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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바이킹이 되었다-186화 (186/205)

▣ 186화

<에식스 ― 노샘프턴>

“사자공 전하. 부관 얀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방 안에서는 굵직하면서 패기 넘치는 얀의 목소리와는 대비될 정도로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오게.”

상대의 허락이 떨어지자 얀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전하와 같이 식사라도 할까 해서 와봤습니다.”

그렇게 말을 마친 얀은 뒤따라온 시종들을 향해 턱짓했고 그들은 조심스러우면서도 재빠르게 안에다 음식을 차렸다.

그 모습을 보고 사자공은 뭔가 대꾸를 하려다 입을 다물었고 얀은 테이블 위에 직접 가져온 와인을 올리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마 패배 이후 식사를 거른 자신을 위해 일부러 찾아온 거겠지. 내심 미안한 짓을 했다고 생각하며 사자공은 얀에게 사과했다.

“자네한테 이 늙은이를 신경 쓰게 만들었구만. 미안하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전 단지 사자공 전하와 대화를 나누며 친목을 도모하고 싶을 뿐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대답하는 얀의 모습에 사자공은 그저 웃고 말았다. 아마 자신을 배려해서 저렇게 얘기하는 거겠지.

최근 들어 몇 번이나 생각하는 거지만 얀이라는 인재가 굉장히 탐이 났다. 하지만 이미 라그나르에게 충성을 바친 그를 회유할 수 있는 방법은 없겠지.

내심 아쉽다는 생각을 하며 사자공은 빵을 뜯어 스프에 적신 뒤 입에 넣었다.

“천천히 드십시오. 빈속에 갑자기 음식이 들어가면 위장이 놀랄 겁니다.”

고개를 끄덕인 사자공은 얀의 충고대로 부드러운 수프부터 먹으며 허기를 달랜 뒤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이제 나도 늙은 모양일세.”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빨과 발톱이 빠진 사자는 물러날 때가 됐다는 거지.”

시간은 그 누구도 거스르지 못하는 법이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자신은 늙었다.

자신의 얼굴에 서서히 피어난 검버섯이나 눈가에 자글자글하게 새겨진 주름, 거칠고 푸석푸석해진 피부는 자신의 상태를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자신의 기억은 아직도 한창 젊은 시절을 떠올리고 있었지만, 몸은 아니었다. 아니, 몸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들이 예전 같지가 않았다.

정교한 기계도 시간이 지나면 녹이 슬듯이, 자신의 몸도 시간 앞에서 천천히 녹이 슬어가는 거겠지. 그러다 때가 되면 멈출 테고.

실제로 얀과 같은 인재를 탐내는 것도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사후를 생각해서 그런 것이다. 지금이야 죽고 못 사는 동맹인 용담공도 자신의 사후에는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일 아니던가.

그만큼 황제라는 자리는 그 단어만으로 사람을 홀리는 마력이 있었고 만약 그가 오토의 황제위를 뺏으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뺏을 수 있었다.

오토는 아직 어렸고 용담공에 비하면 명성이나 능력 면에서 밀리는 게 사실이니까.

물론 라그나르도 대놓고 벨프가를 무시한 채 황위를 뺏을 수는 없겠지만 제국에는 아직 호엔슈타우펜도 건재했으며 다른 선제후들 간의 관계도 굉장히 복잡했다.

반면 라그나르는 칼리나와 카노사 가문의 지지까지 받고 있으며 제노바나 폴란드, 덴마크 등 타국의 지지도 굳건했다.

그것도 모자라 지금은 웨식스 왕조의 여왕까지도 아내로 두고 있지 않던가. 기독교도인 자신의 입장에서 아내를 여럿 두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바이킹인 그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얘기인 모양이었다.

아무튼, 그의 정무적 능력과 정치질 실력을 가늠해봤을 때 뒤에서 조금만 정치질을 하면 벨프가를 고립시키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그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본인 나름대로 대비를 해두고 싶었다. 이 세상에 믿음이라는 단어만큼 굳건하면서도 나약한 단어는 또 없었으니까.

