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화
<에식스―노샘프턴>
“면목 없네. 라그나르.”
사자공은 처량한 얼굴로 나를 맞아주었는데 솔직히 예순을 훌쩍 넘겨 어느덧 일흔을 바라보는 양반이 저런 모습으로 얘기하니 조금 불편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한창때인 내가 다 늙은 노인을 겁박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자공 전하. 전하께서 후방을 든든히 지켜주신 덕에 제가 노섬브리아를 정복하지 않았습니까?”
“원래라면 스코틀랜드까지 정복할 생각 아니었나? 내 잘못이니 그렇게 위로할 것 없네.”
“그건 그렇습니다만 어떻게 세상일이 마음먹은 대로만 돌아가겠습니까. 거기에 잉글랜드부터 정리하는 것도 나쁘진 않습니다.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사실 사자공이 이렇게까지 저자세로 나오는 건 내가 화내기 전에 미리 사죄해서 이 일을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허락보다 용서가 쉽다는 말도 있었고 벨프가의 공작인 그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내가 화를 내는 것도 그림이 미묘했다.
뭐, 그럼에도 불구하고 꼽을 주려면 얼마든지 줄 수 있었지만 그래봤자 좋을 것도 없었고 사자공을 보좌한 것도 얀이었기에 나는 이쯤에서 마무리 짓기로 했다.
“그렇게 얘기해주니 이 늙은이의 마음이 편해지는구만.”
“아무튼, 우연에 우연이 거듭되었다고 해도 존이 사자공 전하를 상대로 승리한 걸 보면 제법 칼을 간 모양입니다.”
“으음… 내 지고 나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웃긴 일이지만 뭔가… 뭔가 이상했다네.”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사실 어지간한 사람이 저런 말을 한다면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할 테지만 사자공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나는 얌전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고 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우선 지금까지 수비 일변도로만 있던 잉글랜드가 먼저 공격해 왔다네. 자네도 알다시피 공격과 수비 중에서 언제나 유리한 건 수비가 아닌가?”
“그렇지요. 굳이 공성전이 아니더라도 타인의 영토로 들어가는 순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으니까요.”
“나는 그의 출전을 전쟁을 끝낼 기회라 여기고 곧장 병력을 끌고 나갔다네. 왕이 직접 전쟁터에 나서는 건 드문 일은 아니지만, 존이 그럴 위인은 아니지 않나?”
“그렇지요. 아마 함정이라는 걸 알아도 나갔을 겁니다.”
어린애가 비장의 한 수를 준비한다고 한들 그게 얼마나 큰 효과를 발휘하겠는가. 존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나 사자공에게 존의 인식은 딱 그 정도였다.
“나중에 얀에게 들으면 알겠지만 난 존과 마주하는 그 순간까지 조금의 방심도 하지 않았네. 섣부르게 병력을 투입하지도 않았고.”
그의 말에 슬쩍 얀을 바라보자 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사자공의 말이 진실임을 입증해주었다.
“오랜만에 잡는 사냥감이라 흥분할 법도 한데 용케 참으셨군요.”
지금껏 영국 내의 다른 7왕국들을 정복했지만 존 왕의 이름값과 무게감은 그들과 비교를 불허했다. 이랬거나 저랬거나 잉글랜드 왕국의 정통성 있는 국왕이 아니던가.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들이 실정을 하건, 스캔들을 일으키건 여전히 한국의 대통령인 것처럼 존 왕 역시 매한가지였다.
“지금까지 얼마나 고생했는데 마지막 한 걸음을 그르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거기에 이런 노인네가 흥분해서 어디에 쓰겠나?”
“뭐, 남자는 포크를 들 힘만 있으면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푸하하핫, 자네 제법 재미있는 농담을 하는구만.”
가벼운 농담으로 분위기를 환기시킨 나는 그의 빈 잔에 와인을 따라주며 슬쩍 물었다.
“공작님 성격상 평지에서 야전을 벌이셨겠군요.”
“맞네. 그게 별다른 변수 없이 힘 대 힘으로 싸우기에 최적의 환경이 아닌가?”
“그야 그렇죠.”
그렇기에 평지에서 싸우는 경우는 거진 전쟁의 승패를 판가름 낼 수 있는 대회전인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런 대회전은 이쪽이든 상대방이든 승리할 자신이 있을 때 일어난다. 즉, 회전을 벌인다는 것 자체가 승리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존이 제국군과 맞서 싸우는 건 이번이 처음일 텐데 회전을 벌일 생각을 하는 걸 보면 어지간히 자신감이 넘쳤던 모양이다. 그것도 사자공을 상대로 말이다.
