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화
“대장. 이제 어떻게 할 겁니까?”
“음….”
수하의 물음에 라그나르는 팔짱을 낀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용병들이란 평화로운 곳에서는 쓸모가 없는 존재들이다.
물론 규모가 작다면 인근에서 일어나는 귀찮은 일들… 그러니까 경비를 서준다거나, 정찰을 한다거나 하는 것들을 대신해 주며 주린 배를 채울 수 있겠지만 지금 자신이 이끄는 용병단원의 수는 오십 명을 넘어섰다.
거기에 적지만 기병까지 껴있었기에 휘하 용병단의 전투력은 어지간한 영주성의 병력들을 까마득히 상회했다.
물론 숫자만 놓고 따지면 영주들의 병력이 훨씬 더 많겠지만 이쪽은 수많은 경험으로 단련된 살인 기계들이었다. 어중이떠중이들은 바이킹들이 진군하는 것만으로 바지에 오줌을 지릴 것이다.
문제는, 그런 만큼 용병들의 몸값도 제법 높았고 앞서 언급한 자질구레한 일들로는 그들의 주급을 지불하는 것조차 힘들다는 점이었다.
물론 용병들 태반이 자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니만큼 짧으면 2주, 길면 한 달 정도는 무보수로 자신을 따르겠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다.
용병에게 돈은 신뢰를 넘어서 전부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니 신뢰의 증표를 건네주지도 않으면서 자신만 믿고 따라오라고 하는 용병단장을 누가 따르겠는가?
실력 있는 용병단장이라면 그런 최악의 상황이 오기 전에 미리 활로를 찾아야 하는 법이다.
“자네가 보기에도 사자공이 여기서 더 나아갈 것 같지는 않지?”
“예. 한눈에 봐도 철군 준비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 남아있으면 귀찮은 뒤치다꺼리만 떠넘길 겁니다.”
부관의 말에 라그나르는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한숨을 토해냈다. 근 몇 년 동안 이어진 동방 식민지 운동은 노다지 그 자체였다.
사자공은 이번에 아예 웬드족을 몰아내기로 결심한 건지 대규모로 용병들을 모집했으며 엘베강 이북으로 그들을 몰아낼 때까지 진군한다고 천명했다.
당연하겠지만, 사람이건 짐승이건 살던 곳에서 쫓겨나면 발악을 하기 마련이었다. 웬드족들은 생존을 위해 미친 듯이 싸웠고 절로 전쟁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몇 차례 활약하자 그 공로를 인정받아 단독으로 작전권을 부여받기도 했고 임시지만 주변 마을에서 필요한 것들을 징발할 수 있는 권한까지 내려받을 수 있었다.
이를 이용해 라그나르는 용병단의 세를 크게 불릴 수 있었지만 이젠 그것도 끝이었다. 아군의 군대는 사자공이 약속한 대로 엘베강까지 진군했고 그는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생각이 없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전쟁과 전투, 싸움이 없는 곳에서 용병이 할 일은 없었다.
“여길 떠야겠군.”
대부분 승리를 했다고 해도 병력을 일으키는 것 자체가 사자공에게는 부담이었을 것이다. 타국이나 다른 영주들이 시비를 걸지 않는 이상 이제 한동안 북부에서 까마귀가 시체를 찾아 들판을 헤맬 일은 없겠지.
“돌아가기 전에 약탈이라도 한 번 하고 갈까요?”
부관의 말에 라그나르는 고개를 저었다. 인근에 아직 토벌되지 않은 웬드족 일부가 남아있긴 하지만 어차피 전부 다 사자공의 발아래 들어갈 놈들이었다.
즉, 길게 보면 그들도 전부 다 사자공의 영지민이 될 텐데 그걸 털면 좋은 말은 안 나올 것이다. 무엇보다 웬드족 놈들은 가난해서 털어봤자 나오는 것도 없었다.
“웬드족 놈들 털어봤자 먼지밖에 더 나오겠나. 아군 군대가 퇴각할 때 우리도 그에 발맞춰서 퇴각한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단장님. 몇몇 놈들은 함부르크에 남기는 게 어떻습니까? 듣기로 사자공이 그곳에 꽤 크게 도시를 지을 거라 합니다.”
말이야 저렇지만, 실상은 적당히 인원을 걸러내자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 자체에는 라그나르도 동의하는 바였다. 조직의 몸집이 비대해지면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있는 법이었다.
“부상당한 인원이 많나?”
“중상이 5명, 경상이 13명입니다.”
