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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바이킹이 되었다-189화 (189/205)

▣ 189화

말을 마친 존은 그대로 녹아서 사라졌고 나는 착잡한 표정으로 그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펜리르. 북유럽 신화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한 이름이었다. 문제는 펜리르가 오딘을 씹어 삼킨 늑대였고 나는 그런 오딘의 대전사라는 점이었다.

“퀘스트 창.”

# 메인 퀘스트

― 바이킹을 위한 나라는 없다 : 바이킹들을 규합해 나라를 만들고 초대 군주가 되시오.

― ??? : 선행 퀘스트를 완료하십시오.

“하… 젠장.”

뜬금없이 밑에 퀘스트 하나가 더 뜨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연계 퀘스트의 내용은 더 볼 것도 없이 펜리르와 관련된 얘기일 것이다.

“시발, 설마 펜리르를 조지라는 건 아니겠지? 제발….”

하지만 내 고인물의 경험이 경종을 울리고 있다. 오딘의 대전사. 그리고 오딘을 조진 펜리르. 딱 봐도 견적이 나오지 않는가.

존나 불합리했지만 원래 이 게임은 불합리함이 아이덴티티 그 자체였다. 초반부터 힐데가 붙어있고 칼리나와 친분이 있던 게 이것 때문이었나? 어쩐지 운수가 좋더라니.

“일단 할 건 해야지.”

머리가 아파왔지만 어쨌건 메인 퀘스트는 완료해야 했다. 일단 존은 죽었고 잉글랜드군은 와해돼서 도망치고 있으니 뒷마무리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정신을 다잡은 나는 얀과 사자공, 하랄을 불렀고 그들은 흥분한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뭐, 한 달이 넘게 지지부진하던 전투를 삽시간에 몰아쳐 승리했으니 그럴 법도 하겠지.

특히나 사자공 같은 경우에는 자신이 패퇴했던 전투를 깔끔하게 되돌려줬으니 더 기쁠 테고. 원래 그냥 이기는 것보다 역전승이 더 짜릿하지 않던가.

“얀. 자네는 기병들 끌고 적들을 추격하게.”

“알겠습니다.”

“사자공 전하. 전하께서는 보병을 끌고 버밍엄을 접수해주십시오. 저는 그동안 하랄과 전장을 정리하고 복귀하도록 하겠습니다.”

“알겠네. 버밍엄의 영주도 지금쯤 전투 결과를 전해 들었을 테니 헛짓거리는 안 하겠지.”

둘은 곧바로 병력을 끌고 각자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떠났고 나는 하랄과 함께 전장을 걸으며 그에게 감사를 전했다.

“고생 많았네 하랄. 자네 덕분에 잉글랜드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어.”

“하하, 서둘러서 달려온 보람이 있구만. 그나저나 걱정일세. 스코틀랜드의 거점을 전부 다 버려두고 와서 다시 공격을 하려면 꽤 힘들 것 같은데….”

“그건 너무 걱정하지 말게. 잉글랜드를 완전히 접수하고 나면 얀을 시켜 아일랜드의 병력과 함께 글래스고를 공격할걸세.”

“양동작전을 하자는 건가?”

“아니. 이쪽이 유리한데 굳이 그럴 필요가 어디 있나? 자네는 함대를 끌고 에든버러를 공격해주게. 그 사이에 사자공 전하가 남은 병력을 끌고 북진할 거야.”

나는 막대기로 바닥에 대략적인 진군 계획을 끄적였고 하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압도적인 숫자로 밀어붙이면 저쪽도 어쩔 도리가 없겠지.”

얀이 글래스고의 병력을 묶어 두고, 하랄이 에든버러의 병력을 묶어둔다. 그 사이 사자공의 본대가 북진하면서 주변의 마을과 작은 성들을 점령한다.

이건 간단하면서도 대처하기 힘든 그런 전술이었다. 단순히 병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압박하는데 적이 어떻게 대항하겠는가?

물론 죽자고 성안에 틀어박혀서 항전한다면 이후의 공성이 꽤 고달플 테지만, 어차피 시간은 우리 편이었다.

아무리 수성이 공성에 비해 유리하다지만 그건 구원의 희망이 있을 때나 통하는 말이다. 외부의 지원이 없는 수성은 바닥을 드러낸 우물 옆에서 말라 죽어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무튼, 이제 스코틀랜드만 남았으니 자네가 조금만 더 고생해주게.”

“물론이지. 자네가 날 위해 해준 게 얼마인데 마다하겠는가?”

“고맙네. 스코틀랜드를 점령하고 나면 에든버러는 자네에게 조차해주지.”

