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화
그의 항복 선언에 나는 쾌재를 불렀다. 사실 프랑스의 기강을 잡을 생각이긴 했지만 그게 전쟁을 뜻하는 건 아니었다.
이번에 이런 일을 벌인 건 뒤통수 방지와 프랑스의 기강을 잡기 위해서였다.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으니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 지어야 하지 않겠는가?
애초에 우리가 가진 명분도 빈약했고 잉글랜드에 연이어 전쟁을 할 정도로 돈이 썩어나는 건 아니었으니까. 사실 잉글랜드와의 전쟁도 내 입장에선 굉장히 무리한 셈이었다.
근처에 있는 국가를 두들겨 패는 것도 아니었고 무려 섬나라를 공격하는 거였다. 약탈이 목적이라면 현지 보급만으로 충분했지만 우리의 목적은 점령이었다.
그 때문에 모든 물자를 배로 운반해야 했고 현지 조달을 해도 적정가에 구매해야 했다. 이는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감을 의미했고 실제로 간당간당하게 버티고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조언을 받아 전쟁 채권을 발행하지 않았다면 이미 진작에 파산했을 것이다.
그 때문에 나는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 프랑스를 끌어들였고 보다시피 그들의 항복 선언을 받아냈다.
물론 보상을 빌미로 영혼까지 쪽쪽 빨아먹을 생각은 없었다. 괜히 저들을 몰아붙였다가 좆대로 되라면서 영국에 붙기라도 하면 골치 아파진다.
최근 오토의 황권이 강해지자 이 정신 나간 선제후 놈들이 또 슈바벤의 공작인 필리프에게 달라붙고 있었다.
물론 내 밑에 있던 필리프가 날 두고 헛짓거리를 할 리는 없겠지만, 사람에 대한 믿음만큼 강철처럼 단단하면서도 연약하고 덧없는 건 없다.
조조는 자신과 평생을 함께해 온 순욱에게조차 빈 찬합을 내리지 않았던가. 한신 역시 한고조 유방에게 팽해져 토사구팽이라는 사자성어를 널리 알리는 데 일조했고.
그 때문에 잉글랜드와의 전쟁에 시간을 잡아먹힐 순 없었다. 물론 메인 퀘스트의 목표는 잉글랜드 왕국을 세우는 거였다.
수능 끝나고 대학 간다고, 군대 전역한다고, 취직한다고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니잖은가. 결국은 메인 퀘스트도 하나의 목표에 불과했다.
실제로 게임에서도 메인 퀘스트를 깨고 나서도 계속 게임을 이어나갈 수 있었고 여긴 현실이 아니던가. 모든 상황에 대비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글쎄. 그 말은 오히려 내가 하고 싶군.”
“그게 무슨 말이오?”
“말 그대로네. 자네들은 협상의 대가로 뭘 내놓을 수 있나?”
장사치들의 유구한 전통. 선제시 카드를 내밀자 필리프 2세는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건지 모르겠군.”
“애초에 원하는 게 있어서 협상에 응한 게 아니오. 그쪽에서 원하는 걸 얘기하고 이쪽에서 적당히 타협하고 조절해서 협상하는 게 더 빠르고 간편하다고 생각하지 않소?”
“좋아. 그렇게까지 얘기하니 원하는 걸 얘기하지.”
나는 바닥에 놓여있는 지도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태연한 얼굴로 제안했다.
“노르망디의 영구적인 조차, 죽은 병사들에 대한 합리적인 보상, 잉글랜드와의 동맹 파기, 잉글랜드와의 전쟁에 대한 물자 지원, 마지막으로 향후 5년간 아키텐에서 거둬들이는 세수의 3할을 우리가 가져가도록 하지.”
“이런 날강…….”
내 제안에 얼굴이 새빨개진 필리프 2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나를 노려보았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문제 있소?”
“문제? 그대의 전부가 문제요. 하나같이 말도 안 되는 것들이잖소!?”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군. 그럼 하나하나 따져봅시다.”
일단 노르망디의 조차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았기에 뒤로 넘기고 보상안부터 시작했다.
“먼저 죽은 병사들에 대한 보상. 이건 지극히 당연한 것 아니오? 그대들의 실책으로 사람이 죽었으면 거기에 책임을 지는 게 인간으로서의 도리 아니오?”
“애초에 원인제공을 한 건 신성 로마 제국이오. 우리는 어디까지나 자위 차원에서 공격을 한 것이외다. 이걸 잊지 마시오.”
