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화
[에필로그]
― 굿모닝. 빠빠 빠빠빠 빠빠~
일어나기를 재촉하는 녹음된 기계의 소리.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그 이유가 뭐든 저 알람소리를 극도로 혐오할 테지만 내게는 아니었다.
적어도 저 소리로 인해 내가 현재 있는 곳이 야만과 배신이 판치는 중세가 아니라 현대임을 일깨워주는 문물이었으니까.
물론 그건 처음에나 그랬다는 얘기고 지금에 와서는 흉물스럽고 듣기 싫은 소리에 불과했다. 묵이 은어에서 도루묵이 된 건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하….”
긴 한숨과 함께 알람을 끈 나는 다시 이불을 덮었다. 어차피 알람은 15분 간격으로 2개를 맞춰놨으니 다음 알람까지는 좀 더 자도 괜찮을 터였다.
그렇게 다시 잠깐의 달콤함에 취하려는 때 내가 덮고 있는 이불이 꼼지락거리며 움직이더니 따스한 체온을 지닌 무언가가 나를 휘감았다.
물론 난 그 괴생명체의 정체를 알고 있었기에 슬쩍 이불을 들치며 안부인사를 건넸다.
“잘 잤어? 칼리나?”
“으음… 아니, 더 잘 거야.”
“슬슬 일어나야 될 것 같은데?”
아직 두 번째 알람이 울리진 않았지만 그래도 지금 일어나는 게 좀 더 여유로운 아침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몸이 늘 생각대로 움직이는 건 아니었지만.
“아직 알람이 한 번밖에 안 울렸잖아? 조금만 더 같이 자자.”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였다. 아직 2번의 기회가 남았으니 30분… 아니 시간이 조금 더 지났으니 25분 정도는 여유가 있는 셈이었다.
물론 마지막 알람에 일어난다는 건 꽤 많은 걸 희생해야 한다는 말과 같았다. 가령, 느긋하게 샤워할 수 있는 시간이라던가, 아침을 먹는다던가 하는 그런 것들 말이다.
나야 그렇다 쳐도 머리가 긴 칼리나는 제대로 머리를 말리지도 못한 채 허겁지겁 나가야겠지.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에 조금 더 잘 수 있다는 사실은 그 모든 것들을 포기할 값어치가 있었다. 흔히들 아침의 30분은 1시간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하지 않던가?
“그렇긴 한데….”
내가 고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건지 그녀는 여우처럼 눈웃음치며 나를 가볍게 끌어안았고 그녀의 피부에 배어있는 은은한 체취가 내 코를 간질였다.
나도 그렇고 칼리나도 그렇고 잘 때 속옷을 제외하고는 전부 벗고 자는 스타일이었기에 맨살을 통해 그녀의 부드러우면서도 따뜻한 피부의 감촉에 나는 피가 쏠리는 걸 느꼈다.
“자는 게 싫으면 이건 어때? 20분 정도면 가볍게 한 번 하기에는 딱 좋은 시간이잖아?”
그녀는 나를 유혹하듯 귓가에 대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하지만 과거 몇 차례 그녀의 유혹에 넘어갔다가 파국을 맞이한 경험이 있던 나는 고개를 흔들며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그러다 걸리면 힐데가 화낼걸?”
힐데를 언급하자 칼리나가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더욱더 내게 몸을 밀착시키며 은근한 어조로 얘기했다.
“그치만 그게 더 스릴있잖아? 안 그래?”
이대로 그녀의 유혹에 넘어갈까도 생각했지만 난 고개를 저었다. 요새 힐데의 심기가 불편했다. 이 이상 그녀의 화를 돋울 순 없다.
“안 돼. 너무 늦었어. 더 늦으며 진짜 혼날 거야.”
물론 내 말에도 칼리나는 듣는 척도 하지 않은 채 내 목덜미에 키스하기 시작했고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되면 천상 그 방법밖에 없기에 나는 오른손을 슬며시 이불 아래로 넣었다. 물론 그 손이 어디로 향할지는 명확했다.
“흐윽…흣!”