“생각보다 많군.”
“꽤 격렬하게 싸우지 않았습니까? 저 빌어먹을 놈들이 우리를 늑대 아가리로 들이민 것도 있고요.”
라그나르의 용병단이 활약하자 그게 꼴 보기 싫었는지 좆같은 귀족 지휘관 새끼는 그들에게 유인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미끼 역할을 떠맡겼다.
낚시를 해보면 알겠지만 물고기를 낚는 대가로 미끼는 자신을 희생해야 했다. 그리고 그 희생을 바탕으로 월척을 낚는다 한들 그 누구도 미끼를 신경 쓰지 않는다.
이 부당한 처우에 대해 항변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결국 라그나르 자신도 작게나마 부상을 입은 채 한동안 전장에서 물러나 있어야 했다.
좆같긴 했지만, 원래 용병 일 자체가 좆같은 건데 사소한 일에 일일이 열 받아 있으면 용병 일은 못 한다. 거기에 어쨌거나 돈이 지급되는 한 용병은 시킨 일을 하는 이들이 아니던가.
“부상병들 전부가 정착할 만큼 함부르크가 크던가? 작년에 들렀을 땐 인구수가 천도 안 되는 조그만 도시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예. 아무래도 항구도시다 보니 무역의 중심지로 만들 생각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건물들을 짓기 위한 터만 해도 그 크기가 제법 큰 데다 사람들도 엄청나게 이주시키고 있다고 합니다.”
수하의 보고에 턱에 난 수염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라그나르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하는 김에 용병단에서 나가고 싶은 놈들도 나가라고 해. 만약 인원이 너무 많이 비면 용병들도 추가로 모집하고.”
용병이란 언제나 죽음을 곁에 두고 사는 자들이다. 운 좋게 사신의 낫을 피했다고 한들 제 한 몸을 건사해서 멀쩡하게 은퇴하는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즉, 싸우다 보면 어디 하나가 절손되는 장애인이 되는 건 다반사였고 그런 이들은 용병단 차원에서 적당히 돈을 쥐여줘서 내보내는 게 일반적이었다.
물론 사지 중의 하나가 없더라도 먹고사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용병들은 언제나 더러운 일을 하는 이들이었고 자신의 손을 더럽히기 싫어하는 자들은 넘쳐흘렀으니까.
“인원수는 어느 정도로 채울까요?”
“서른 명 언저리로 채우게. 그리고 뽑을 때는 방패 다룰 줄 아는 놈들 위주로 뽑고.”
“알겠습니다.”
“이 건에 관한 건 자네에게 전부 일임하겠네. 함부르크에서 나흘간 머무를 테니 그 안에 전부 일을 처리하게.”
“예. 그런데 그 이후에는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제국 중부로 이동할 생각이네.”
원래는 프랑스나 한창 레콩키스타가 일어나고 있는 이베리아반도로 가볼까도 고민해봤지만 일단 제국 중부로 가기로 했다.
“중부에서 전쟁이 났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습니다만….”
“인구수가 많다는 건 더 많은 다툼이 일어난다는 말이지. 거기에 이탈리아 북부는 항상 프리드리히와 으르렁거리고 있지 않나?”
“아, 혹시 황제의 밑으로 들어갈 생각이십니까?”
“정 할 게 없으면 그럴 생각이네. 전조는 없지만 아마 사자공이 전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었으니 황제도 뭐든 액션을 취하겠지.”
단순히 막연한 예측은 아닌 게, 프리드리히는 지금껏 몇 번이나 이탈리아반도를 공략해왔다.
물론 들이는 노력에 비해서 얻는 게 마땅찮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의 밑에서 일할 경우 수입은 제법 짭짤하게 들어올 터였다.
그리고 전쟁이 없어도 상관없다. 어차피 이번에 벌어놓은 돈이 꽤 많아서 몇 달간은 일하지 않아도 용병단을 유지하는 게 가능했으니까.
“알겠습니다. 나중에 이동에 필요한 물자도 따로 구매해두겠습니다.”
“부탁하지.”
그렇게 라그나르가 이끄는 레이븐 용병단은 아군이 철수할 때 함께 철수했다. 함부르크에서 여독을 풀던 라그나르는 그날 밤, 기묘한 경험을 해야 했다.
꿈속에서 까마귀 두 마리가 자신을 인도했고, 그들을 따라가 보니 발이 8개 달린 말 위에 올라타 있는 애꾸눈의 노인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순간 라그나르는 이게 꿈임을 자각했다. 이 세상에 발이 8개 달린 말이 있을 리가 없잖은가.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저 말을 타고 있는 노인이 누군지는 알 수 있었다.
