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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바이킹이 되었다-192화 (192/205)

▣ 192화

도끼질 한 번에 날 몰아붙였던 펜리르는 죽음을 맞이했고 나는 천천히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펜리르를 바라보며 허탈감에 중얼거렸다.

“허무하네.”

이 순간을 위해 죽을 둥 살 둥 달려왔는데 막상 그 결과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허무했다. 고작 이걸 위해서 내가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준비를 한 게 어이가 없을 정도로.

지금 내 기분을 굳이 표현해보자면… 그래. 고3 겨울에 수능을 치고 나왔을 때나 20대 초반에 군대를 전역했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과거에 오직 수능을 위해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까지 총 12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런 12년의 노력이 보답받을지 아닐지 고작 8시간 만에 판가름이 났다.

군대 역시 매한가지다. 21개월의 청춘을 바쳤지만, 그 대가로 받은 건 작은 전역증 하나였다. 허리의 통증은 덤이었고.

지금 내가 느끼는 허무함도 딱 그와 같았다. 마지막을 위해 달려왔던 내 노력은 채 하루도 안 돼서 끝나버렸다.

“하… 그나저나 힐데한테 가서 뭐라고 말하지?”

짜잔~ 실은 나 오딘이었지롱? 아니야. 그랬다간 드디어 미쳤냐면서 이비에게 진찰받아보자고 끌려가겠지.

솔직히 나라도 힐데가 와서 ‘라그나르. 사실 저는 아일랜드의 신화에 나오는 여신입니다. 그것도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바이브 카흐입니다.’라고 하면 미친년 쳐다보듯 쳐다볼 테니까.

거기에 솔직히 난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도 그렇잖은가?

글도 못 읽는 야만인 바이킹이었던 내 정체가 사실은 북유럽 최고의 주신 오딘이었다? 젠장. 소설 제목으로 쓰면 반응이 참 열화와 같겠네.

이쯤 되면 기묘하다 못해 어이가 없었기에 나는 미친놈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혼자서 실컷 웃은 나는 바닥에 드러누워 퀘스트 창을 열었다.

뭐, 허무한 건 허무한 거고 보상은 보상이지. 솔직히 이쯤 되면 대체 메인 퀘스트의 보상이 뭘까 궁금하기도 했다.

날 현실로 돌려보내 줄까? 아니면 그저 일반 퀘스트보다 조금 좋은 보상을 주는 것에 그칠까?

그렇게 기대감을 품은 채 퀘스트 창을 조작하며 보상의 내용을 살펴본 나는 입을 다문 채 눈살을 찌푸렸다.

“보상이 고작 이거야? 어처구니가 없네.”

* * *

<웨식스 연합 왕국 ― 런던>

영국은 물론이요, 아일랜드의 전역을 통일한 연합왕국의 여왕이라는 영광된 자리에 최초로 오른 힐데가르트는 지금 굉장히 기분이 굉장히 언짢았다.

“사람한테 귀찮은 일을 떠넘기고 대체 어디로 간 건지 모르겠군요.”

라그나르 덕에 가문의 숙원이었던 여왕의 자리를 되찾았지만, 솔직히 자신에게 그딴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애초에 여왕위에 오른 것도 라그나르가 권해서 그런 것일 뿐 그가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집어던질 수 있었다. 물론 왕위를 되찾는 게 평생의 숙원이었던 아버지는 슬퍼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버지였고 가문은 가문이었으며 자신은 자신이었다. 애초에 아버지도 자신이 고드윈이라는 가문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를 원치 않으셨던가.

거기에 자리에 미련이 없는 건 굳이 왕위뿐만이 아니었다. 정화교단의 성녀라는 자리도 그가 원한다면 미련 없이 내려놓을 수 있었다.

애초에 성녀라는 자리를 받아들인 것도 그게 라그나르에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화 교단에 맡겨졌을 때 라그나르를 좀 더 빨리 찾아가지 않은 것도 그와 비슷한 이유였다. 적어도 전투사제 정도는 달고 라그나르를 찾아가야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문제는 정작 자신에게 온갖 귀찮은 일을 떠넘긴 라그나르의 소식이 끊어졌다는 점이었다.

“그때 붙잡았어야 했나?”

영국의 통일 전쟁에서 유일한 맞수였던 존 왕과 맞붙어 승리했을 때, 라그나르는 승리에 대한 기쁨이 아닌 불안과 짜증, 분노가 뒤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슬쩍 그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봤지만, 라그나르는 그저 희미하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 미소가 굉장히 덧없어 보였기에 차마 더 캐묻지 못했다.

