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바이킹이 되었다-191화 (191/205)

▣ 191화

말을 마친 펜리르는 짧게 하울링하더니 벼락같이 내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나는 당연한 것처럼 궁니르를 소환해 휘두르며 펜리르의 공격을 막아냈다.

“…어떻게?”

펜리르는 내가 자신의 공격을 막아냈다는 사실보다 궁니르를 소환했다는 사실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어떻게? 간단한 것 아닌가.”

내가 손에 힘을 줘서 펜리르를 밀어내자 허공에 떠 있던 퀘스트가 변화했다.

# 메인 퀘스트

― 바이킹을 위한 나라는 없다 : 바이킹들을 규합해 나라를 만들고 초대 군주가 되시오. [완료]

― 와일드 헌트 : 맨섬에 묶여있는 펜리르의 망령을 물리치십시오. [완료]

― 비틀린 운명 : 되살아난 펜리르를 사냥하고 그대의 운명을 개척하십시오. [진행 중]

[천공신 오딘이시여.

그대는 주신으로서 라그나로크라는 비극적인 운명을 회피하기 위해 일생을 살아왔습니다.

허나 예정된 종말을 피하기 위한 그대의 몸부림은 태풍에 맞서는 나비의 날갯짓에 불과했습니다. 최후의 전쟁은 벌어졌고, 신들은 몰락했으며 위그드라실은 불타 쓰러졌습니다.

허나 그 과정에서 그 누구도 그대가 했던 노력과 고뇌를 이해해주지 못했습니다.

신들을 위해서, 이 세상을 존속시키기 위해서, 그대가 사랑하는 것들을 위해서 그 모든 오욕과 모멸을 감수해야 했던 위대한 신이시여.

라그나로크 최후의 악몽이자 늑대들의 왕. 펜리르가 억겁의 세월을 지나 다시 그대의 앞에 섰습니다.

오딘이시여. 스스로의 한계를 뛰어넘어 기나긴 악연의 종지부를 찍을 준비가 되셨습니까?

스스로의 운명을 바꿀 준비가 되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당장 창을 들고 그대의 운명을 개척하십시오. 사냥을 시작할 시간입니다.

위대한 천공신. 오딘에게 영광을!!!]

그걸 끝으로 퀘스트창이 사라졌고 나는 몸 안에서 차오르는 신성력을 느끼며 펜리르를 향해 웃어주었다.

“내 힘을 내가 못 쓸 리가 없잖은가.”

그 말과 함께 내 몸에선 눈이 멀 정도로 강력한 신성력이 뿜어져 나왔고 허공에 수십 개의 룬문자가 떠올랐다.

“…오딘!!!”

어느새 날 바라보는 펜리르의 눈동자에는 적의가 가득 찼지만 나는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사실 여기저기에 힌트는 흩뿌려져 있었다.

써도 써도 마르지 않는 신성력과 인간을 뛰어넘는 강력한 힘. 편애에 가까운 오딘의 총애와 오딘 신앙을 믿는 이들이 늘어날수록 강력해지는 힘까지. 내 모든 것이 오딘과 연관되지 않은 게 없었다.

거기에 지금에서야 얘기하는 거지만 평범한 인간의 몸으로 감당하기 힘든 신성력을 끌어다 썼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약간의 신성 중독 페널티만 받았을 뿐 일상생활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생기가 다 빨린 미라가 되거나 존처럼 처참하게 죽었을 텐데 말이다.

거기에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는 그렇지만 내가 가는 곳마다 불화와 전쟁이 뒤따랐다.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언제나 내가 가는 곳에는 과부와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함께했다.

오딘이 에인헤랴르들을 모집하기 위해 지상에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킨 걸 보면 참 기묘한 이야기가 아니던가?

마지막 힌트는 라그나르 로드브로크라는 내 이름이었다. 음절만 놓고 보면 라그나로크와 굉장히 비슷하지 않은가?

물론 이는 단순한 우연에 그저 이름이 비슷할 뿐이었다. 애초에 로드브로크라는 건 별명에 불과한 데다 직역하자면 털로 만든 반바지라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것 역시 게임사가 안배해놓은 힌트일 터였다. 라그나로크에서 죽음을 맞이한 오딘의 환생이 라그나르 로드브로크라니. 나름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게임사에서는 라그나르를 포함해 3명의 바이킹 영웅을 업데이트했었고 그들은 나름대로 유명한 바이킹들이었다.

타란토의 보에몽. 정복왕 윌리엄. 바이킹 군주 라그나르 로드브로크.

내가 오딘이었으니 둘 중 한 명은 토르일 테고 나머지는 로키겠지. 결국, 북유럽 신화를 이끌어가는 주역은 그 셋이었으니까.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내가 스스로 오딘임을 인지하고 신성을 각성했고, 내 눈앞에는 펜리르가 서 있다는 거니까.

