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화
펜리르와 눈이 마주친 순간 시간이 정지했다. 그리고 눈을 한 번 감았다 뜬 순간 현실이 무너져내렸다.
기껏 맞춰놓은 퍼즐이 무너져내리듯 현실은 파편이 되어 부서졌고 그 사이로 내가 알지 못하는 시간선의 세계가 조금씩 펼쳐졌다.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 내가 있던 세계는 뒤바뀌어 있었다. 이 말도 안 되는 광경에 얼이 빠져 있는 사이 어느새 글레이프니르에서 풀려난 펜리르는 웃으며 내게 말을 건넸다.
“안녕하신가. 오딘의 대전사여.”
하지만 아직 제대로 상황 파악이 안 된 나는 대꾸하지 못했고 펜리르는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흠, 붙임성 없는 친구군.”
“…여긴 어디지?”
내 물음에 펜리르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더니 피식 웃으며 끅끅 웃었다. 솔직히 늑대가 저렇게 감정표현을 하는 게 더 어이없었지만 일단 나는 펜리르의 대답을 기다렸다.
“보통 내게 그런 오만불손한 태도를 보인 놈들은 곧바로 내 배 속에 집어넣었을 테지만… 지금의 나는 기분이 매우 좋으니 대답해주겠네. 오딘의 대전사여.”
펜리르는 정말 기분이 좋은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대답했다.
“이곳은 내 기억을 바탕으로 구현한 곳이다. 라그나로크라고 하면 이해하겠나?”
“날 왜 이곳으로 끌고 온 거지?”
“글쎄, 그 물음에도 대답해줄 수 있지만 이번에는 내 질문에 답해주지 않겠나?”
펜리르는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이었고 나는 그의 빈틈을 찾기 위해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답할 수 있는 거라면.”
“아, 고맙네. 그럼 묻겠는데 혹시 오딘의 힘을 포기할 생각은 없나?”
“힘을 포기하라고?”
“그렇다네. 오딘의 대전사여. 솔직히 말하면 난 자네를 죽이고 싶지 않아. 그대가 힘을 포기한다면 얌전히 그대를 돌려보내….”
“거절하지.”
나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펜리르의 말을 중간에 끊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약 내가 오딘의 힘을 포기한다면 펜리르에게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오딘을 증오하는 늑대가, 오딘의 힘과 의지를 이은 대전사를 살려두겠는가? 물론 살려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상대의 자비를 구하는 협상을 할 생각은 없었다.
물론 내 대답에 펜리르 역시 기대도 안 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안 그래도 거대했던 몸을 일으키자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안타깝군. 그렇다면 오딘의 대전사여. 그대의 신이 얼마나 편협하며, 내게 무력하게 죽어갔는지 느껴보아라.”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멈춰있던 시간이 흘러갔고 그 순간 시장통을 방불케 하는 비명과 괴성, 고함이 들려왔다.
느슨해져 있던 정신을 다잡으며 주변을 바라보자 나는 헛숨을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서 있는 곳은 전쟁터 그 자체였다.
저 멀리서 거대한 용. 요르문간드가 번개의 신인 토르와 싸우고 있었으며 갈랴르호른의 주인이자 파수꾼인 헤임달은 장난의 신이자 모든 일의 원흉인 로키와 싸우고 있었다.
그들 이외에도 수많은 신들이 거인, 몬스터와 싸웠으며 오딘이 키워낸 에인헤랴르들 역시 적들과 용맹하게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는 글레이프니르의 속박에서 풀려난 펜리르가 분노에 찬 얼굴로 침을 흘리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딘. 내가 오늘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고 있느냐?”
설마 자신을 말하는 건가 싶어 주변을 둘러봤는데 자신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결정적으로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슬레이프니르에 올라타 있었으며 오른손에는 오딘의 무기이자 반드시 상대를 맞춘다는 필중의 룬이 새겨진 궁니르를 손에 쥐고 있었다.
거기에 왠지 모르게 시야가 흐릿하다 했더니 오른쪽이 아예 보이지 않았다. 굳이 만져보지 않아도 오른쪽 눈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은 내 눈이 멀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런 모든 것들을 종합해볼 때 지금 자신의 모습은 누가 봐도 오딘 그 자체였다.
조금 전, 펜리르가 무력감을 느껴보라고 얘기했던 게 오딘의 죽음을 체험해보라는 얘기였을 줄이야. 난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하지만 상대는 그런 내 모습을 여유로움으로 받아들였는지 더 낮게 그르렁거리며 위협했다.