아무리 하랄이 내게 부채감을 가지고 있다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보상은 확실히 해줘야 했다. 원래 친할수록 예의를 지키라고 하지 않던가?

그렇게 하랄과 여러 이야기를 하는 사이 대강 전장이 정리됐고 나는 남은 병력을 끌고 버밍엄으로 향했다.

버밍엄은 성문까지 활짝 열고 우리를 맞아주었는데 사자공이 말하기를 버밍엄의 영주가 눈치 빠르게 도망쳐 온 잉글랜드의 패잔병들을 싹 다 묶어서 바쳤다고 한다.

하긴, 이전에 우리에게 항복했다가 사자공이 패퇴하면서 본인이 의도했든 아니든 다시 존 왕을 섬기게 된 그가 전투 결과를 보고 다시 우리에게 항복하는 건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다만 본인도 박쥐 같은 행태에 눈치가 보였는지 열과 성을 다해서 우리를 챙겨주었고 그렇게 버밍엄에서 사흘 정도 머무르며 전열을 정비한 우리는 그대로 서진해서 잉글랜드를 접수했다.

패잔병들에 의해서 존 왕이 패배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잉글랜드인들은 별다른 저항 없이 우리에게 항복했다. 사실 그들에게 항복 이외의 선택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애초에 존 왕이 있는 병력 없는 병력 다 긁어모아서 나갔다가 처참하게 깨졌는데 또 긁어모을 병력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렇게 잉글랜드까지 점령한 나는 이전에 계획했던 대로 얀과 사자공, 하랄을 스코틀랜드로 진군시켰다. 아마 셋이라면 두 달 안에 내게 승전보를 가져다줄 것이다.

본래라면 내가 직접 가서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게 맞았지만 메인 퀘스트의 꼬라지를 보면 이게 끝이 아니었기에 나 나름대로 이것저것 준비를 해야 했다.

최종 보스와의 결전을 앞두고 할 수 발버둥은 전부 다 쳐야 하지 않겠는가? 이게 게임이라면 얼마든지 세이브 로드가 가능할 테지만 여긴 이미 또 다른 현실이었다.

물론 스코틀랜드를 일부러 점령하지 않고 내버려 둬서 퀘스트를 질질 끌 수도 있었지만, 의도적으로 퀘스트를 미룰 경우 어떤 나비효과가 올지 몰랐다.

평범한 사람이 상대라면 걱정할 것 없었지만 펜리르는 신격을 지닌 괴물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나는 내가 준비가 되는 대로 템포를 올려서 빠르게 진행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내 나름대로 이런저런 준비를 마치는 사이 승전보가 도착했고 스코틀랜드의 점령을 마지막으로 잉글랜드의 통일 전쟁이 끝났다.

더불어 내 퀘스트도 갱신되었다.

“퀘스트 창.”

# 메인 퀘스트

― 바이킹을 위한 나라는 없다 : 바이킹들을 규합해 나라를 만들고 초대 군주가 되시오[완료]

― 와일드 헌트 : 맨섬에 묶여있는 펜리르의 망령을 물리치십시오[진행 중]

― ??? : 선행 퀘스트를 완료하십시오.

다행히 잉글랜드의 여왕은 힐데였지만 나와 그녀의 관계 때문인지 퀘스트는 별다른 이상 없이 클리어됐고 그에 따른 연계 퀘스트가 생겨났다. 물론 그 내용은 썩 달갑지 않았다.

― 위대한 오딘의 대전사여. 기나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불멸자 펜리르가 누이인 헬의 도움을 받아 부활하려 하고 있습니다. 홀로 맨섬에 있는 펜리르의 영혼을 봉인하십시오.

“시발. 좆같네. 왜 항상 슬픈 예감은 틀리지를 않지?”

나는 욕설을 내뱉으며 자세한 내용을 훑어보았지만 별반 달라지는 건 없었다. 다만 영혼을 봉인하라는 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퀘스트 내용이 와일드헌트인 걸 보면 오딘의 힘을 사용하라는 얘기 같은데… 이건 직접 맨섬에 가보면 알겠지.

물론 가는 건 혼자서 가야 할 터였다. 퀘스트에 버젓이 혼자 가라고 적혀 있기도 하고 게임에서도 이런 퀘스트의 태반은 혼자서 진행해야 했다.

그래서 가끔 동료빨로 클리어하는 경우에 메인 퀘스트를 못 깨서 울부짖는 뉴비들의 모습이 제법 볼만한 요깃거리였는데 내가 그 꼴이 될지는 몰랐네.

