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화
그렇게 조심스럽게 부엌에서 빠져나온 나는 이비의 방으로 향해 가볍게 문을 두들겼다.
“이비? 일어났어?”
방 안에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문을 잠가놓은 것 같지는 않았기에 나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여전히 안에선 인기척이 없었고 나쁜 짓을 하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며 방 안 여기저기를 살폈다.
창문에 쳐진 암막 커튼은 한 줌의 빛도 허락하지 않았고 그 어두운 방 안을 밝히는 건 기계음을 내며 돌아가는 모니터의 인위적인 빛뿐이었다.
거기에 밤중에 배고파서 몰래 야식이라도 먹은 건지 뚜껑이 반쯤 따진 컵라면이 책상 한구석에서 나뒹굴고 있었으며 라면 국물의 냄새가 은은하게 방 안에 남아 있었다.
물론 그런 것들 중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건 침대에 누워있는 이비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잠버릇이 심한 편이 아니었기에 딱히 흐트러진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녀가 숨을 쉴 때마다 큰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건 제법 진풍경이었다.
“스읍….”
나는 가볍게 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갔다. 사실 이비는 생각보다 자기 관리에 철저했기에 이런 식으로 그녀의 사생활을 엿보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그녀의 이 버릇은 과거 아포피스의 낙인이 찍혀있을 무렵 스스로의 얼굴과 피부를 드러내선 안 된다는 강박증 때문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이미 저주를 극복한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이비 특유의 버릇이자 예민함이었다.
다만 모니터의 중간에 떠 있는 온갖 문서창과 널브러진 전공 책들로 보아 힐데의 말마따나 그녀가 밤을 꼴딱 새웠음을 알 수 있었다.
피곤함은 사람을 무뎌지게 만들고 심리적인 저항감을 낮추는 1등 공신이었다. 실제로 내가 그녀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방 안에 들어왔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있지 않은가.
이런 기회는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었기에 먹이를 사냥하는 호랑이처럼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바로 앞에서 가볍게 숨을 쉬며 호흡을 가다듬은 나는 조심스레 그녀의 목덜미까지 다가간 뒤 곧바로 그녀의 귀를 깨물었다. 그리고 그녀의 반응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흐에에엑!”
스프링이 튕기듯 침대에서 일어난 그녀는 스스로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침대를 넘어가서 바닥에 엎어졌고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키득거렸다.
“주… 주군?”
“잘 잤어? 이비?”
“어으… 제, 제 방에는 어쩐 일로….”
“힐데가 깨우고 오라더라. 어제 밤 샜다며?”
“아. 예. 생각보다 과제의 양이 많아서요.”
뭐, 의대생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 그리고 그녀가 밤을 새우게 된 원인도 일부는 내게 있었다.
힐데, 칼리나, 이비와 함께 현대로 온 나는 사흘에 한 번씩 순서를 돌려 그녀들과 지냈는데 이비의 차례가 올 때마다 나는 그녀를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그러니 당연히 과제를 할 시간이 모자랐고 그녀는 이렇게 밤을 새우게 된 것이다.
“그런 것 같네. 그보다 이제 슬슬 일어나는 게 어때? 뭐, 나야 눈요기도 하고 참 좋은데.”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고 이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편한 복장을 고수하는 그녀로서는 가슴의 압박에서 탈피하기 위해 늘 박스티를 입고 잤다.
그 덕분에 헐렁하니 말려 올라간 옷 틈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밑가슴은 제법 괜찮은 절경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가슴의 크기만큼은 이비가 힐데와 칼리나를 압살했으니까.
“꺄아아악!”
이비는 귀여운 비명을 지르며 이불로 자신의 몸을 가렸고 나는 배시시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며 일으켜 세워주었다.
이미 이비와는 할 것, 못 할 것 다 해본 처지였지만 그녀는 묘하게 이런 상황을 부끄러워했다.
이것 역시 아포피스의 낙인이 사라지기 전에 자신의 피부를 남에게 드러내는 것 자체가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거겠지.
나중에 노출 플레이라도 한번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삼키며 나는 침대의 한 귀퉁이에 엉덩이를 걸쳤다.
“너처럼 자기 관리가 철저한 사람이 늦잠을 잔 걸 보면 많이 피곤했나 봐?”
“제법 양이 많다 보니 저도 모르게 무리한 모양입니다.”
“흐음. 그래? 내가 볼 때는 딴짓을 해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하는데….”
내가 말꼬리를 늘리며 추궁하듯 묻자 그녀에게서 헛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뭐 굳이 그녀의 반응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방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휴지에서 풍겨오는 특유의 냄새가 이 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읏… 그건….”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어쩔 줄 몰라 했고 그 모습에 나는 가슴 깊은 곳에서 가학심이 끓어올라오는 걸 느꼈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이비는 묘하게 사람의 가학심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거기에 칼리나 때도 그랬고, 힐데 때도 그랬지만 나는 제대로 가지 못했기에 반쯤 욕구불만인 상태였다.
