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화
내가 사투 끝에 펜리르를 사냥하고 나서 뜬 메시지는 단 한 줄이었다.
― 오딘의 마지막 룬마법 [초월]이 해금되었습니다.
“초월이라고?”
난 턱을 긁으며 생각에 잠겼다. 분명 오딘이 사용할 수 있는 룬마법은 총 18가지였다.
뭐 일설에 의하면 몇 가지 마법을 더 사용할 수 있다고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건 17가지였다. 개중에는 여러 유용한 마법도 있었고 굉장히 음습한 마법들도 있었다.
가령 이전에 펜리르와 싸우며 썼던 방어마법도 있었고 주문 반사나 치유 마법도 있었다. 반면 유혹이나 매료 같은 용도가 명확한 마법들도 있었다.
가령 유혹의 마법은 마음에 드는 사람을 자신에게 반하게 하는 마법이었다. 제우스만큼은 아니었지만, 오딘도 나름대로 여성 편력이 대단한데 아마 이 유혹마법이 한 팔 거들었겠지.
매료 마법은 유혹과 함께 연계하는 마법으로 반하게 만든 이의 사랑이 영원토록 변치 않게 만드는 마법이었다.
아마 영원불멸의 사랑을 원하는 북유럽인들의 음습한 욕구가 오딘의 룬마법이라는 형태로 적용된 게 아닐까? 물론 바이킹들의 행태를 보면 순애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중요한 건 마지막 18번째 마법이었는데 이건 불명이었다.
말 그대로 알 수 없다는 말이었는데 실제로 오딘과 연관된 전승을 살펴보면 오딘이 사용하는 마법은 18가지라고 적혀있지만, 상세한 항목이 적혀 있는 건 17가지뿐이었다.
근데 지금 그 마지막 마법이 해금됐다고? 심지어 제법 강력해 보이는 마법이었다. 굳이 설명을 읽지 않아도 초월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어감이 있지 않던가.
[초월 마법]
― 오딘의 마지막 룬마법.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으며 오직 마법의 극한에 이른 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
“이게 뭐라고 읽는 거지? 라크… 사―카… 모즈하?”
그 순간 허공에 배열된 룬문자들이 빙글빙글 돌아가더니 폭발을 일으켰다.
“컥!”
부지불식간의 폭발이었기에 나는 그 어떤 대처도 하지 못했고 그대로 허공을 날다가 땅에 곤두박질쳤다.
“이런 시발. 인간적으로 튜토리얼 같은 건 있어야 되는 거 아냐?”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욕설을 내뱉었다. 잠시 바닥에 드러누워 현기증을 흘려보낸 나는 오뚜기처럼 일어나 초월 마법을 차근차근 살펴보았다.
초월 마법은 괜히 오딘의 마지막 룬마법이 아닌 건지 들어가는 신성력의 양이 다른 마법들과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함부로 막 쓸만한 건 아니네. 하루에 세 번… 아니 두 번도 간당간당하겠네.”
중간에 마법이 발동하다 폭발한 건 신성력이 모자라서 그런 거였다. 신성력이 말은 거창해 보이지만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신성한 ‘힘’이었다.
그 힘이 한데 모였다가 제대로 제어되지 못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냥 폭발하는 거다. 특히 초월 마법은 들어가는 신성력이 많으니 폭발의 규모도 컸던 거고.
“힘이 빠져있던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되나?”
애초에 펜리르와 싸우고 난 뒤였기에 몸에 남아있는 신성력이 얼마 없었다. 그러니 그 정도의 폭발에서 그친 거겠지.
만약 규모가 조금만 더 컸다면… 음,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늑대들의 왕이라고 불리던 펜리르까지 잡아냈는데 찐따처럼 혼자 마법 쓰다가 폭사당한다?
이건 마법의 신에게 더할 나위 없는 수치스러운 죽음이었다. 만약 로키가 봤다면 역시 세이드 마법이나 쓰면서 쾌감을 느끼는 변태 새끼에게 걸맞은 최후라고 욕하겠지.
“그나저나 세이드라… 힐데한테 한번 써보고 싶네.”
세이드 마법은 오딘이 프레이야에게 배운 예언 마법인데 이는 대체적으로 여자 무녀들이 쓰는 마법이었다.
쓸려고 하면 남자도 얼마든지 쓸 수 있었지만, 굉장히 지양되는 행위였는데 그도 그럴 게 이건 성적인 주술이었다.
보통 세이드는 마법 지팡이를 사용해 주술을 펼치는데 보통 이 시기의 지팡이는 음경을 상징했다.
그런 만큼 만약 이걸 남자가 쓴다면 어떻게 쓸지 대충 상상이 되잖은가? 터부시되는 건 다 그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아무튼, 이 세이드 마법의 특징은 사용할 때 여자들이 성교를 할 때 느끼는 오르가즘과 비슷한 황홀경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마법이었다.