물론 여기는 현실이니만큼 다른 이들을 끌고 갈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어떤 식으로 억제력이 작용할지 몰랐기에 나는 홀로 맨섬으로 향했다.

물론 사자공이나 하랄을 비롯해 이비나 힐데는 그런 나를 의아한 눈초리로 쳐다봤다.

사실 그들 입장에서는 잉글랜드 정복을 다 끝냈는데도 기뻐하기는커녕 우거지상을 하고 맨섬으로 홀로 향하니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실 여긴 게임 속 세상이고 메인 퀘스트를 깨기 위해서 나 혼자 맨섬에 가서 펜리르를 잡아야 해!’라고 얘기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말로 적당히 얼버무렸다.

그렇게 맨섬에 도착한 나는 막막함에 휩싸였다. 맨섬이 본토인 영국이나 아일랜드만큼 큰 섬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법 크기가 꽤 됐는데 무려 서울과 비슷한 정도였다.

“수색까지는 좀 도와달라고 할 걸 그랬나?”

그래도 찾다 보면 나오지 않을까 해서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는데 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아니, 이건 기묘하다기보다는 불쾌한 감각이었다.

“이런 식으로 길을 알려주는 건가.”

나는 펜리르가 있을 곳으로 추정되는 곳에 가까워질수록 나도 모르게 올라오는 토악질을 참아가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 걷게 되자 이루 말할 수 없는 악취가 저 앞에서 풍겨왔고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도끼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내가 마주한 건 거대한 산이었다. 문제는 그 산이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펜리르.”

신을 죽인 늑대는 그 위명에 걸맞지 않게 귀여운 모습으로 몸을 둥글게 만 채 자고 있었다.

다만 크게 벌린 입 사이로 보이는 날카로운 이빨과 드문드문 보이는 발톱은 절대 귀여워 보이지 않았다. 아마 저기에 물리거나 긁히면 말 그대로 뼈와 살이 분리되지 않을까?

그나마 다행인 점은 낚싯줄처럼 아주 얇은 실이 펜리르의 몸을 여러 차례 휘어 감고 있다는 점이었다.

저게 그 유명한 글레이프니르 같은데 저 괴물 같은 늑대가 여전히 휘감겨 있는 걸 보면 그래도 그 이름값은 하는 모양이었다.

“적어도 한입에 꿀꺽 삼켜질 일은 없겠네.”

한 입에 먹히나 두 입에 먹히나 그게 그거일 테지만 어쨌건 지금 당장 저 괴물과 싸울 일은 없어 보였다. 딱 봐도 봉인되어있는 상태가 아니던가.

“근데 왜 살아 있는 거지? 펜리르가 오딘을 죽이긴 했어도 곧바로 그 아들인 비다르에게 죽었다고 했는데?”

그것도 곱게 죽은 게 아니라 비다르는 펜리르의 윗입과 아래턱을 붙잡고 찢어버리는 것도 모자라 그대로 목구멍 안에 칼을 찔러넣은 뒤 심장을 꿰뚫어서 죽여버렸다.

근데 눈앞의 펜리르는 아무 일 없다는 것마냥 곤하게 자고 있지 않던가? 일반적인 신들과 다르게 북유럽 신화의 신들은 불멸자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모든 신들, 심지어 주신인 오딘조차도 죽는 것을 두려워했다. 실제로 빛의 신인 발두르는 겨우살이 가지에 죽었고 그의 죽음이 라그나로크의 시발점이 되지 않았던가.

“헬이 발두르를 살리는 데 건 조건이 제법 지랄맞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내 기억이 맞다면 세상의 모든 생명체가 그를 위해 울어줘야 한다는 걸 조건으로 걸었다. 그러나 로키는 마녀로 변한 뒤 울지 않았고 그 때문에 발두르는 부활하지 못했다.

모든 이의 사랑을 받는 발두르조차 그러했을진대 펜리르의 부활을 위해 울어줄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적어도 신들이라면 울기는커녕 분노했겠지.

“근데 오딘을 보면 펜리르가 살아있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야. 애초에 죽은 오딘도 살아났는데 펜리르라고 그러지 못할 건 없으니까.”

애초에 여기는 게임이 아니던가. 필요에 의해서 죽은 이를 살리는 건 자주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나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어느 순간 주변이 너무 조용했다.

개과 특유의 그르렁거리는 소리도 나지 않았고 시끄럽던 들짐승과 산짐승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마치 이 세상 모든 게 정지된 것처럼 내가 있는 곳은 침묵만이 가득했다.

“이런 시발.”

나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는 매끄러운 홍옥과도 같은 거대한 눈동자가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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