“전투는 정석대로 흘러갔다네. 창과 방패를 든 보병들이 중앙에서 맞붙었고 각자의 기병을 이용해 적의 빈틈을 파고들려 했지.”
목이 타는지 와인을 한 모금 마신 사자공은 잔을 내려놓으며 씁쓸한 얼굴로 덧붙였다.
“차이점이라면 나는 기병을 우익으로 우회시킨 반면, 존은 그 자신이 기병을 끌고 중앙의 돌파를 시도했지.”
“중앙이요? 미친놈 아닙니까?”
보통 기병을 중앙으로 꼬라박는 건 어지간해선 안 하는 짓이다. 사람들이 흔히 기병하면 무적, 최종병기 뭐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건 반만 맞는 말이다.
아무리 말에 중갑을 싸고 사람도 갑옷으로 둘둘 말은 중장 기병을 운용한다고 해도 밀집 보병을 상대로 들이박는 짓은 안 한다.
물론 돌격을 안 하는 건 아니지만, 그건 전투가 시작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나 적의 진형에 균열이 생기거나 적의 대열이 얇아졌을 때나 하는 거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네만 존은 아군의 중앙을 밀어냈다네. 놀라서 예비대를 집어넣었지만 기어코 뚫어내더군. 당연히 아군의 진형은 흐트러졌고 얀이 후방에서 막아준 덕에 별다른 피해 없이 퇴각할 수 있었네.”
“따로 추격은 안 했습니까?”
“얼마 따라붙다 말더군. 아마 이쪽이 질서정연하게 퇴각하기도 했고 우리를 쫓기보단 버밍엄을 점령하는 게 더 중요하다 생각한 모양이야.”
사자공의 말에 나는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사자공의 말로 유추하건대 존은 뭔가 힘을 얻은 게 틀림없었다.
현실이라면 말도 안 되는… 아니, 잔다르크의 경우도 있으니 마냥 말도 안 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건 상식적으로 볼 때 현 상황은 말이 안 됐다.
하지만 여기는 게임 속 세계였고 이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도 가능하다는 말이었다. 당장 나부터가 오딘의 힘을 쓰지 않던가.
여러 신이 존재한다는 건 악마도 존재한다는 말이었고 어쩌면 궁지에 몰린 존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면 운이 좋게 잊혀진 신의 성물을 발견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원래 그곳은 켈트족들이 거주하던 땅이었으니까.
그게 아니고서야 현 상황을 설명하는 게 불가능하지 않던가. 존이 힘숨찐 짓을 하고 있던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렇게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던 찰나 사자공이 한마디 덧붙였다.
“그게… 이런 말을 하면 자네가 기분 나쁠지 모르겠지만 꼭 자네를 보는 것 같았네.”
“저를 말입니까?”
“그래. 그는 죽은 사자심왕이 돌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종횡무진 아군의 진영을 헤집고 다녔다네. 마치 늑대가 양 떼를 헤집는 것처럼 말이야.”
“흠… 일단은 알겠습니다.”
“내가 말한 것들 이외에도 추가로 여러 가지로 조사한 자료들이 있네. 자료의 취합과 조사는 얀이 했으니 그에게 보고 받는 게 더 나을 걸세.”
“알겠습니다. 전하도 피곤하실 텐데 제가 너무 오래 붙잡은 것 같군요. 편히 쉬십시오.”
“그래. 혹여나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게.”
나는 사자공에게 가볍게 목례한 뒤 얀을 데리고 집무실로 향했다. 내 집무실은 아니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적당히 비어있는 자리에 걸터앉은 나는 얀이 건넨 보고서를 읽으며 물었다.
“존은 계속 버밍엄에 처박혀 있다고?”
“예. 전하. 그를 도발하기 위해 몇 번이나 별동대를 운용해봤지만 꼼짝도 안 하더군요.”
“굳이 싸워줄 정도로 아쉬울 게 없다는 거겠지. 근데 이건 뭐야. 존 암살설? 지금 버밍엄에 있는 존이 대역이라는 얘기인가?”
“아, 그건….”
얀은 자기가 알아낸, 또는 추측했던 것들을 내게 얘기했고 나는 조용히 그의 보고를 들었다.