“전하께서는 아직 정정하시지 않습니까?”

“글쎄… 단순히 살아 숨쉬기만 한다고 정정하다고 하지는 않지.”

“전하….”

“난 존에게 패배했다네. 희대의 천치요, 암군이자 폭군으로 불리는 그 병신에게 싸워서 졌다 이 말이네. 그것도 변명의 여지조차 없이 처참하게 패배했지.”

방심을 한 건 아니었다. 물론 존이 여기까지 병력을 끌고 왔다기에 박살 낼 생각으로 출진한 건 사실이었지만 그게 방심했다는 말은 아니었다.

사자는 토끼를 사냥할 때조차 최선을 다한다. 그렇기에 차근차근 적을 몰아세우며 정석대로 밀어붙였지만 존은 압도적인 힘으로 자신의 병력을 박살 냈으며 앞장서서 진형을 붕괴시켰다.

만약, 패퇴하는 중간에 얀이 예비대를 이끌고 시기적절하게 개입하지 않았다면 아군의 대부분은 몰살당하거나 포로로 붙잡혔을 것이다.

“하지만 전하. 지난번 전투는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만 결국은 결과가 중요한 것 아니던가.”

하지만 얀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자세를 바로 하며 얘기했다.

“아닙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우선, 존 왕이 전투에 나온 것부터가 말이 안 됩니다.”

“절체절명의 시기이니 나온 게 아니겠나? 물론 그 겁쟁이 놈이 먼저 싸움을 걸어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지만 말일세.”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전장에 나서는 것과 최선두에서 싸우는 건 별개의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가 사자심왕이나 용담공 전하도 아니고 하루아침에 그렇게 잘 싸우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으음… 확실히 그건 그렇지.”

가만 생각해보니 존은 전반적인 실무능력과 외교, 정치적 감각이 없는 건 물론이요 다른 이들에게 과시할만한 무력조차 없었다.

차라리 자신의 형인 리처드처럼 싸움이라도 잘했으면 거기에서 나오는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나라를 이끌어 갔을 텐데 그마저도 아니었다. 즉, 그는 왕이 될 재목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전투에 나서는 것도 이상한데, 어중이떠중이도 아니고 오랜 전투로 단련된 자신의 병사들을 상대로 우위를 점한다? 차라리 라그나르가 교황이 되는 게 더 쉬울 것이다.

“존의 대역일 수도 있다는 얘기군.”

“예. 아무래도 왕이 직접 전장에 나서면 사기가 올라가지 않습니까? 그를 노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럴법한 얘기였기에 사자공은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고 그런 그를 향해 얀이 몇 가지 가설을 덧붙였다.

“어쩌면 존 왕이 이미 죽은 걸지도 모릅니다.”

“죽었다고?”

“예. 지극히 낮은 가능성이긴 합니다만 존 왕은 최근 들어 실정만 펼치지 않았습니까? 거기에 웨일즈는 애초에 그의 영향력이 강한 영토도 아니었고요.”

“음… 그렇긴 하지. 일단 계속해 보게.”

“예. 그래서 영주들이 반란을 일으킨 게 아닐까 싶습니다. 다만 전시 중에 이 사실이 알려지면 저희가 바로 쳐들어올 테니 저들이 존 왕의 대역을 내세운 것일 테고요.”

“그래서 전투 중에 적당히 전사한 걸로 꾸미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저들이 이긴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왜 저들이 승리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버밍엄에만 머무르고 있겠습니까? 만약 제가 존 왕이었다면 이 승리를 기반으로 아군을 압박한 뒤 내부의 불순분자들을 꼬드겨서 후방을 어지럽혔을 겁니다.”

사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허무맹랑한 이야기였지만, 지금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생각해야 했기에 사자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름 그럴듯한 이야기인 게 실제로 승리했는데 아무런 액션도 없지 않나.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선 전투에서 승리한다고 전부가 아니었고 그 승리를 통해서 뭔가 이익을 얻어야 했다.

