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화
“오랜만에 몸 좀 풀겠네.”
나는 어떻게 하면 존의 머리에 도끼를 박아넣을 수 있을까 고민하며 갔지만, 존은 나와 싸우고 싶은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무기를 뽑지도 않은 채 오만하면서도 독선적인 눈초리로 날 바라보며 하대하듯 물었다.
“그대가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인가?”
“맞아. 자네와 같은 바이킹이자 야만인이며 신성 제국의 공작이지.”
하지만 존은 내 말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얼굴을 찌푸리며 언짢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야만인인 자네와 나를 같은 취급하지는 말아주게.”
“허, 어이가 없군. 자네 조상이 누군지 모르나?”
윌리엄 1세. 노르망디 공작. 전직 바이킹. 노르만 왕조의 시조.
그런 자의 후손이니 누가 봐도 나와 같은 피가 흐르고 있을 게 뻔했는데 저렇게 얘기하는 걸 보니 어이가 없는 걸 넘어 당황스러울 지경이다.
“한참 전의 이야기다. 너 같은 야만인과 나의 공통점은 머나먼 뿌리에 같은 조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뿐이지.”
“뭐 좋아. 나는 야만인, 너는 문명인이라고 하자고. 어차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이 상황을 조선 시대로 바꿔보면 전쟁터에서 생사결을 앞두고 만난 두 사람이 니 조상은 천한 백정입네, 내 조상은 왕족이었네 하고 다투는 꼴이었다.
어차피 서로 죽고 죽일 건데 자기 조상이 야만인이건 문명인이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뭐, 드루이드나 주술사라면 모르겠지만 존이 주술사일 리가 없잖은가.
하지만 눈앞의 사내에게는 그게 제법 중요한 모양이었다. 내가 인정하는 듯한 말에 눈가가 미미하게 떨렸으며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갔으니까.
스릉.
“대화는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역시 야만인이라 그런지 성미도 급하고 천박하군. 그대가 죽기 전에 교양이라는 게 뭔지 가르쳐 주도록 하지.”
저렇게 야만인에 목숨을 걸 줄은 몰랐는데… 혹시 야만인 페티시가 있는 건가? 아니면 사생아 출신이라 자신의 피에 대해 열등감이 있는 걸지도 모르고.
왜, 일본도 보면 일본 제국 시절에 탈아시아를 하고 싶어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외친들 정작 자신의 본질은 아시아인이면서 말이다.
아무튼, 야만인이건 전쟁이건 존의 목만 따면 그만인 이야기였기에 나는 도끼를 가볍게 쥔 뒤 말을 몰아 상대를 향해 달려갔다.
존 역시 기다란 장검과 방패를 들고 내게 맞섰는데 그와 처음 검을 맞대고 느낀 건 묵직함이었다. 상대의 검이 내 방패를 때릴 때마다 육중하면서도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물론 전장에서 몇 번이나 구른 나였기에 존의 일격을 막는 건 쉬운 일이었고 나는 그렇게 존과 몇 차례 무기를 섞었다. 그리고 느낀 게 있다면….
“마치 들짐승 같군.”
존의 검은 거칠었다. 정형화되고 상대의 급소를 노리는 일격필살의 검술이 아니라, 상대를 찢어발기고 난도질하기 위한 그런 검술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존의 상태창을 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난이도상 적대적인 이의 상태창은 열리지 않았기에 나는 아쉬운 마음을 감추며 거리를 벌렸다.
― 오딘이 상대의 정체를 깨닫고 분노합니다. 상대의 골통을 박살 내 버리십시오.
북유럽 신화 속의 주신인 오딘이 그리스 로마신화의 제우스나, 아일랜드의 신들을 보고 골통을 박살 내라고 할 정도로 분노할 리는 없겠지.
물론 오딘이 분노조절장애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건 아닐 테니 아마 존의 몸에 깃든 건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인물일 것이다.
문제는 왜 북유럽도 아닌 아일랜드, 그것도 웨일즈 지역에서 북유럽 신화의 신이 나오냐는 거지. 물론 바이킹들이 잉글랜드를 자주 침공했던 만큼 신화가 일부 넘어갈 수는 있겠지만… 상대의 정체가 쉬이 짐작이 가진 않았다.
“왜? 갑자기 싸울 생각이 사라졌나? 야만인?”
내가 도끼를 거두고 물러서자 가볍게 숨을 고른 존은 히죽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글쎄, 자네가 쓰는 힘을 보면 오히려 자네가 야만인처럼 보이는데 말이야. 누구의 힘이지? 로키? 토르? 티르? 아니면 거인족?”