딱히 눈으로 보지 않아도 대략적인 위치만 파악되면 얼마든지 그녀를 꼼짝 못 하게 만들 수 있었다. 굳이 손가락을 다 쓸 것도 없이 약지와 중지면 충분했다.
“아윽… 라그나르… 자, 잠깐만… 내가 잘못…흐윽!!”
내 손이 꾸물거리며 그녀의 안을 휘젓자 칼리나는 싫다는 듯 내게서 떨어지려 했지만 나는 왼손으로 그녀의 가는 허리를 붙잡은 채 조금 더 스피드를 올렸다.
어느새 찰박거리는 물소리와 함께 그녀가 내뱉는 들뜬 신음이 격해졌고 나는 거칠게 손을 뽑아냈다. 그녀는 이 난폭한 처사가 불만족스럽겠지만 솔직히 이걸로 참아줬으면 좋겠다.
“오늘은 이걸로 참아줘. 먼저 일어날 테니까 나중에 나와.”
나는 숨을 헐떡이는 그녀의 목덜미에 가볍게 키스해준 뒤 방을 나섰고 이내 늘어지게 하품을 하면서 계단을 걸어내려왔다.
뜨거운 물로 간단한 샤워를 마친 나는 젖어있는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며 주방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앞치마를 입은 힐데가 요리를 하고 있었고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힐데는 어려서부터 나와 단둘이서 살았고 함께 용병생활을 하며 노숙을 자주 해서 그런지 기본적으로 요리에 능숙했고 실제로 그녀가 아침을 맡은 날은 실패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탕.탕.탕.
규칙적으로 음식물이 썰리는 그 소리가 나름 리드미컬하다 생각한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좋은 아침이야. 잘 잤어? 힐데?”
평상시에 시니컬하고 차가운 얼굴을 보여주는 힐데였지만, 그녀는 전형적인 외강내유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녀는 이런 노골적인 애정표현에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모습을 보여줬고 나는 그녀를 놀려줄 생각으로 스윗한 바이킹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니요. 그 가슴만 큰 년이 내뱉은 교성 때문에 잠을 못 잤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묵묵히 애호박을 썰면서 대답했다. 그뿐이라면 다행일 테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냉기가 펄펄 흘러넘치고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저 난폭한 식칼 소리는 복선이 아니었을까?
“어… 어… 음….”
“칼리나와 꽤 즐기신 모양이군요? 오늘 아침까지 말입니다.”
그녀의 눈빛이 젖어있는 내 오른손을 훑었고 나는 나도 모르게 오른손을 숨기고 말았다.
“저, 힐데… 그러니까 나는… 어….”
머릿속이 새하얘졌지만, 나는 무슨 변명을 해야 할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런다고 그럴듯한 대답이 나올 리가 없었기에 내 침묵은 시간이 갈수록 길어졌다.
“후우… 됐습니다. 당신이 이러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요.”
힐데는 포기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썰었던 애호박을 된장찌개에 넣었고 나는 최대한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텐션을 올렸다.
“와아… 된장찌개 맛있겠네?”
“글쎄요… 당신은 오늘 새벽에 이것보다 더 맛있는 걸 먹은 것 같습니다만.”
“….”
이건 답이 없다. 그냥 잘못했다고 비는 것밖에 없겠지. 아니야. 조금 색다르게 해서 부엌에서 한번 만족시켜줄까?
솔직히 새벽에 칼리나에게 쪽쪽 빨리긴 했지만 그래도 한 번 정도라면 힐데를 만족시켜줄 수 있을 것이다. 그게 힘들면 신성력 버프라도 받아야겠지만.
그렇게 다짐하고 결연한 표정을 지은 나는 힐데가 뭐라 하기도 전에 그녀에게 달라붙어서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그러고 보니 힐데 최근에 어깨가 결린다고 했지? 모처럼이고 하니 마사지나 해줄까?”
내 말에도 힐데는 묵묵하게 요리에 집중했는데 침묵은 긍정이라 생각한 나는 조심스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
다만 생각보다 반응이 약했기에 나는 남아있는 신성력을 끌어모아 필사적으로 쉐이드 마법을 사용했다.