오딘. 이 세상의 주신이자 전사들의 아버지. 와일드헌트를 이끄는 폭풍신. 그게 오딘이었다. 그리고 슬레이프니르는 오딘의 상징과도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일설대로라면 오딘은 라그나로크에서 펜리르에게 죽음을 맞이했다. 헌데 왜 자신의 꿈에 나타난단 말인가?
그런 의문과는 별개로 오딘으로 추정되는 사내는 천천히 말을 몰아 라그나르의 앞까지 다가왔지만 라그나르는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리더니 입을 열었다. 아니, 입을 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그의 생각이 여과 없이 자신의 머릿속을 통해 울려왔으니까.
―카노사로 가게. 가서 카노사를 구원하고 그대의 운명을 쟁취하게.―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 말을 끝으로 꿈속의 세상은 파편이 되어 부서졌고 자신은 땀에 흠뻑 젖은 채 강제로 깨어나야 했다.
단순히 개꿈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었지만 똑같은 꿈을 사흘 내내 꾸자 라그나르도 생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제국 남부로 가지.”
“예? 제국 남부면 이탈리아반도 말씀이십니까?”
“정확히는 카노사일세. 어제 오딘께서 꿈에 나오셔서 날 그곳으로 이끄시더군.”
뜬금없이 오딘의 이름이 나오자 부관은 어이가 없었지만 이내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였다. 어차피 중부로 가나 남부로 가나 그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목적지를 정하는 건 단장인 라그나르의 권한이었고 용병 단원인 자신들이야 이동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싸우지 않고도 받는 돈이 늘어나니 좋을 따름이었다.
* * *
<신성 로마 제국 ― 밀라노>
“지금껏 여러 도시들을 돌아다녀 봤지만 단언컨대 여기만큼 큰 도시는 못 본 것 같습니다.”
“동의하는 바네.”
물론 콘스탄티노플을 가본 적이 있다면 저런 말을 못 할 테지만, 그걸 감안하고서라도 밀라노는 규모가 큰 도시였다. 이 시기에 인구 10만이 넘는 도시는 손으로 꼽을 정도였으니까.
“일단 영주에게 얘기해서 숙소부터 잡도록 하지.”
보통 중무장한 용병 집단이 도시로 오는 경우 영주의 신세를 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일단 자신의 통제 안에 놓는 게 마음 편하기도 하고 용병들이 머무는 사이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을 때 우선적으로 계약을 할 권리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언제든지 가용할 수 있는 막강한 전투력을 지닌 용병단과 친목을 다져놔서 나쁠 게 없기 때문이다. 막말로 서른 명이 며칠간 머물러봤자 돈이 얼마나 들겠는가?
영지민이 천 명도 안 되는 작은 도시라면 그마저도 부담이겠지만 여기는 인구수 10만을 넘어가는 대도시가 아니던가?
물론 어중이떠중이들이라면 용병단이랍시고 와봤자 비웃음을 당하며 내쫓기겠지만 나는 그래도 나름대로 북부에서 이름을 날린 용병단이었기에 환대해줄 것이다.
…라고 생각하던 때가 내게도 있었던 것 같다.
“도시에 머무는 건 신경 쓰지 않겠지만 의식주를 제공해주는 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레이븐 용병단이라고 얘기한 거 맞나? 단장인 내 이름도 얘기했고?”
“예. 헌데 처음 들어보는 용병단이라고 하더군요.”
처음 들어봐도 이 정도 규모에 무장 상태를 보면 친목을 도모할 만도 한데 참 대단하신 귀족 나으리 납셨군.
“쯧, 어쩔 수 없지. 각자 여관에 머물게 하고 그동안 사고 안 치게 단속 잘하게. 사고 치는 놈은 퇴직금이고 지랄이고 아무것도 없는 데다 변호도 없을 거라고 확실히 전하게.”
부하들이 사고를 치면 그 책임은 용병단장인 자신이 져야 한다. 그렇기에 자신으로서도 영주의 감독하에 머무르는 게 편했지만, 집주인이 안 받아주는데 뭘 어쩌겠는가.
“그리고 똘똘하고 눈치 빠른 놈들한테 카노사에 대해 조사하라고 하게.”
“구체적으로 어떤 걸 조사하면 되겠습니까?”
“카노사에 관련된 것이라면 뭐든!”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