오딘과 적대한 건 대부분 거인족이었다. 주신의 자리를 놓고 다퉜다고 해도 라그나로크 때 요르문간드를 죽이고 그에게 죽은 토르를 상대로 오딘이 분노할 리는 없겠지.
“아니, 이건 오직 나만의 힘이다.”
“미친놈이었군.”
저놈한테도 신의 의지가 보일 텐데 싹 무시하는 걸 보면 어지간히 열등감에 시달린 모양이다.
“뭐 좋아. 지금 당장이라도 네놈을 찢어 죽이고 싶지만… 그건 나중의 즐거움으로 미뤄두지.”
말을 마친 존은 기수를 돌렸고 그 모습에 나도 못 이기는 척 기수를 돌렸다. 상대가 누군지 정확히 파악하지도 못했는데 싸울 수는 없었다.
힘의 상징이었던 토르 역시 요르문간드를 상대로 승리하긴 했지만 아홉 걸음을 떼기 전에 죽었다고 하지 않던가.
존은 존대로 내가 예상외의 힘을 보여주자 당황한 거겠지. 그렇게 서로 죽일 듯 달려 나갔던 것과는 다르게 서로 무기를 거두고 돌아오자 아군의 사기는 살짝 내려갔으며 적군의 사기는 올라갔다.
무승부였음에도 처음부터 기대치가 달랐던 까닭이었다.
우리나라가 축구에서 브라질을 상대로 비긴다면, 똑같이 승점 1점씩을 가져감에도 우리나라 국대는 칭송받고, 브라질의 국대는 비판을 받지 않겠는가.
지금까지 내가 쌓아 올린 명성이, 특히 무력으로 쌓아 올린 위명이 너무나 컸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 페널티야 있으나 마나 한 수준이었기에 나는 신경 쓰지 않고 병력들을 배치했다.
그렇게 전투 준비가 끝나자 나는 늘 그렇듯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나만의 기도문을 외웠다.
“오딘이시여. 나를 승리로 이끄소서.”
* * *
버밍엄 근처의 평원에서 벌어진 전투는 한 달이 넘게 이어졌다. 애초에 회전 자체가 단기 결전을 염두에 두고 벌이는 것임을 가정하면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사실 이렇게 질질 끌릴 만한 전투는 아니었는데 시간만 차일피일 흐르고 있는 건 의외로 적들이 선전했기 때문이었다.
적들도 여기서 패배하면 끝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인지 죽기 살기로 아군과 맞서 싸웠다. 거기에 어중이떠중이들이라도 적들의 숫자가 많았던 것도 한몫했다.
이 당시 승리라는 개념은 적군의 궤멸이 아닌, 적군의 와해가 기준이었다. 그리고 그를 위해 언제나 최전선에서 적군을 박살 내던 건 다름 아닌 나였다.
필요하다면 과감하게 병력을 던지고 내가 직접 들어가서 싸워야 했는데 적에게 둘러싸이거나 존에게 각개격파 당할 염려가 있기에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기는 착실하게 이쪽으로 굴러오고 있었지만 전투라는 건 살아있는 생물과 같아서 단 한순간에 승기가 뒤집힐 수도 있었다.
그 때문에 나 역시 만일을 대비해 최대한 병력의 피해를 줄여가며 싸울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전투가 길어질 수밖에 없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이어졌던 전투도 하랄의 참전으로 순식간에 뒤집혔다. 내 지원 요청에 하랄은 과감하게 스코틀랜드의 점령지역을 전부 포기한 채 남쪽으로 퇴각했다.
사실 이건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자동차를 운전할 때도 전진보다 후진이 더 힘든 것처럼, 군대 역시 매한가지였다.
병력을 진군시킬 때는 오직 앞만 보고 가면 되지만, 후퇴할 때는 사방이 적군의 영토였기에 앞과 뒤는 물론이요, 사방을 둘러보며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패배한 전쟁에서 병력 손실 없이 퇴각하는 것. 그것 역시 명장의 자질 중 하나였다.
하랄은 수많은 전쟁을 경험한 명장이었고 전투에서 패배한 건 아니었지만 후퇴 시의 리스크를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오히려 에든버러에 처박혀 있는 스코틀랜드군을 강하게 밀어붙인 뒤 일거에 퇴각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적의 2차 공세에 대비하던 스코틀랜드는 공세는커녕 적군이 게 눈 감추듯 전부 사라지자 독이 바짝 올라 하랄을 추격했다.
