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화
잉글랜드 공략은 배에 순풍을 단 듯 순조롭게 흘러갔다. 사실 영국이 섬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다 털고도 남았을 것이다.
몽골의 일본 대원정이 태풍에 휘말려 2번이나 실패했던 것처럼 섬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방어수단이 되지 않던가.
원래 게임 제작자의 의도대로라면 아일랜드를 힘들게 통일하고, 어거지로 짜모은 돈으로 잉글랜드 공략 갔다가 탈탈 털리고, 그 와중에 영주와 쿠어거(왕)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다른 왕국과 연합하고, 배신하면서 통수치고… 뭐, 그러는 게 일반적이었다.
삼국지의 군웅할거 시기를 생각하면 편했다. 그 시기에 군웅들이 살아남고,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별 지랄을 다했듯 제작자 역시 그런 의도를 가지고 아일랜드를 스타팅 포인트로 잡았겠지.
하지만 지금의 나는 논외였다. 개발자가 정한 룰을 뒤엎는, 마치 장기판에 뛰어든 탱크와 같은 존재인 것이다. 마? 차? 포? 다 필요 없다. 탱크로 깔아뭉개면 그만이니까.
탱크를 막을 수 있는 건 탱크맨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실로 내 행보도 탱크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프랑스는 굴욕적인 협상을 맺었고 노르망디를 조차해줬으며 아일랜드는 이미 내 영향력 아래 있었고 영국 남부의 웨식스, 서식스, 에식스, 켄트는 내게 굴복했다.
이제 남아있는 건 중부의 노섬브리아와 웨일즈 지역의 잉글랜드, 그리고 최북부의 스코틀랜드뿐이었다.
그 때문에 이대로 배를 타고 스코틀랜드로 가서 하랄을 지원할까도 생각해봤지만, 의외로 잘 버티고 있는 데다 하는 김에 확실하게 하나씩 점령하고 싶었기에 노섬브리아로 기수를 돌렸다.
스코틀랜드로 갔다가 잉글랜드와 노섬브리아가 손을 잡고 헛짓거리를 할 수도 있는 일 아니던가? 그들도 바보가 아니라면 내 목표가 영국 통일이라는 걸 알고 있을 테니까.
거기에 웨식스와 서식스, 에식스가 내 밑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각 왕국의 병력은 그대로 온존해 있었고 강하게 압박한 상태도 아니었기에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당장은 막을 수 없었다.
물론 그들이 뭔 짓을 하건 반란 진압은 누워서 떡 먹기였다. 애초에 반란이라는 것도 영주들의 지지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첩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지속된 내전과 전쟁에 지쳐 내 압도적인 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반, 경계하면서 반항하는 이들이 반이었다.
그런 이들을 끌고 반란을 일으켜봤자 제대로 결속이나 되겠는가? 그 때문에 그들의 힘도 뺄 겸 일부러 반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겨볼까도 생각해봤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구태여 위험을 감수할 필요도 없었고 그렇게 강제로 합병해봤자 별반 이득 볼 것도 없었기에 나는 유화책을 쓰기로 했다.
그리고 그건 온갖 이념과 인종, 목적을 가진 이들이 몰려든 곳에서 성묘의 수호자라고 불리며 예루살렘을 다스렸던 고드프리에게 적격인 일이었다.
히틀러가 이르기를 ‘동일한 피는 공통된 국가를 필요로 한다’고 했던가. 이는 바꿔말하면 하나의 국가가 된다면 그게 곧 동일한 피를 가지게 되는 것과 매한가지라는 말이었다.
온갖 인종들이 뒤섞인 미국도 여러 가지 문제가 있긴 하지만, 어쨌든 미국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던가?
오랜 기간 통일되었던 왕조가 없었던 만큼 힐데가르트의 이름으로 영국을 통치한다면 그들 모두가 복종하게 될 것이다.
그 때문에 나는 고드프리를 통해서 내부의 결속을 다지고 어느 정도의 자치를 보장해주는 대신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한편 사자공을 통해서 잉글랜드를 압박한다는 투 트랙을 쓰기로 했다.
어느덧 전쟁을 시작한 지 6개월이 지나고 있었다. 전쟁을 길게 끌면 원동력과 탄력, 사기가 떨어지기에 나는 남은 6개월 안에 전쟁을 끝낼 생각이었다.
“노섬브리아도 머잖아 항복하겠군.”
“그러게 말입니다.”
“오, 이게 누구야. 웨식스의 여왕 전하가 아니신가.”