“제법 여유롭구나 오딘. 과연 네놈이 내 배 속에 들어와서도 그렇게 여유로울 수 있는지 어디 한번 두고 보자.”
뭐라 얘기할 틈도 없이 펜리르는 거칠게 포효하며 달려들었고 나는 본능적으로 그의 공격을 막아냈다. 아니, 막았다는 건 그저 내 생각일 뿐이었다.
“크으윽!”
분명히 창대가 그 날카로운 발톱을 막았지만 엄청난 풍압이 나를 스쳐 지나가며 몸 여기저기에 생채기를 냈고 뺨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흐흐흐, 그 위대한 신이었던 오딘도 이젠 나이를 먹었나 보군. 아니면 네놈의 악몽이자 죽음인 나를 눈앞에 두니 다리에 힘이라도 풀린 것이냐?”
하지만 나는 그런 펜리르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반박을 하지 못한 게 아니라 펜리르의 공격을 막은 순간 흐릿한 기억의 파편들이 하나둘씩 내게 흘러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오딘!!! 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내 아이들이 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그 잘난 주신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게 저 어린아이들을 심연에 내팽개치는 건가!? 그게 정녕 네가 해야 할 일이자 의무라고 얘기하는 것인가!?]
[로키. 나는 예언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다. 사적인 감정은 없어.]
[아니! 예언은 실현될 것이며 너는 예언대로 펜리르에게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 저주와도 같은 말에 나는 눈을 떴고 그 순간 나는 허공을 날고 있었다.
“크으윽!”
바닥에 나뒹군 나는 그제서야 내가 슬레이프니르에서 떨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아파하기도 전에 거대한 펜리르의 발톱이 날 향해 쇄도하고 있었고 나는 몸을 날려 그 공격을 피해냈다.
“다른 건 몰라도 도망치는 건 쥐새끼처럼 잽싸구나 오딘.”
바닥에 움푹 파인 흔적을 바라보며 펜리르는 안타깝다는 듯 이야기했지만, 그 말과는 반대로 펜리르의 눈가에는 웃음이 깃들어 있었다.
“마땅히 그래야지. 내가 네놈에게 쌓인 원한은 고작 이 정도가 아니니까.”
자세를 가다듬은 거대한 늑대는 하늘을 날 듯 도약해 그 거대한 덩치를 이용해서 날 내려찍으려 했다.
단순히 도약하는 것만으로 태양을 가리는 모습에 오금이 떨려왔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궁니르를 있는 힘껏 집어 던졌다.
거친 파공음과 함께 궁니르에 새겨진 룬이 빛나며 훤히 드러난 펜리르의 뱃가죽을 꿰뚫었고 곧이어 고통에 가득 찬 펜리르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나는 공격에 대한 대가로 그 거대한 발톱에 얻어맞고 바닥을 굴러야 했다. 술 취한 주정뱅이처럼 바닥을 나뒹군 나는 비틀거리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쿨럭….”
기침 한 번에 피가 바닥을 적셨고 시야가 흐릿해졌다. 그리고 그와 함께 또 다른 환청이 귓가에 들려왔다.
[오딘. 진심입니까?]
[내 말이 농담처럼 들릴 만큼 가벼웠나?]
[펜리르는 우리와 잘 지내고 있습니다. 굳이 그를 묶어놓을 이유가 있습니까? 오히려 저희에 대한 반발심만 커질 겁니다.]
[티르. 그대도 알다시피 예언은 결코 빗나가지 않는다.]
[빗나가지 않을 예언이라면 이 모든 게 의미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예언을 빗나가게 하기 위해서라면 나는 뭐든 할 것이다.]
[…언젠가 당신은 이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
내가 나를 현혹하는 환청에서 다시 제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펜리르의 거대한 입이 지척까지 다가온 상황이었다.
짐승의 역겨운 냄새가 삽시간에 풍겨왔고 나는 펜리르의 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발버둥 쳤지만, 펜리르의 입은 도망치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거대했다.
거대한 늑대의 윗입은 하늘의 끝에 이르렀으며, 아래턱은 대지에 닿아있었다. 그 거대한 입은 가릴 것 없이 모든 것을 먹어 치웠고 그건 최고신이자 주신인 오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 거대했던 입이 다물어짐과 함께 다시 한번 암흑이 나를 감쌌고 나는 원치 않는 환청은 물론이요. 환각까지 봐야 했다.
[오딘!!! 네놈들에 대한 믿음의 대가가 이런 것이란 말인가!?]