하지만 오랜 경험으로 적의 행동을 꿰고 있던 하랄은 오히려 복병을 숨긴 채 기다리고 있었고 매복에 걸린 스코틀랜드의 군대는 허겁지겁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무사히 함선에 올라 해안선을 따라 퇴각한 하랄은 험버강을 따라 리즈까지 남하했다.
그곳에서 약간의 휴식을 취한 하랄의 군대는 무려 200km에 달하는 거리를 일주일 만에 주파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남하한 하랄의 급습에 허를 찔린 잉글랜드의 군대는 순식간에 무너져내렸다. 굳건하게 버텨왔던 것치고 너무 손쉽게 녹아내리는 모습이었지만, 사실 잉글랜드군은 이미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장시간 이어진 전투와 누적된 피로, 영주들 사이의 분열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결정적인 건 존의 상태였다.
그는 시일이 흐를수록 쇠약해져 갔다. 하루하루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얼굴에서는 생기가 사라졌고 주름이 늘어났으며 몰골이 추레해졌다.
물론 난 이 게임의 고인물인 만큼 저 증상을 알고 있었다. 아니, 굳이 고인물이 아니더라도 게임을 하면서 저런 증상을 겪어봤다면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신성 중독.
무서울 것 없던 내가 유일하게 두려워했던 것. 처음에야 힘이 잘 받는 것처럼 느껴지겠지. 몸이 붕 뜨는 기분도 들고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그런 기분이 들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달콤한 함정이었다. 신성력은 독이 든 성배나 다름없었고, 몸이 신성력에 적응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신성력을 남발하는 건 스스로 독을 삼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애시당초 평범한 인간의 몸으로 신의 힘을 쓰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지 않던가? 모든 일에는 대가가 있는 법이었다.
그리고 지금 존은 신의 힘을 사용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그의 몸은 부서지기 일보 직전이었고 죽음이 그의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그리고 이게 내가 일부러 시간을 끌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이렇게 잉글랜드를 무너뜨릴 퍼즐들이 하나씩 맞춰지자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병력을 몰아붙였다.
잉글랜드의 군대는 삽시간에 녹아내렸고 나는 다른 이들에게 지휘를 맡긴 채 내 손으로 이 전투를 매듭짓기 위해 존을 찾아갔다.
며칠 전에 봤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죽음의 기운만이 스산하게 드리운 존은 내가 다가가자 본능처럼 무기를 들고 일어섰다.
“라그…나르…….”
“살아있는 게 용하군.”
그래도 신의 힘을 받은 대전사이자 나와 한 달간 맞섰던 대적자였다. 나름대로 그에 걸맞은 죽음을 내려주는 게 내 의무라 생각했기에 나는 도끼를 꺼내 들었다.
그는 고장 난 기계처럼 터덜터덜 날 향해 다가왔고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들고 있던 도끼로 그의 몸을 갈랐다.
날카로운 도끼가 그의 갑옷을 찢고, 부드러운 살을 찢어발겼음에도 그는 비명조차 내뱉지 않았다. 오히려 무덤덤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거기에 더 공포스러운 건 그의 몸에선 인간이라면 마땅히 흘러나와야 할 것들이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창자나 위, 폐 같은 장기들은 둘째 치고 피라도 흘러야 했건만 그에게선 아무것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의 몸 안에는 말 그대로 신성력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마 신체 내부의 장기들은 진작에 녹아내렸겠지.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도 나와 싸우다가 피를 토하고 실려 갔는데, 그게 피가 아니라 녹아내린 장기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나마 몸을 지탱해주던 신성력까지 가슴에 난 구멍을 통해 빠져나가자 그는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허물어져 내려갔다.
그렇게 눈앞에서 녹아내리는 존을 보며 나는 물었다.
“넌 누구지?”
몸이 사라져가는 와중에도 존은, 아니 존이었던 것은 날 보고 히죽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나는 바나르간드. 흐로드비트니르. 해와 달을 쫓는 스콜과 하티의 아버지이며 늑대들의 왕.”
“로키의 아들이자 무녀의 예언만으로 글레이프니르에 묶인 자이며 긴 시간 동안 라그나로크만을 바라 왔던 자.”
“신들에 대한 증오와 복수를 가슴속에 품었으며 주신 오딘을 삼킨 신살자.”
상대의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상대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 얼추 짐작하고 있긴 했다. 다만 이 대답을 통해서 확신을 한 것뿐이지.
“펜리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