“뭔가 이야기가 계속 쳇바퀴를 도는 것 같은데… 협상을 하기가 싫으신가 봅니다?”
내 말을 꼬우면 전쟁하자는 말로 받아들였는지 필리프 2세는 주름을 있는 대로 지으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젠장. 좋소. 다만 그대들도 그 과정에서 죽은 우리의 병사들에게 보상을 해줘야 하오.”
흠, 서로 간에 실수였으니 쌍방이 보상하는 걸로 자존심을 세우려고 하는군. 그 정도는 봐줄 만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다음으로 잉글랜드와의 동맹 파기. 이건 뭐 말할 것도 없지 않소? 설마 우리와 협상을 하면서 뒤로는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겠다는 건 아닐 거라 믿겠소. 이 제안에 동의하시오?”
이 조건을 거절하는 건 대놓고 뒤통수를 치겠다는 얘기였으니 별다른 말 없이 승낙할 것이다.
“…동의하오.”
“다음으로 전쟁에 대한 물자 지원. 이는 우리가 그대들을 대신해서 잉글랜드와 싸워주고 있으니 성의 표시를 해야 하지 않겠소?”
“…그 조건도 솔직히 이해할 수 없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잉글랜드와 전쟁을 한다고 하니 어찌어찌 수용할 수는 있소. 하지만 아키텐의 세수를 가져가는 건 대체 무슨 생각이오?”
“전쟁 수행 비용뿐만 아니라 그 이후 복구 비용도 필요하지 않겠소? 그걸 아키텐에서 충당하겠다는 건데 문제 있소?”
내 말에 필리프 2세는 네가 문제라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지만 나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침묵은 긍정이라고들 하지. 문제가 없다는 걸로 받아들여도 되겠소?”
“아니, 무리요. 차라리 내 배를 쨀지언정 그런 말도 안 되는 조건은 받아들일 수 없소.”
그는 결연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고 난 이쯤에서 적당히 타협하기로 했다. 어차피 처음 얘기한 조건대로 협상을 할 생각은 없었다.
필리프 2세를 윽박지르면 가능하겠지만 그러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은 데다 원래 협상을 위해선 목표보다 더 큰 걸 제안해야 하는 법이었다.
다짜고짜 만원을 빌려달라는 것보단 십만 원을 요구했다가 만원을 빌려달라는 게 더 먹히는 법이니까.
“허면 아키텐에서의 세수를 3년간 2할로 낮춰주고 물자 지원은 오직 잉글랜드와 싸울 때만 받도록 하겠소. 이 이상은 나도 무리요.”
하지만 필리프 2세는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켰고 나는 한숨을 쉬며 한마디 덧붙였다.
“당신네들 신인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지 않았소? 그대들의 새로운 이웃에게 헌금한다 치고 도와주는 게 어떻소?”
“그 입에서 예수의 이야기가 나올지는 몰랐는데….”
“오딘께선 딱히 자신 이외의 신을 믿지 말라는 말씀은 안 하셨으니까.”
“아키텐의 세수는 3년간 1할. 그리고 물자의 지원은 딱 한 번만 하는 걸로 하고 돈 대신 현물로 지급하겠소. 양은 추후 협의하도록 합시다.”
“좋소. 받아들이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노르망디 말인데… 사실 이건 그대들을 위한 것이오.”
“남의 땅을 눈앞에서 가져가는 게 우리를 위한 것이다? 어디 왜 그런지 얘기나 해 보시오.”
뭐라고 씨부리나 들어나 보자는 표정의 필리프 2세를 바라보며 나는 천천히 약을 팔았다.
“어차피 그대들이 우리와 협상을 하는 건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가 아니오?”
대놓고 너희 우리가 무섭잖아? 라고 얘기하자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부정하지는 않았기에 나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말뿐인 관계가 오래갈 리가 없지. 그러느니 차라리 우리에게 노르망디를 조차해줘서 연결고리를 만들어두는 게 더 낫잖소.”
어쨌거나 노르망디는 프랑스의 땅이고 그 땅을 조차받는 건 내가 프랑스의 영주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왕과 영주라는 관계를 새롭게 정립한다면 이전보다는 더 나은 관계가 되지 않겠는가.
이거 겸업 아니냐고 할 수 있는데 중세 기준으로는 문제 될 게 없다. 애초에 정복왕 윌리엄이나 사자심왕 리처드부터가 잉글랜드의 군주이면서 프랑스의 대영주가 아니었던가.
“혹시 조차 말고 혼인동맹을 할 생각은 없소?”