나름 크긴 했지만, 지금보다는 훨씬 작은 모습의 펜리르는 분한 표정으로 오딘을 비롯한 여러 신들을 바라보며 포효했다.
하지만 애꾸눈에 넓은 챙의 모자를 쓴 노인은 냉소 어린 표정으로 어린 늑대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제법 잘 어울리는구나. 펜리르. 역시 짐승은 묶여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오딘! 네놈 때문에 나는 자유를 잃었고 내 친우의 팔을 내 의지로 잘라내야 했다.]
늑대는 분노한 기색으로 피를 토하듯 소리쳤지만 노인은 오히려 미소까지 지으며 대답했다.
[예정된 파멸을 막는 대가로는 제법 싸지 않은가?]
[비겁한 겁쟁이 같으니라고! 네놈은 스스로를 희생할 용기조차 없는 겁쟁이에 불과하다.]
펜리르의 말에 오딘은 바닥에 흩뿌려진 피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티르의 오른팔을 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더 이상 짖지 못하게 그 입에 재갈이라도 물려줘야겠군.]
오딘이 손을 휘젓자 주변에 있는 이들이 거대한 칼을 들고 펜리르에게 다가갔고 그 모습에 펜리르는 몸을 묶고 있는 글레이프니르에 피가 배어 나올 날뛰며 소리쳤다.
[오딘! 기다려라! 내 모든 걸 걸고 맹세하건대 오직 죽음만이 너를 자유롭게 할지니 이곳에서 영겁의 시간 동안 네놈을 죽일 그날을 기다리고 있겠다!]
분노한 늑대의 외침이 자명종이라도 된 듯 나는 힘겹게 눈을 떴지만, 여전히 시야는 어두웠다.
처음에는 눈을 다친 줄 알았지만, 기분 나쁜 미끈거림과 축축함은 자신이 펜리르에게 먹혔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게 해주었다.
결국, 자신은 예언에 나온 대로 펜리르에게 삼켜진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끝으로 오딘은 죽음을 맞이했으니 자신도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하겠지.
점차 몸에서 힘이 빠졌고 의식이 흐려져 가는 와중에도 나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오딘은 오직 라그나로크를 피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한 주신이었다.
음험하고 교활하며 냉철한 오딘이 펜리르에게 삼켜진다는 예언을 듣고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펜리르를 죽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펜리르에게 삼켜진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자 꺼져가던 신성력이 다시 불타올랐고 나는 들고 있는 궁니르에 마지막 남은 신성력을 끌어모았다.
그렇게 펜리르를 위한 마지막 선물을 준비한 나는 있는 힘껏 궁니르를 내던졌다. 부디 이 창이 펜리르의 심장을 꿰뚫기를 빌면서.
* * *
내가 젖 먹던 힘까지 끌어모아 내던진 창은 닿는 모든 것을 꿰뚫으며 날아갔고 박동치는 펜리르의 심장과 부딪힌 순간 세상이 다시 한번 반전했다.
“허억… 허억… 후우.”
방금 일어난 일은 악몽에 불과하다는 것처럼 내 몸에선 미끈거리고 불쾌한 감촉 대신 차갑게 식은 땀만 흘러내리고 있었다.
다만 여기저기서 느껴지는 통증은 그게 마냥 꿈이 아니었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오딘의 악몽 속에서 죽음을 맞이해 영원히 헤맬 줄 알았건만 제법이구나. 오딘의 대전사여.”
그런 내 생각을 뒷받침해 주듯 펜리르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낮게 그르렁거렸다.
“미안하지만 난 짐승의 위장 안에서 죽는 취미는 없거든. 이왕 죽을 거라면 복상사로 죽어야 하지 않겠어?”
“하, 그 능글맞은 모습은 과연 오딘의 대전사라고 할 법하구나. 하지만 상관없다. 나의 부활과 그대의 죽음으로서 다시 한번 라그나로크가 도래하리니, 그 누구도 날 막지 못하리라.”
말을 마친 펜리르는 거칠게 포효했고 그를 속박하고 있던 글레이프니르는 종잇장처럼 툭툭 끊어져 내렸다.
“하… 시발. 쉴 틈도 없이 2페이즈는 너무한 것 아닌가?”
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뜨렸지만, 펜리르는 그런 내게 잠깐의 시간도 주지 않겠다는 듯 발을 구르며 내게 달려들었다.
“오딘의 대전사여. 그대의 신이 내게 죽음을 맞이했듯, 그의 의지를 이은 그대 역시 내게 죽음을 맞이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