그런 만큼 힐데나 칼리나, 이비에게 쓴다면 제법 볼만하지 않겠는가. 언젠가는 셋 전부에게 써봐야겠다고 굳게 다짐한 나는 자세를 바로잡은 뒤 초월 마법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펜리르를 잡은 뒤 초월 마법이 개방된 건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는 말만으로도 대강 그 용도를 짐작할 수 있었고.
“어디 보자. 일단 이 라크라는 단어가 시간을 의미하는 거고….”
기억을 더듬어가며 주문을 이루는 단어들을 하나씩 해체해 그 뜻을 살펴보았다. 결국 룬마법이라는 것도 마법의 힘이 깃든 단어들을 순서에 맞게 배열하는 것에 불과하니까.
내가 사용하는 방어 마법도 날붙이라는 단어에 막다라는 단어를 합성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 이 초월 마법도 단어를 하나하나 분석하다 보면 어떻게 쓰는지 알게 되겠지.
“계속 연습하는 방법밖에 없겠네.”
이게 게임이었다면 몇 번 연습하면 습득할 수 있겠지만 이건 현실이었다. 맨섬에 머무는 시간이 조금 길어질 테지만 그래도 일주일 정도면 감을 잡지 않겠는가?
* * *
내가 대충 이야기를 끝내자 그걸 가만히 듣고 있던 힐데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서 세 달 동안 맨섬의 동굴에 틀어박혀 있다가 온 겁니까?”
“아니, 근데 나는 진짜 세 달이나 흘렀는지 몰랐어. 실제로 동굴 안에 있던 건 일주일이었거든.”
아무리 동굴 안에 있다지만 해가 뜨고 지는 건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신이라서 평범한 인간과 다르다고 해도 7일과 90일의 시간 흐름을 구분 못 하겠는가?
“근데 왜 세 달이나 머물렀던 겁니까?”
“음… 아마, 내가 초반에 조금 어설프게 마법을 써서 시간이 뒤틀린 게 아닐까 싶어. 이게 보기보다 힘든 마법이거든.”
시간 마법은 간단히 얘기해 덧셈과 뺄셈이었다. 현재를 0이라고 치면 태엽을 어떻게 감느냐에 따라 미래로 갈 수도 있고 과거로 갈 수도 있는 거니까.
다만 시간의 특성상 뒤로 되돌리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기에 내가 쓴 마법의 대부분은 시간의 흐름을 당기기만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3개월의 시간이었다.
“그거 자칫 잘못했으면 몇 년이 시간이 훌쩍 흘렀을지도 모르는 거 아닙니까?”
“어쩌면 몇십 년이 흘렀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속담을 이곳에서 재현할 뻔했다. 만약 그랬다면… 음,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물론 이 마법을 숙달한 이상 시간을 되돌려 다시 이 시간대로 돌아올 수 있을 테지만 그렇다고 미래가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었다.
즉, 내가 과거의 오딘으로서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다시 시간을 되감는다고 한들 그녀들은 미래의 기억을 그대로 가진 채 과거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건 그녀들에게 있어 몇십 년간의 삶이 통째로 부정당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는 굳이 더 말할 것도 없겠지.
“다행이군요. 몇십 년 동안 당신을 그리워하지 않아도 돼서.”
뜬금없이 툭 던지는 힐데의 말에 나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녀는 알지 모르겠지만, 가끔 저렇게 한마디씩 툭툭 던지는 게 굉장히 사랑스럽다.
“뭡니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십시오.”
“가끔 생각하는데 너 진짜 귀여운 거 알아 힐데?”
내 직설적인 말에 힐데는 얼굴을 붉히며 톡 쏘아붙였다.
“시끄럽습니다. 그래서, 할 이야기는 이게 전부입니까?”
“아니, 그건 아니야. 사실 진짜는 이제부턴데….”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봐. 라그나르. 그러니까 당신이 사실은 오딘이고 펜리르인지 뭔지 하는 늑대를 쓰러뜨렸다는 거지?”
중간에 칼리나가 내 말을 끊고 들어오며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물론 나는 내가 얘기한 것에 단 한 치의 거짓도 없었기에 긍정의 의미를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미치겠네. 이걸 어디서부터 믿어야 되는 거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믿으면 돼. 눈앞에 진실이 있는데 외면할 이유가 어디 있어?”
“저기. 라그나르. 내 입장도 좀 생각해줘. 당신이 날 떠나있던 기간이 1년을 조금 넘었어. 근데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나더니 짜잔~ 사실 저는 오딘입니다! 라고 얘기하면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는 거야?”
“그렇게 얘기하니 또 그렇긴 한데… 그래도 그게 사실인데 어쩌겠어?”