사실 이번에 처음 사용해 보는 거였지만, 힐데의 기분을 풀어주기엔 이것만 한 게 없을 것이다. 내 손을 떠난 신성력이 얇게 퍼지며 그녀의 전신으로 흡수됐고 반응은 순식간이었다.
“흐윽!?”
고양이가 물에 닿은 것마냥 힐데의 어깨가 움찔였고 그녀는 고개를 휙 돌려 나를 노려보았다.
“자, 지금 뭘 한 겁니까?”
“응? 뭐가?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보다 긴장 좀 풀어. 근육이 너무 뭉쳤잖아.”
나는 그녀의 어깨를 주무르던 손을 천천히 내리며 팔 전체를 쓰다듬었고 그때마다 그녀의 입에선 가녀린 한숨이 새어나왔다.
“흐읏… 읏… 그, 그만두십시오.”
물론 난 그녀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좀 더 노골적으로 손을 움직였다. 오른손은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고 꽉 끌어안았고 왼손으로는 그녀의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가볍게 붓끝과도 같은 터치만을 이어갔는데도 힐데는 평상시보다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모습은 나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점차 과감해지는 내 손길에 무언가 위기감을 느낀 건지 그녀는 내 손아귀를 벗어나기 위해서 이리저리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신의 손길을 벗어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고 나는 버둥거리는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다 보니 얼떨결에 그녀의 겨드랑이가 활짝 드러났는데 나는 뭐에 홀린 것처럼 그곳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라그나르. 당신 지금 뭘 하고…흐으읏!”
내가 뭘 하고 있는지 깨달았을 때는 이미 힐데의 겨드랑이에 코를 박은 채 킁킁거리고 있었다.
아쉽게도 씻고 나온 지 얼마 안 돼서 별다른 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겨드랑이 특유의 코를 찌르는 듯한 냄새가 내 코를 찌르고 들어왔다.
물론 그런 나와는 다르게 힐데는 미친 듯이 발버둥을 치면서 욕설을 내뱉었다.
“흐윽… 미친 거 아닙니까!? 대체 이게 무슨… 읏!”
아무래도 라그나르의 기벽은 현대로 돌아와서도 여전히 내게 영향을 끼치는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힐데가 화낼 걸 알면서도 입을 열고 혀를 내밀었다.
그리고 그 순간 힐데에게선 난생처음 들어보는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흐으으으읏!!!!!”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널브러졌고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끌어안은 뒤 바닥에 앉혀주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헐떡이며 몸을 떤 그녀는 눈물이 어린 얼굴로 날 노려보며 소리쳤다.
“주, 죽여버릴 겁니다….”
늘 생각하지만 힐데의 말은 반대로 생각하면 편했다. 물론 진짜 싫어서 싫다고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그걸 구분 가능했다.
그리고 저 말은 굉장히 만족했다는 말과 동일했기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넉살 좋게 대꾸했다.
“이왕 죽일 거면 침실에서 복상사로 죽여주는 게 어때?”
내 말에 그녀는 이를 악물더니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로 다시 주방에 섰다. 그 모습이 너무 위태위태하게 보였기에 나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침 차리는 거 도와줄까? 조금 힘들어 보이는데.”
“…됐습니다. 당신이 도와줬다간 오늘 아침은 물론이고 저녁까지 굶어야 될지도 모릅니다.”
물론 저게 내 요리실력을 못 믿어서 저러는 건 아닐 터였다. 그녀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제대로 불붙으면 오늘 칼리나와 이비는 쫄쫄 굶어야 할 테니까.
“전 됐으니 가서 이비나 좀 깨우고 오십시오.”
“어? 그러고 보니 이비가 안 일어났네?”
그녀는 의대생이었기에 우리보다 훨씬 더 빠른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평상시라면 진작에 씻고 나와 아침을 먹고 출근 준비를 하고 있을 터였다.
“제출할 레포트가 있어서 어제 밤을 샌 모양입니다. 그것도 아니면, 누구 때문에 제대로 집중을 못 했을지도 모르고요.”
날이 서 있는 힐데의 말에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조용히 발걸음을 돌렸다. 달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라 했던가.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침묵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