“많이 피곤하면 간단한 마사지라도 해줄까?”
물론 그게 단순히 마사지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님은 그녀도 알 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거부하지 못했다. 그녀 역시 나와 함께 지내며 쾌락의 포로가 됐으니까.
“저기 주군… 하다못해 씻고 오기라도….”
물론 그녀는 나름대로 소소한 반항을 했지만 나는 가볍게 신성력을 사용해 그녀에게 세례 마법을 사용했다.
룬문자들이 화려하게 빛나며 이비의 몸을 휘감았고 그녀의 피부는 막 세면을 마치고 나온 것처럼 뽀송뽀송해졌다.
“됐지?”
“그, 그런….”
사실 세례 마법은 기독교의 세례마냥 아이에게 물을 뿌려 축복을 걸어주는 마법이었지만 뭐 어쩔 건가? 룬마법의 창시자인 내가 그렇게 쓰겠다는데.
물론 난 개인적으로 세례 마법을 싫어한다. 씻지 않아도 된다는 건 굉장히 편리하지만 직접 따뜻한 물로 씻어내는 개운함을 느낄 수가 없잖은가.
간단히 비유하자면 영양제 같은 느낌이다. 영양제만 몸에 제때 꽂아주면 안 먹어도 살 수는 있지만 그 대가로 먹는 즐거움을 포기해야 하지 않은가?
다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굉장히 유용한 마법이었다. 이걸로 인해 이비는 더 이상 도망칠 구실이 사라졌고 나는 히죽 웃으며 손가락을 그녀의 등허리로 올렸다.
“흐으윽….”
가볍게 등 언저리를 어루만진 것뿐인데도 이비는 예민하게 반응했고 나는 콧노래까지 부르며 그녀를 가볍게 마사지해주었다.
그렇게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던 내 손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 그녀의 탄탄한 배를 살살 쓸어올렸다. 부들부들하면서도 단단한 이 느낌은 아무리 만져도 질리지 않는 중독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의 배를 쓰다듬던 나는 그녀의 배꼽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고 그녀는 기묘한 감각에 가볍게 몸을 떨었다.
“흐읏!”
이비의 흐트러진 모습을 좀 더 보고 싶었던 나는 기습적으로 그녀를 침대에 눕힌 뒤 배꼽에 입술을 맞췄다.
내 혀가 이비의 배꼽 안을 기어 다닐 때마다 그녀는 물가에서 끌어 올려진 물고기마냥 몸을 펄떡이며 몸부림쳤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게 꽉 붙잡은 뒤 마음껏 그녀의 배를 희롱했고 그때마다 그녀는 들뜬 신음을 내뱉어야 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나는 슬슬 마사지를 멈췄다. 밥도 너무 뜸을 들이면 질어지는 법이었기에 이제 슬슬 본방에 들어가려던 찰나 아무런 전조도 없이 벌컥 하고 문이 열렸다.
당연히 나와 이비는 화들짝 놀라서 그대로 굳을 수밖에 없었고 문을 연 당사자인 힐데는 짜게 식은 눈으로 날 노려보며 얘기했다.
“밥. 식습니다.”
“아… 어, 응. 미안.”
“그리고 오늘은 제 차례입니다.”
힐데가 이비를 쏘아보며 얘기하자 이비는 금세 쭈글해졌고 나는 죄인의 심정으로 힐데를 뒤따라 밖으로 나왔다.
거실에는 언제 일어났는지 칼리나도 나와서 식탁에 앉아 있었는데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힐데의 뒤를 졸졸 따라오는 나와 이비를 보고는 알 만하다는 듯 히죽 웃었다.
네 명이 전부 다 식탁에 앉자 나는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아침부터 밥 차리느라 고생 많았어 힐데.”
“아침부터 세 명을 만족시키느라 고생하는 당신만 하겠습니까? 참, 종마도 그 정도는 아닐 건데 대단하다는 말밖에 안 나오는군요.”
“크흠… 흠. 그보다 새로 이사를 할까 하는데 다들 어떻게 생각해?”
“이사? 너무 뜬금없는 거 아냐?”
칼리나가 된장국을 마시며 물었고 나는 계란말이를 베어 물며 대답했다.
“사람들 시선이 영 이상하더라고.”
물론 이해는 한다. 그야, 국적도 서로 다 달라 보이는 이들 4명이 다 같이 모여 살고 있는 걸 보면 당연히 말이 나올 수밖에 없겠지.
“당신이 그런 것도 신경 썼습니까?”
“굳이 말 나와서 좋을 건 없잖아.”