몇 년 전, 라그나르가 자신을 정화교단에 맡길 때도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조마조마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라그나르는 남아있는 이들에게 스코틀랜드를 점령해 마지막 과업을 완성해달라는 부탁을 남긴 뒤 훌쩍 맨섬으로 떠났다.

그리고 자신은 그렇게 떠나는 라그나르를 붙잡지 못했다. 그는 따라가겠다고 억지를 부리는 자신에게 금방 돌아올 거라며,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얘기했으니까.

그렇기에 기다렸다. 라그나르는 언제나 거짓말쟁이에다 껄렁껄렁하고 심술궂은 남자였지만 적어도 자신과 한 약속을 어긴 적은 없었으니까.

그렇게 그가 자신을 떠난 지 3개월이 지났고 여전히 그의 행방은 묘연했다. 처음 한 달까지는 괜찮았다.

라그나르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고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떠났다는 건 그만큼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마주했다는 얘기였으니까.

그렇게 두 달이 지났을 무렵, 자신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맨섬에 병력을 파견해서 그 인근을 샅샅이 뒤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세 달이 되어갈 무렵, 그 어느 곳에서도 라그나르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는 보고가 올라왔고 그때마다 속이 타들어 갔다.

괜스레 신성 제국의 변경백인 칼리나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녀도 라그나르가 백작위를 되찾아주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고 했었지.

만약 그렇다면 자신도 여왕위에 올려줬으니 볼일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곁을 떠난 게 아닐까? 불안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요동쳤고 자신도 모르게 손톱을 깨물었다.

“라그나르의 소식은 아직인가?”

“여왕 전하. 병력들이 맨섬을 수색하고 있으니 곧 소식을 가지고 올 겁니다.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주십시오.”

가져오긴 했었다. 단지 그게 대지가 통째로 깎여나가고 멀쩡한 산이 파괴돼서 아수라장이 된 흔적만 발견해서 문제였지.

직접 가서 그 광경을 보지 않고 전해 듣기만 해도 그곳에서 격렬한 싸움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허나 누가 라그나르를 상대로 그렇게 몰아붙인단 말인가?

자신이 알기로 라그나르는 인간의 힘을 뛰어넘은 지 오래였다. 그 스스로도 오딘의 피를 이은 반신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혹시 안 좋은 일을 당한 건 아닐까? 머릿속에서 온갖 정보들이 뒤섞여 생산과 확대, 재생산을 반복했고 이내 자신의 머릿속에는 라그나르의 죽음이라는 불길한 망상이 자리 잡았다.

“역시 내가 직접 가야 돼.”

“예? 어딜 말씀이십니까?”

“맨섬. 지금 당장 갈 테니 채비하도록 하게.”

당연히 자신의 곁에 있던 귀족이나 보좌관들은 기겁하며 자신을 말리려 했지만 듣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에게 제일 중요한 건 라그나르였다. 거기에 세 달 정도면 많이 기다리지 않았던가?

그렇게 라그나르를 찾기 위해 막무가내로 왕궁을 나서려던 때 전령이 허겁지겁 다가와서 보고했다.

“여, 여왕 전하. 지금 용담공 전하께서 돌아오셨….”

그 보고에 힐데가르트는 여왕의 체통도 잊고 허겁지겁 달려 나갔다. 그렇게 눈앞에 있는 거대한 문을 열자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라그나르가 멋쩍은 미소를 지은 채 서 있었다.

* * *

“다녀왔어. 힐데.”

내 인사에 힐데는 눈물을 글썽이더니 주변의 눈초리도 신경 쓰지 않고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어릴 때와는 다르게 평상시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는데 이러는 걸 보면 제법 걱정을 끼친 모양이었다.

하긴, 일주일간 별다른 말도 없이 자리를 비웠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겠지. 하지만 힐데의 입에서 나온 말은 자신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말이었다.

“절 3개월이나 기다리게 해놓고 고작 한다는 말이 그겁니까?”

“뭐? 3개월이나 지났다고? 일주일이 아니라?”

내 말에 힐데는 무슨 말을 하느냐는 얼굴이었고 나는 한숨을 쉬며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이런 젠장.”

짐작되는 바가 없는 건 아니었다. 펜리르를 잡고 나온 퀘스트의 보상 때문에 근처에 있는 동굴에 틀어박혀서 수련을 좀 했는데 그사이 3개월이나 지난 모양이었다.

어쩐지 동굴에서 나왔을 때 날씨가 제법 쌀쌀한 것 같더라니 그게 다 이유가 있었군.

“그나저나 그 눈은 어떻게 된 겁니까?”