어제 밤늦게 전선에 합류한 힐데를 보며 나는 과장된 반응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게 지금 그녀의 신분은 무려 여왕이 아니던가?
“…시끄럽습니다.”
물론 그녀가 여왕이 됐다고 바뀌는 건 없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조그만데다 국력도 약한 웨식스의 여왕보다는 정화교단의 성녀가 훨씬 더 큰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여왕이라는 말의 울림은 제법 마음에 들었다. 나름 배덕적이기도 하고.
“여왕 전하. 이 라그나르 로드브로크. 여왕 폐하의 위용에 눈이 멀어버릴 것 같군요. 부디 여왕 전하에 대한 제 항복 선언을 받아주시겠습니까?”
물론 아일랜드의 항복 절차가 왕의 젖꼭지를 빠는 거라는 걸 알고 있는 힐데는 그대로 날 걷어찼고 난 키득거리며 웃었다.
“농담할 여력이 있는 걸 보면 제법 살만한가 보군요.”
“이쯤이야 쉽지. 아마 오늘 저녁은 성 안에서 먹을 수 있을걸?”
근처의 항구도시인 선더랜드와 사우스 실즈는 함락당한 지 오래다. 남은 건 뉴캐슬뿐인데 실시간으로 공성병기의 투척에 성벽이 무너지는 걸 보니 길어도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콰과과광!
말이 씨가 된다고 하던가? 마침내 굳건하게 버티던 적의 성문이 공성추에 박살나며 병력들이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고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끝났네.”
물론 내부에 내성이랑 킵(아성)이 남아있긴 하지만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내성과 아성은 그곳을 기반으로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게 목적이 아니라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는 용도에 불과했으니까.
외성의 인프라가 모두 넘어간 순간 저들은 살기 위해 항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몽골인들처럼 다 죽이는 것도 아니고 항복 시 관대한 처분을 약속했으니 얌전히 항복할 것이다.
“생각보다 너무 쉬운 것 같군요.”
“그러게. 괜히 힘 빠지네.”
게임의 최종 보스인 마왕을 만났는데 주인공이 하도 렙업을 해서 중간에 만났던 사천왕이 더 어려웠던 느낌이었다.
사실 내게 있어 최종보스는 프리드리히가 아니었을까? 물론 그마저도 직접적으로 맞부딪친 적은 몇 번 없고 그 혼자서 요단강을 건넌 거에 불과하지만.
“노섬브리아를 정복하고 나면 잉글랜드로 갈 겁니까?”
“아니, 스코틀랜드부터 밀어버릴 거야.”
“잉글랜드를 등 뒤에 두고 진격하는 건 별로 좋은 생각 같지는 않습니다만….”
그녀의 말대로 전쟁터로 나아갈 때는 후방 걱정이 없어야 한다.
왜 유비가 익주를 공격할 때 군사였던 제갈량을 형주에 두고 갔겠는가? 왜 이릉대전을 벌일 때 제갈량을 익주에, 조운을 강주에 두고 형주로 나아갔겠는가?
이릉 대전이야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어쨌든 두 사례에서 알 수 있듯 후방의 안정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실제로 해프닝으로 끝나긴 했지만, 일시적으로 노르망디가 프랑스의 손에 넘어가자 원정군 전체가 올스탑 되지 않았던가.
“그렇긴 한데 저쪽은 지형이 좀 특이하잖아.”
나라고 그런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웨일즈는 영국 본토에 붙어있는 것 치고는 서쪽으로 툭 튀어나와 있는 반도 같은 지형이었다.
거기에 영토의 크기도 제법 됐기에 나 혼자서 단독으로 공격하는 건 무리였다. 물론 존의 목만 따면 그만이겠지만 그도 머리라는 게 있다면 왕성에 처박혀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주변을 전부 처리한 뒤 하랄과 사자공, 내가 모여서 한 번에 밀어버리는 게 제일 깔끔했다. 어차피 견제야 사자공 혼자서 가능할 테고.
“그렇긴 한데 스코틀랜드를 전부 다 점령하려면 한참 걸릴 텐데요?”
“거긴 에든버러랑 글래스고만 점령하면 끝이야.”
어차피 북부는 인구도 얼마 안 되고 큰 규모의 성도 없기에 굳이 공격할 가치가 없었다. 이는 그들이 조직적으로 모일 구심점도 없다는 얘기였고
“알겠습니다. 당신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요. 그래서, 하랄 블로탄과는 언제 합류하실 겁니까?”