종종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섞여 있었지만 원래 브레인스토밍이 그런 거 아니던가. 거기에 이 게임은 랜덤 변수라는 지랄맞은 요인이 있었기에 여러 의견을 들어둬서 나쁠 건 없었다.
“그러니까 자네 말을 정리하자면 첫 전투에서 패배하긴 했지만 실질적인 피해가 큰 건 아니다. 우려했던 웨식스와 에식스, 서식스의 동요는 고드프리가 잘 통제하고 있다는 것 아닌가?”
“예. 다만 그들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저희를 보고 있습니다. 물론 그건 프랑스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어르고 달래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 이쪽의 힘을 보여줘야 한다는 거군. 존도 그걸 알기에 굳이 싸움에 응하지 않았던 거고.”
아편 전쟁 이전에 청나라가 호랑이인 줄 알고 살살 눈치만 보던 열강들은 아편 전쟁 이후 청나라가 사실은 호랑이 가죽을 뒤집어쓴 양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되자마자 스탠스를 바꿨다.
나도 그 꼴이 나지 않으려면 승리가 필요했다. 아예 반항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압도적인 승리가.
“예. 소관의 생각으로는 다음 전투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패배한다면 전쟁은 걷잡을 수 없이 길어질 겁니다.”
“자네 앞에 있는 게 누구라고 생각하나? 걱정하지 말게.”
내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얘기하자 얀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깜빡 잊었다는 듯 품속에서 잘 포장된 편지를 내게 건넸다.
“물론입니다. 아, 그리고 전하. 존 왕이 전하의 앞으로 편지를 보냈습니다.”
“편지라… 어디 뭐라고 썼는지 읽어나 봐야겠군.”
나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편지를 열었고 첫 문장을 보자마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천박한 들짐승과도 같은 야만인에게―
“푸하하, 첫인사부터 패기가 넘치는군.”
그뿐만 아니라 편지 곳곳에 힘 있게 눌러쓴 필체를 보아하니 제법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하긴, 그 유명한 사자공을 패퇴시켰으니 오죽하겠는가.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존의 편지를 마저 읽었는데 그의 편지는 한마디로 자신감 그 자체였다.
편지만 보면 존은 이미 전투에서 승리한 것처럼 굴었는데 그는 내게 항복하고 점령한 영토를 바친다면 목숨을 살려주는 건 물론이요 특별히 자신의 수하로 삼아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종종 내 편지를 받았던 이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물론 나는 폭언에 가까운 존의 편지를 보면서도 화가 난다기보다는 호기심과 호승심이 끓어올랐다.
사실 말이야 바른말이지 나는 지금까지 꽤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어쩌면 호적수가 될지도 모르는 인물을 만난 것이다.
“제법 기대되는구만.”
물론 내 기대와는 별개로 난 존을 박살 낼 생각이었다. 잡초가 보이면 싹이 자라기 전에 뿌리까지 뽑아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 * *
<버밍엄 근처 평원>
약 일주일 정도 군세를 가다듬은 나는 곧장 병력을 끌고 출진했다. 그러자 존 역시 기다렸다는 듯 병력을 끌고 출진했다.
그의 입장에선 버밍엄에 틀어박혀 수비만 해도 되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평원으로 기어 나온 걸 보면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폭발하는 모양이었다.
“제법 숫자가 되는군. 얀 자네가 지난번에 보고한 숫자보다 더 많아 보이는데?”
“예. 지난 전투의 승리로 웨일즈의 영주들도 합류한 모양입니다.”
하긴, 누구도 이길 거라 예상하지 못한 존이 대승을 거뒀다. 이래저래 간만 보던 영주들이 합류하기에 충분한 승리였지.
“그래봤자 어중이떠중이들 아닌가.”
실제로 병력의 질과 무장을 비교해봤을 때 이쪽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물론 숫자는 저쪽이 더 많아 보였지만 무장을 보아하니 급하게 강제로 징집한 어중이떠중이들이 태반이었다.
“일단 사자공 전하를 우익에 배치하고 얀 자네는… 아하, 왜 사자공 전하가 내가 생각난다고 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는구만.”
그는 내가 하던 행동들을 정확히 따라 하고 있었는데 날 도발하듯 홀로 말 위에 올라 무기를 들고 전장에 나왔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였기에 나 역시 지체하지 않고 말 위에 올라 앞으로 달려갔다. 상대가 도전을 하면 받아주는 게 인지상정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