하지만 나는 나를 씹어 삼켰다는 펜리르를 앞에 두고도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펜리르. 나와 다시 한번 싸울 준비는 됐나?”

* * *

“크르르릉!!!”

분노에 찬 펜리르가 울부짖으며 발톱을 휘둘렀지만 나는 능숙하게 피하거나 궁그닐로 쳐내며 펜리르의 공격을 막아냈다.

“하하하, 그동안 글레이프니르에 묶여 있느라 몸이 굳은 모양이지?”

나는 공격을 막아내는 사이사이 펜리르를 향해 도발을 날렸지만 그는 대꾸하지 않고 어린애가 떼를 쓰듯 힘으로 날 짓누르려 했다. 그러나 그 발톱이 내게 닿는 일은 없었다.

“쥐새끼 같은 건 여전하구나!”

펜리르는 내가 요리조리 잽싸게 피하며 중간중간 반격을 넣자 제법 열이 오른 모양이었다. 하긴, 나라도 모기가 이리저리 피하면서 그 사이사이 피를 빨아간다면 당연히 화가 나겠지.

펜리르는 그르렁거리면서 날 노려보더니 이내 자신의 입을 꿰뚫고 있던 거대한 검을 물어서 내게 집어 던졌다.

“음, 입마개가 마음에 안 들었나? 다음에는 좀 더 크고 굵은 걸 구해줘야겠군.”

평범한 사람이라면 스치기만 해도 중상인, 칼의 껍질을 뒤집어쓴 둔기였지만 나는 피식 웃으며 펜리르를 조롱한 뒤 천천히 손을 뻗었다.

“엘 사라사.”

내 입에서 룬어가 흘러나오자 허공에 떠 있던 룬문자 중에 몇 개가 밝게 빛나며 내 앞에 주르륵 나열되더니 이내 펜리르가 던진 검을 가볍게 튕겨냈다.

“제법 쓸만한 마법이야.”

스스로의 신성과 이름을 깨우친 건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나는 당연한 것처럼 룬마법을 사용했는데 오딘의 룬마법은 상상 이상이었다.

이쯤 되니 과거의 자신이 멍청했던 건지 아니면 펜리르가 그 모든 것을 넘어설 정도로 강력했던 건지 의문이 든다. 수많은 무구와 이 강력한 룬마법을 가지고 지는 게 더 웃긴 일 아닌가?

물론 원래 오딘은… 그러니까 과거의 나는 토르처럼 몸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아마 내가 바이킹 전사로 환생한 것도 과거의 오딘이 이런 미래를 생각해 두고 안배한 거겠지.

그리고 오딘의 생각은 주효했다. 마법의 신이자 마법의 지배자라고 불린 신이 압도적인 피지컬까지 겸비했다? 이건 상대가 누구건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었다.

거기에 오딘은 18개의 룬마법을 사용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 마법들 하나하나가 전설적인 마법이었다.

그중에 방금 내가 사용한 방어의 룬마법은 적이 휘두르는 모든 무기에 상처를 입지 않는 사기적인 마법이었다. 그리고 이건 펜리르의 발톱이나 이빨에도 해당되는 얘기였다.

결국, 펜리르가 오딘을 꿀떡 삼킨 건 아무리 할퀴거나 깨물어도 룬마법에 막히니 최후의 방법으로 삼켰던 것에 불과했다.

“이게 전부인가? 펜리르.”

펜리르는 여전히 공포스러웠으며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오히려 내가 펜리르를 상대로 공세적으로 나서고 있었고 펜리르는 내 공격을 막아내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펜리르를 상대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지는 못했다.

그만큼 운명의 굴레와 족쇄는 무거웠고 이대로 시간이 흘러가면 결국, 펜리르의 배 속에 들어가는 건 내가 될 터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펜리르는 이전의 활기를 되찾아 가고 있었고 내 몸 안의 신성력은 조금씩이지만 고갈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미끌거리고 불쾌한 감촉을 두 번 다시 느끼고 싶진 않았던 나는 펜리르를 도발하기로 했다. 짐승이든 사람이든 눈에 뵈는 게 없으면 이성적인 판단을 못 할 테니까.

“그래서 펜리르. 9개에 달하는 세계를 박살 내고 다시 한번 세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되살아난 기분은 어떤가?”

“가증스럽구나. 오딘. 설마 라그나로크의 책임을 내게 돌리는 건가?”

“오, 책임이 아니라 그저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뿐이야. 너와 네 동생들이 라그나로크에 지대한 공헌을 한 건 사실 아닌가?”