하지만 며칠째 버밍엄에 가만히 있는 걸 보면 저들도 이번 승리가 예상외의 승리였기에 어떻게 할지 의견이 갈린다는 소리였다.

물론 이런 건 전부 다 가정에 불과하고 실질적으로 정보를 얻어서 실상을 파악하기 전까지는 진실을 알 수 없었기에 사자공은 곧장 명령을 하달했다.

“얀. 지금 당장 첩자를 추가로 파견해서 잉글랜드의 내부 사정을 확실히 파악하도록 하게. 수상쩍은 정보가 있으면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하라고 해.”

“예. 지금 당장 보내겠습니다.”

“그리고 병력들을 동원해서 이곳을 요새화시키게. 주변에 있는 성들과도 연락을 긴밀하게 할 수 있도록 방책을 마련하고.”

“예. 그리고 용담공 전하께 현 상황을 설명해 드렸으니 금방 내려오실 겁니다. 그 전에 저희가 할 수 있는 걸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네 말이 맞아. 전투에서 한 번 졌다고 내가 너무 의기소침해 있었구만. 늙을수록 실패를 두려워한다더니 그게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어.”

사자공의 눈에는 다시 총기가 깃들었고 그는 눈앞의 음식을 삼키기 시작했다. 뭐든 하기 위해서는 일단 먹어서 체력을 길러야 하지 않겠는가?

애초에 자신이 이 먼 타국까지 온 것도 라그나르에게 빚을 지우기 위해서가 아니던가. 그게 아니라면 이런 늙은 몸을 이끌고 이 먼 곳까지 원정을 올 이유가 없었다.

그 목적을 새삼스레 깨달은 사자공은 마음을 다잡았다.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었다. 적어도 자신이 저지른 실수는 자신의 손으로 바로잡아야 했다.

그게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의무였으니까.

* * *

<잉글랜드 ― 버밍엄>

“흐흐흐… 으흐흐흐흐흐…….”

존은 기뻐서 어찌할 줄 몰랐다. 승리. 이 얼마나 달콤한 울림이던가? 리처드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의 왕이 된 뒤로 지금껏 자신의 앞에는 패배밖에 없었다.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프랑스령의 영토를 전부 잃어야 했으며, 라그나르의 비열한 뒷공작으로 인해 잉글랜드는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하지만 오늘. 자신은 위대한 승리를 거뒀다. 그것도 어중이떠중이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게 아니라 무려 신성 로마 제국의 사자공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것이었다.

사자공이 대체 누구던가? 작센과 바이에른의 지배자였으며, 제국을 수호하는 3기둥 중의 하나가 아니던가? 그런 사내를 오직 자신의 힘으로 꺾어냈다.

이 한 번의 승리로 인해 영주들이 자신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으며, 병사들의 눈에는 신뢰와 믿음이 깃들었다.

―필멸자여. 그 힘은 그대에게 익숙하지 않으니 조심하는 게 좋을 것이다.―

불멸자이며 신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치고는 굉장히 다정다감한 충고였지만 이미 한번 승리를 맛본 존에게 그런 충고는 들리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듣기가 싫었을 것이다. 그의 음성을 들으면 들을수록 자신이 잘나서가 아닌, 그저 신의 힘을 빌려서 이긴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했으므로.

그렇기에 존은 신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행동했고 그의 행동 원리를 깨달은 신은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존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지도를 바라보며 웃었다. 이번 승리로 사자의 이빨과 발톱을 뽑았으니, 이제 그 주인이 허겁지겁 달려올 것이다.

“흐흐흐. 라그나르 로드브로크. 그 이름 높은 사자공조차 내게 패배했다. 이제 네놈만 꺾는다면 잉글랜드는 다시 내 것이 되겠지.”

만약 이번 전투에서 승리한다면 자신은 리처드보다 더 위대한 왕으로 이름을 떨치게 될 것이다.

비록 프랑스의 땅을 일부 소실하긴 했지만, 영국의 전 국토를 자신의 손에 넣는다면 리처드 못지않은 용맹한 왕이자 통일 왕조의 시조이며, 성군으로 역사에 기록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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