힐데는 내 눈가에 난 상처를 매만지며 물었고 나는 어물쩡 대답했다.

“이거? 흠… 덩치 큰 늑대가 가져갔어.”

펜리르의 일격은 강력했고 그 공격은 흉터가 되어 내 육신에 새겨졌다. 애초에 펜리르 같은 괴물과 싸우면서 다치지 않는다는 게 이상할 정도다. 오히려 이 정도에서 끝난 걸 다행이라고 해야겠지.

반면 힐데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입을 우물거리다 꾹 다물었다. 아마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겠지. 물론 그녀에겐 모든 이야기를 해줄 생각이었다.

힐데는 내 이야기를 들을 자격이 있었으니까. 다만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내 이야기를 들을 자격은 그녀 혼자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내가 삐져있는 힐데를 달래는 사이 소식을 들은 이비도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녀는 태생이 의사라서 그런지 곧장 내 얼굴을 반쯤 훑고 지나간 상처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 내 흉터를 매만졌다.

“그냥 작은 흉터야. 살펴봐도 별거 없을걸?”

내 말에도 불구하고 이비는 꿋꿋하게 내 상처를 진단했고 이내 한숨과 함께 내 얼굴에서 손을 뗐다.

“주군, 이건….”

“저주 같은 거야. 다만 아포피스의 낙인과 다르게 결코 지울 수 없는 낙인이지.”

물론 펜리르의 저주는 아니었다. 말하자면 이건… 오딘이 스스로 자신의 영혼에 새긴 낙인이었다. 단지 그게 펜리르를 통해서 새로운 육신에 새겨졌을 뿐이지.

평생을 애꾸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었지만 어쩌겠는가. 오딘은 지혜와 지식을 위해 자신을 제물로 바쳤다.

그런 만큼 나 역시 룬마법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선 대가가 필요했고 그게 바로 오른쪽 눈이었다. 오딘의 환생인 나 역시 과거의 운명에 매여있다는 거겠지.

“아무튼, 너희 둘한테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어.”

“할 말… 말입니까?”

“어. 여기에서 얘기하기는 조금 그렇고 조용한 곳 있어?”

“제 방이면 되겠지요. 원한다면 내일까지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 명하겠습니다.”

“그래 주면 고맙고.”

내 대답에 힐데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안내했는데 힐데의 방은 그녀의 성격을 대변하듯 단출했지만 기품이 느껴졌다.

가볍게 방 안을 둘러보며 평가를 끝마친 나는 침대에 엉덩이를 걸친 뒤 목을 가다듬었다.

“음, 일단 여러 가지 궁금한 게 있을 텐데…… 아니, 옷을 왜 벗어?”

“하자는 얘기 아니었습니까? 애초에 맨날 셋이서 하자고 노래를 부르지 않았습니까?”

뭘 새삼스럽게 그러냐는 듯한 힐데의 모습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어… 음. 그렇긴 한데 조금 당황스럽네.”

가만 보니 힐데뿐만 아니라 이비도 반쯤 옷을 벗고 있었다. 설마 내가 조용한 곳으로 가자는 걸 섹스하자는 얘기로 들은 건가? 그것도 나쁘진 않지만, 아니 굉장히 좋았지만 일에는 순서라는 게 있었다.

“일단 옷 다시 입고 둘 다 이리 와봐.”

내가 내 옆자리를 치며 손짓하자 힐데와 이비는 내 옆의 침대에 걸터앉았고 나는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신성력을 사용했다.

오딘의 힘을 개방하자 허공에 룬문자들이 나열됐고 그 모습에 둘은 깜짝 놀란 표정이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신을 집중했다.

여러 명을 데리고 사용하는 건 처음이었기에 집중해야 했다. 이건 그만큼 위험한 마법이었으니까.

“라크 사―카 모즈하.”

다소 긴 주문이 외워지자 허공에 있던 룬문자 여럿이 빛나며 나와 힐데, 이비를 휘감은 채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회오리처럼 돌아가던 룬문자들은 엄청난 빛과 함께 소멸했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내 눈에 비친 건 얼빠진 표정을 지은 채 집무실에 앉아있는 칼리나였다.

“라그나르?”

“오, 제대로 찾아왔네. 이렇게 먼 거리를 사용하는 건 처음이었는데 다행이네.”

“아니, 이게 무슨….”

칼리나는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날 쳐다보고 있었는데 힐데와 이비 역시 칼리나 못지않게 당황한 얼굴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얘기해 줄 테니까 일단 들어봐.”

여전히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셋을 바라보며 나는 그간 있었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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