아랫도리 맛도 한번 볼 텐가? 장담하건대 아가씨가 받아들이기에는 제법 매울 거야. 내가 한번 박아주면 성녀님도 순식간에 타락해서 쾌락의 노예가 되거든.”
좋게 얘기해서는 들을 것 같지가 않았기에 칼리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다.
“얌전히 물러나면 그 이상 죄를 묻지는 않겠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은 아직 귀족이었다. 비록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몰락한 귀족이라지만, 일이 더 커지면 제노바에서도 그냥 넘어가진 않을 것이다.
“흐흐흐, 내 밑에 깔려서도 그렇게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지 궁금하구만.”
사내는 본격적으로 자신을 희롱하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손길이 자신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쾅!
“동작 그만!”
술집 주인의 신고를 받고 출동했는지 무장한 경비대가 술집으로 들이닥쳤고 그들의 대장은 자신을 향해 가볍게 인사하더니 이내 자신의 눈앞의 사내를 에워쌌다.
“뭐, 뭡니까?”
“술집에서 행패를 부린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보아하니 네놈이 행패를 부린 모양이로군.”
“예?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그저….”
“행패를 부렸는지 아닌지는 조사해보면 알 일이겠지. 압송해!”
대장의 명령에 경비대들은 사내를 밧줄로 묶기 시작했고 사내는 고개를 떨군 채 얌전히 포승줄에 묶였다.
술에 취했어도 경비대에게 반항할 정도로 취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감옥에 처박히고 제노바에서 추방당하기 싫으면 공손하게 굴어야겠지.
“실례가 많았습니다. 영애님.”
원래 경비대들이 저렇게 엉덩이가 가벼운 놈들은 아니었지만, 이런 일이 자주 있는 데다 자신의 신분이 신분이다 보니 제노바에서 예의주시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곁에서 지켜보기만 할 거면 차라리 본격적으로 자신을 도와줬으면 싶었지만, 제노바는 그럴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 사실이 아니꼬웠지만,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낼 만큼 그녀는 어수룩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마음에도 없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항상 고맙네. 경비 대장. 그대의 헌신에 노고에 감사를 표하네.”
“이게 저희가 할 일 아니겠습니까? 그럼 영애님. 편안한 밤 되시기를.”
경비 대장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자신에게 추파를 던지던 사내는 경비대에게 묶여서 밖으로 압송되었고 경비대 역시 밖으로 나갔다.
문제의 원인이 사라지자 술집은 다시 왁자지껄해졌고 칼리나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돌아갔다. 이대로 있어봤자 사람들의 노골적인 수군거림밖에 더 듣겠는가?
자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조금 피곤했기에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우려던 찰나 외투 주머니에서 뭔가 이질적인 감촉이 느껴졌다.
“쪽지? 이게 왜…?”
꼬깃꼬깃 접혀있긴 했지만 이건 틀림없는 쪽지였다. 문제는 이 쪽지가 왜 자신의 주머니에 있느냐는 거였지만 그건 열어서 내용을 확인해보면 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