“하긴, 그것도 그렇고 여기는 방음이 잘 안 돼서 영 안 좋더군요. 신음 소리가 제 방까지 들리는 게 오딘의 힘이 떨어지는 와중에도 정력은 남았나 봅니다.”
젠장. 오늘 힐데는 이 주제를 끝까지 물고 늘어질 모양이었다. 오늘은 자기 차례인데 그렇게 정력을 낭비한 것에 대한 항의겠지.
이비는 자신이 잘못한 게 있기에 묵묵히 밥만 먹고 있었고 칼리나 역시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힐데의 분노를 피해갔기에 천상 내가 그녀의 분노를 혼자서 감당해야 했다.
“음… 그러고 보니 오늘은 칼리나 네가 저쪽으로 넘어가던가?”
비난과 경멸이 잔뜩 섞여 있는 힐데의 매도가 이어졌지만 나는 굴하지 않고 기어코 화제를 돌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다행히 칼리나는 곧바로 대답해주었다.
“맞아. 베네치아 놈들이 족쇄가 너무 무겁다고 교황 앞에서 발작할 것 같더라구. 미리 가서 적당히 돈이나 처발라주고 와야지.”
“제노바 쪽 외교 대사랑 같이 가면 교황도 알아서 처신하겠지.”
“아, 그리고 오토가 시간 나면 한번 방문해달라고 하더라. 아마 사자공이 죽을 때가 가까워져서 그런 모양이야.”
“아… 하긴, 오토 입장에선 권력의 공백을 최대한 줄이고 싶겠지. 알겠어.”
나는 집 한구석에 일렁이는 차원문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비록 이쪽 세계로 넘어오긴 했어도 나는 여전히 제국의 공작이자 용담공이었으니까.
그렇게 저쪽 세상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아침 식사가 끝났고 이비는 잘 먹었다는 말과 함께 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서둘러 집 밖으로 도망쳤다.
칼리나 역시 넘어가기 전에 준비할 게 있다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기에 거실에 남은 건 나와 힐데뿐이었다.
“라그나르. 당신도 곧 나가봐야 하지 않습니까?”
“아? 어어. 10시에 만나기로 했으니까 지금 나가면 딱 맞을걸?”
“잘 다녀오십시오. 항상 얘기하지만 운전 조심하시고요.”
“어, 그래. 고마워.”
다행히 화는 풀어진 것처럼 보였기에 한층 가벼워진 마음으로 현관문을 나서려는 때 힐데는 얼굴을 붉히며 내게 다가오더니 내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오늘 저녁은 정력에 좋은 것들로 준비해둘 테니 각오하고 오십시오.”
물론 그 말을 들은 내가 곧장 그녀를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간 건 당연한 일이었다.
* * *
약속했던 시간보다 살짝 늦게 카페에 도착한 나는 구석 자리에 앉아서 폰을 보고 있는 남자의 맞은편에 앉으며 인사를 건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편집자님. 차가 밀려서 조금 늦었네요.”
“괜찮습니다. 많이 늦으신 것도 아니고요. 커피는 제가 미리 시켜놨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따가 밥은 제가 사도록 하겠습니다.”
“에이, 어차피 법카 긁으면 되는데요. 그보다 보내주신 원고는 다 읽어봤습니다.”
“괜찮나요?”
“네. 뭐, 이 정도면 심사는 충분히 통과할 것 같네요. 다만 현재 트렌드상….”
편집자는 내가 보낸 원고를 조목조목 훑으며 피드백을 해주었고 나는 자세를 바로 한 채 의견을 경청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훌쩍 흘러 12시가 되었고 편집자는 다소 지친 표정으로 남아 있는 커피를 전부 들이켰다.
“뭐, 일단 제 의견은 이렇습니다. 근데 글이라는 게 쓰다 보면 항상 바뀌기 마련이고 결국 글을 쓰는 건 작가님이니 이런 의견도 있다 정도만 하시면 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그럼 시간도 딱 됐는데 바로 식사하러 가시죠. 여기 근처에 맛집이 있더라고요.”
내 말에 쓰레기를 주섬주섬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편집자는 깜빡 잊었다는 것처럼 내게 물었다.
“아, 작가님. 혹시 소설의 제목은 뭘로 하실 건가요? 따로 생각해두신 게 있으신가요?”
편집자의 물음에 잠깐 동안 고민하던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게임 속 바이킹이 되었다가 좋을 것 같네요.”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게임 속 바이킹이 되었다의 작가 매드캣입니다.
이번 편을 끝으로 본편은 끝났지만, 이후에 외전을 몇 편 쓸 생각입니다.
외전은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와 칼리나 디 카노사의 만남을 비롯한 과거의 일들에 대해 다룰 예정입니다.
마지막까지 라그나르의 여정에 함께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