펜리르는 주신인 오딘을 죽였으며, 요르문간드는 토르를 죽였고, 헬은 직접 라그나로크에 참전한 건 아니지만 지옥의 파수견인 가름을 보내 티르를 죽였다.

그리고 이들의 아버지인 로키는 파수꾼인 헤임달을 죽였다. 로키 부자의 손에 4명이나 되는 신들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어이가 없군. 네놈이 나와 내 동생들에게 한 짓을 잊었나!? 날 글레이프니르로 속박하고 입을 칼로 꿰뚫어버렸지. 요르문간드는 바다 깊은 곳에 내던져졌으며 헬은 지옥 저 깊은 심연으로 내던져 다리를 못 쓰게 만들지 않았나?”

“글쎄, 결과적으로 라그나로크는 일어났고 너는 나를 삼켰지. 안 그런가?”

“그 예언을 실현시킨 건 너 자신이었다!!!”

“그리고 티르의 오른팔을 자른 것도 네놈이었지. 세상에. 네 아비인 로키 대신 널 애지중지 길러줬던 티르의 손을 직접 자르다니… 짐승이라 그런지 피도 눈물도 없군. 안 그래?”

“감히 그 입으로 티르를 이야기하다니!!!”

역시 펜리르에게 티르의 이야기는 콤플렉스였던 모양이다. 하긴, 자신을 길러주고 돌봐준 이의 손을 자른 게 자랑스럽게 얘기할 만한 사실은 아니지.

“하하, 누가 보면 내가 티르의 손을 자른 줄 알겠군. 그렇게 발작하는 걸 보면 티르의 손맛이 제법 괜찮았나 보지?”

엄마 손 파이 대신 티르의 손으로 만든 파이를 가져다주면 참 좋아하겠군. 티르손 파이. 어감도 괜찮군.

“이번에는 티르의 손이 아니라 네 몸을 갈기갈기 찢어주마. 내 영혼에 맹세코 너는 결코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 참 기대되는군.”

내 도발에 걸려든 펜리르는 이전보다 더 공격적으로 나를 몰아붙였다. 한층 강해진 펜리르의 공세를 막아내던 나는 펜리르가 습관적으로 내 오른쪽을 공격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전에는 긴가민가했는데 이렇게 공격적으로 나오다 보니 확신을 가지게 됐다. 처음에는 그냥 펜리르의 습관인가 싶었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이게 다 오딘이 애꾸라서 그런 거였다.

눈 하나가 없으면 당연히 사각지대가 생길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신도 인간과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펜리르는 이를 이용해 과거에 오딘을 상대로 제법 재미를 본 모양이었다.

다만 지금은 내가 과거처럼 애꾸도 아니었고 근접 전투에도 제법 자신이 있기에 펜리르가 제 힘을 못 쓰고 있었다.

하지만 이 역시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 문제였기에 나는 그 전에 승부를 보기로 했다. 애초에 질질 끌어봤자 내게 불리한 싸움이 아니던가?

다만 어수룩한 속임수에 저 교활한 늑대가 걸려들 리 없으니 나는 펜리르의 무의식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를 위해 나는 의도적으로 오른쪽에서 공격해오는 공격을 허술하게 막아냈다. 마치, 보이지 않아서 뒤늦게 반응하는 것처럼.

내 자세가 흔들리자 펜리르는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본능대로 행동했다. 그는 자신의 배를 드러내며 있는 힘껏 앞다리를 휘둘렀고 그 압도적인 공격 앞에 룬마법은 유리처럼 깨져 나갔다.

나는 그 찰나의 순간 펜리르의 공격을 막는 대신 들고 있던 궁니르에 신성력을 주입하며 펜리르의 심장을 향해 있는 힘껏 궁니르를 집어 던졌다.

푸하학!

“크허어어어어어어어엉!!!!!”

내 오른쪽 얼굴에 펜리르의 거대한 발톱 자국이 새겨지며 엄청난 양의 피가 튀었고 그와 동시에 펜리르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천지를 뒤흔드는 비명이 잦아들 때쯤 펜리르는 바닥에 엎어져서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누가 봐도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내가 승리한 모양이군.”

나는 욱신거리는 오른쪽 눈의 상처를 부여잡으며 펜리르를 조롱했다.

“흐흐흐, 잠깐의 승리를 즐겨라. 오딘. 언제고 나는 내 동생들과 함께 다시 돌아올 테니.”

“그때는 뱀술도 같이 담가서 먹어야겠군. 요르문간드로 뱀술을 담그면 무슨 맛일지 제법 궁금했거든.”

내 깐죽임에도 펜리르는 숨이 벅차는지 그대로 입을 다문 채 눈을 감았고 나는 도끼를 꺼내 그대로 펜리르의 목을 내리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