나는 그녀의 이해를 돕기 위해 신성력을 끌어 올리며 허공에 룬문자들을 띄웠고 칼리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을 뿐이었다.
근데 이 정도로 놀라면 곤란하다. 그녀들이 마주해야 할 진실은 이게 끝이 아니었으니까.
“자, 일단 지금까지 내가 얘기한 건 대강 이해했지?”
“이해는 안 되지만 대강 알아들었어. 결과적으로 당신이 오딘이라는 거잖아?”
“맞아. 그리고 나는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야.”
“뭐?”
칼리나는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카톨릭도 보면 천국이나 지옥 뭐 이런 세계들이 있잖아? 그런 거랑 비슷하다고 보면 돼.”
“아니….”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놀랄 힘도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원래 진실을 마주하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솔직히 지금 와서 그녀들에게 거짓말을 하기도 싫고.
“믿기지 않겠지만 이게 진실이야. 아마 내 생각인데 오딘… 그러니까 과거의 나는 펜리르에게 죽기 전에 이 초월 마법을 쓴 것 같아.”
“좀 더 자세히 얘기해봐.”
“아마 과거의 나도 자신이 무슨 짓을 하든 예언이 실현될 거라는 것을 깨달았을 거야. 그렇기에 자신의 죽음을 트리거로 영혼에 초월 마법을 새겨넣은 거지.”
“그게 가능해?”
“내가 누군지 잊었어?”
마법의 신이자 마법의 지배자라는 별명은 어중이떠중이한테 붙는 칭호가 아니었다. 어렵고 힘들지언정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게 라그나로크에서 펜리르에게 죽었을 때 초월 마법이 발동했고 나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전혀 다른 곳에서 다시 태어난 거야. 그리고 긴 시간이 흘러 다시 여기로 돌아온 거고.”
“근데 뭐가 잘못됐는지 날 삼켰던 펜리르의 영혼도 같이 시간을 거스르게 된 거야. 그래서 내가 이 세계로 다시 돌아오니 펜리르도 죽음에서 다시 돌아온 거지.”
이게 내가 동굴에 틀어박혀 있을 때 정리한 결과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가설에 불과했지만 이게 가장 그럴듯한 추론이었다.
“이게 당신이 얘기한 비밀의 전부야?”
“맞아. 그래서 어때?”
“어떠냐고 물어봐도… 솔직히 나는 당신이 뭐든 상관없어. 당신이 오딘이든 제우스든, 아니면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사탄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뭐?”
“솔직히 놀라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날 저 깊은 심연의 나락 속에서 구해준 건 당신뿐이야. 그건 변치 않는 사실이잖아?”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절 아포피스의 저주로부터 구원해주신 건 주군이셨잖습니까? 그리고 전 그런 주군을 향해 끝까지 함께한다고 맹세했습니다.”
“라그나르. 설마 이제 와서 이걸 빌미로 절 버리겠다는 건 아니겠지요? 제가 당신을 몇 년 동안 쫓아다녔는지 알고 있습니까?”
내 정체가 드러났음에도 여전히 변치 않는 신뢰와 믿음을 보내는 셋의 모습에 나는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내가 퀘스트를 완료하지 않은 건 그녀들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내 고민이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녀들은 시원스럽게 날 믿어주었다. 그렇다면 내 나름대로 각오를 보여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마음을 정리한 나는 퀘스트 창을 켰다. 메인 퀘스트는 완료됐지만, 아직 완료 버튼을 누르지 않았기에 퀘스트 창의 내용은 이전과 똑같은 메시지를 내뱉고 있었다.
[스스로의 운명을 극복한 위대한 신이시여. 당신의 이름은 전설로 남을 것입니다.
그러니 묻겠습니다. 오딘이시여.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을 이겨낸 그대는 앞으로 어떤 길을 걸으시겠습니까?
원한다면 당신은 이곳에 계속 머무를 수도, 아니면 이곳을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선택은 언제나 그랬듯 당신의 몫입니다.]
만약 이게 게임이었다면 이건 더 게임을 즐길 거냐, 아니면 이걸로 끝내겠냐는 질문이었겠지.
게임이라면 두 개의 선택지 중 하나를 반드시 골라야 했을 테지만 여긴 현실이었고 그렇기에 난 제3의 선택지를 고르기로 마음먹었다.
애초에 초월 마법도 그럴 목적으로 풀어준 게 틀림없었다. 초월 마법이 진정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다면 내가 원래 살았던 곳으로 가는 것도 가능할 테니까.
물론 그게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이미 오딘은 과거에 한 번 성공한 경험이 있었다. 과거의 내가 해낸 것을 지금의 내가 못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렇기에 나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가지며 주문을 외웠다.
“라크 사―카 모즈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