힐데의 말에 나는 생각에 잠겼다. 뉴캐슬은 덴마크가 있는 쾨벤하운과 비슷한 위도를 지닌 지역이었다. 그런데 하랄이 공략 중인 에든버러와 글래스고는 훨씬 더 북쪽에 있었다.
즉, 존나 춥다는 얘기였고 그런 만큼 제대로 된 방한도구도 없이 진격했다간 소련에 쳐들어갔다 패가망신한 히틀러와 똑같은 꼴이 날 수 있었다.
“하랄에게 줄 보급물자랑 병력들 방한 용품이랑 사용한 무기 보충하고 이곳 안정시키려면 적어도 2주는 필요할 것 같은데?”
“알겠습니다. 그럼 그 시간에 맞게 최대한 준비해보겠습니다.”
“그래. 고생 좀 해.”
사실 이런 건 내가 해도 그만이었지만 어쨌든 웨식스의 여왕은 힐데가르트였다.
나는 지금껏 내정도 하고, 정치질도 하고, 전쟁도 하면서 스스로를 증명해왔지만, 그녀는 오직 정화 교단의 성녀와 전투사제라는 타이틀만 달고 있었다.
그 때문에 모두가 그녀의 여왕 지위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었고 그녀는 모두의 앞에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야 했다.
그 때문에 내가 가이드 라인은 잡아줄지언정 실질적인 업무 명령은 그녀가 직접 해야 했다.
그 때문에 난 근 2주 동안 힐데의 비선실세가 되어 노섬브리아를 안정시켰고 그녀는 기한 안에 무사히 출진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북부로 원정을 떠나려던 전날 밤, 굉장히 지쳐 보이는 표정의 전령이 연달아 뉴캐슬에 도달했고 그들은 하나같이 충격적인 내용을 이야기했다.
존 왕의 반격. 전투. 사자공의 패배. 전선의 후퇴.
얘기하는 방식은 달랐지만, 안에 있는 내용은 동일했다. 물론 난 그 말을 믿을 수 없었기에 어이가 없어 전령에게 되물었다.
“오늘이 만우절이던가?”
“예? 만우절… 말씀이십니까?”
“아, 지금은 없나 보군. 그나저나 별로 재미있는 농담은 아니구만.”
물론 이런 말을 하는 나조차 이게 농담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전령이 가져온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전하. 그…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나는 중간에 손을 들어 전령의 말을 끊었고 바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그렇게 마음의 준비를 한 나는 전령을 바라보며 얘기했다.
“자네가 알고 있는 것 전부를 얘기해보게.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빼놓지 말고!”
내가 윽박지르자 전령은 입술에 침을 바르더나 긴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예. 용담공 전하께서 북부로 떠나신 뒤로 사자공 전하께서는 병력을 버밍엄으로 이동시키셨습니다.”
버밍엄이라… 웨일즈 지역의 중간쯤에 있어 남부와 북부를 전부 감시하면서 견제를 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나름 성의 규모도 컸던 걸로 기억하고.
“그곳에서 요새를 구축하며 대기하고 있는데 존 왕이 울버햄튼 평원으로 병력을 끌고 진격해왔습니다. 그래서….”
“잠깐만, 사자공 전하가 병력을 끌고 간 게 아니라 존 왕이 병력을 끌고 나왔다고?”
내가 예상한 시나리오는 사자공이 자신만만하게 병력 끌고 출정했다가 방심해서 한바탕 깨지고 퇴각하는 거였는데 뭔가 내용이 조금 이상하다.
“예. 심지어 존 왕은 최선두에 서서 병력을 이끌었고 그의 기세를 이기지 못한 아군은 병력을 뒤로 물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전령이 내게 거짓말을 할 리가 없으니 지금 그가 하는 말은 전부 진실이라는 말이었다.
“하… 돌겠군. 사자공 전하가 고작 존 따위에게 밀릴 만한 양반이 아닌데….”
뭐지? 사실은 존이 힘숨찐이었나? 아니면 두들겨 맞다가 각성한 건가? 근데 이렇게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갑자기 각성했다고?
“전하. 제가 전선을 떠날 때 아군은 패퇴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전선이 어디까지 밀렸는지조차 알 수 없는 실정입니다. 빠른 지원을 부탁드립니다.”
전령의 말에 나를 입술을 깨물었다. 패배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순신 장군님도 아니고 어떻게 모든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겠는가?
문제는 이 패배가 웨식스와 서식스, 에식스를 자극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지체하지 않고 바로 병력을 돌려 회군했다.
어쨌건 우리의 본진은 영국 남부였고 그곳이 흔들리면 내가 짜놓은 판 전체가 흔들릴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