“글쎄… 누구의 딸과 결혼시킬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라면 안 할 것 같소. 누가 오든 칼리나의 등쌀을 견딜 리가 없거든.”
내 말에 필리프 2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 그를 위로하듯 한마디 더 보탰다.
“영지의 조차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오. 어차피 노르망디는 잉글랜드와의 결전을 위해선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지역이고 노르망디가 활성화되면 주변에도 이익이 돌아갈 테니까.”
“후우… 지금 당장 대답하기는 어려우니 생각할 시간을 주시오.”
물론 나도 오늘 당장 답변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더 압박하지 않아도 프랑스는 내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내 제안이 꼬우면 남은 건 전쟁인데 필리프 2세는 절대 전쟁을 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뛰어난 지휘관이자 남다른 안목을 가진 인물인데, 그 얘기는 곧 질 전쟁과 이길 전쟁을 분간할 수 있다는 말이었으니까.
“물론이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시간을 줄 수는 없소. 그대도 알겠지만 내 시간은 제법 비싼 편이니까.”
* * *
<웨식스 ― 사우샘프턴>
“전하, 이제 슬슬 결정을 하셔야 합니다.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자신을 재촉하는 사내의 말에 웨식스의 왕은 짜증 난다는 듯 역정을 냈다.
“이런 젠장. 경. 그냥 차라리 내게 왕위에서 내려오라고 하시오.”
“전하. 제가 어찌 그런 불손한 마음을 품겠습니까. 그저 정당한 왕위 계승자가 돌아온 만큼 그에게 왕위 계승을 해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을 드린 것뿐입니다.”
“꼭 나는 정당한 계승자가 아니라는 것처럼 들리는구려.”
왕은 불편하다는 심기를 숨기지 않은 채 삐딱한 어조로 얘기했지만 상대는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힐데가르트 전하께서는 고드윈의 이름을 잇지 않으셨습니까?”
“전하라… 허, 이미 그대의 마음속에는 그녀가 그대의 여왕이 된 모양이로군.”
상대는 대답하지 않았고 왕이 화를 내려던 찰나 시종이 허겁지겁 다가와 왕에게 보고했다.
“저, 전하. 사자공 전하께서 알현을 요구하셨습니다.”
시종의 말에 웨식스의 왕은 피곤한 얼굴로 두 눈을 감고 자신의 눈두덩이를 매만졌다.
하인리히 사자공. 그리고 힐데가르트 고드윈. 그 둘은 일주일 전에 엄청난 숫자의 병력을 끌고 웨식스로 진군했다.
그리고 다짜고짜 자신에게 진정한 왕위 계승자가 왔으니 왕위를 내놓으라고 겁박했다. 당연히 반항하려 했지만, 그러기에는 그가 끌고 온 병력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그리고 반항하던 켄트 왕국이 어떻게 됐는지 알고 있었기에 왕은 제대로 된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시간이 필요하다며 시일만 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조차 불가능해 보였다.
“이쯤이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줬다고 생각하오만… 아직도 시간이 부족하오?”
“…그렇소. 왕위 계승이라는 중차대한 일을 어찌 1주일 만에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진행할 수 있겠소? 좀 더 여론을 모을 시간이 필요하오.”
“다른 귀족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데….”
사자공이 허리에 찬 칼자루를 매만지며 말을 줄이자 왕은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자기 할 말을 했다.
“애초에 고드윈의 자손이라고 하지만 그녀가 한 일이 뭐요? 우리가 잉글랜드의 폭정 속에서 고통받을 동안 한 게 뭐가 있소?”
“그러니 이렇게 뒤늦게라도 찾아온 게 아니오. 웨식스뿐 아니라 고통받는 잉글랜드 전역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해방이 아니라 정복이겠지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왕은 차마 내뱉지 못했다. 그 말을 내뱉었다간 엄청난 후폭풍을 감당해야 할 테니까.
“내 그간 왕이 웨식스를 재건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충분히 헤아리고 있소. 그러니 내가 그대에게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을 때 얌전히 내려오는 게 좋지 않겠소?”
겁박에 가까운 그 말에 결국 왕은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보는 눈이 있으니 자신을 죽이거나 해를 끼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과 관계된 이들은 어쩌겠는가? 어쩌면 그의 말대로 험한 꼴 보기 전에 내려오는 게 맞을 것이다. 어차피 버텨봤자 지키지도 못할 왕위가 아니던가.
결국 왕은 고개를 떨궜고 그날. 웨식스에는 새로운 여왕이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