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화
<프랑스 – 부르고뉴>
거대한 응접실 안. 그곳에는 세 명이나 되는 인물들이 앉아있었지만 침묵만이 감돌았다. 그런 불편한 침묵을 깬 건 화려한 의복을 입은 중년의 사내였다.
“후우… 미치겠군.”
그는 한숨과 함께 들고 있던 편지를 탁자 위에 내던지며 혀를 찼다.
“다들 어떻게 생각하시오? 이… 이 말도 안 되는 사태에 대해서?”
“이미 물이 엎질러진 이상 강하게 나가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자신과 비슷한 나이대의 사내가 대답하자 프랑스의 왕, 필리프 2세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진심이시오?”
“못 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저희가 명분에서 밀리는 것도 아니고.”
필리프 2세는 어이가 없었다. 대체 이자는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아니, 그보다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 자체가 짜증 났다. 자신은 상황이 더 악화되기 전에 적당히 사자공에게 무력시위나 하려고 병력을 끌고 노르망디로 진군했다.
물론 실제로 공격할 생각도 없었고 적당히 ‘나와라이~ 제발 나와라이~’ 하면서 공성을 하는 척만 하고 협상을 한 뒤에 물러날 생각이었다.
그리고 온 김에 앙주와 부르고뉴에도 들러서 적당히 영주들을 위문할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자신과 몇 번 싸우며 속을 썩이긴 했지만 어쨌건 결국 자신의 편으로 돌아서지 않았는가.
그래서 이번 일에 대한 위문도 하고 감사도 표할 겸 찾아왔는데 대체 노르망디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병력들이 노르망디를 공격했고 순식간에 함락당했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사상자가 많이 없다는 점일까? 만약 눈 돌아간 병사들이 사자공의 병사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였다면 무조건 전쟁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보시오. 앙주 백작. 정녕 그대는 우리 프랑스가 신성 로마 제국을 상대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진심으로? 사심 다 내려놓고 객관적으로 바라봤을 때 정말 우리가 이기겠소?”
“….”
“그렇게 생각한다면 내 모든 권한과 책임을 그대에게 주리다. 맞서 싸우시겠소?”
따지듯 이야기하는 필리프 2세의 말에 앙주 백작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객관적인 전력만 놓고 보면 신성 로마 제국이 자신들보다 훨씬 더 압도적이었다.
병력의 숫자건 질이건, 보급품의 양이건 질이건 뭐건 간에 말이다. 심지어 전투의 경험치도 저쪽이 더 높았으니 싸웠을 때 누가 이길지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거기에 상대측 지휘관은 무려 사자공과 용담공이 아니던가. 사자와 용담이라는 별칭은 어중이떠중이에게 붙여주는 게 아니었다.
사자심왕 리처드가 살아있을 때 프랑스는 숨을 쉬는 것조차 그의 눈치를 봐야 했다. 헌데 그보다 더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사자공과 용담공이다.
아마 전쟁의 승패를 두고 도박을 한다면 그 누구도 자신들에게 걸지 않을 것이다. 도박사들조차 학을 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겠지.
“진정하십시오. 전하. 앙주 백작이 강하게 얘기하긴 했지만 그 말이 전부 틀린 건 아닙니다.”
“부르고뉴 공작.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저희 프랑스가 노르망디를 점령한 건 명백한 사실이고 이미 엎질러진 물입니다.”
단순히 앙주 백작을 옹호하는 게 아니라 뭔가 대책을 말하려는 것 같기에 필리프 2세는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가라앉힌 뒤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순 없으니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요.”
“하지만 그 수단은 결코 전쟁이 돼선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전쟁을 원하지 않더라도 저쪽이 전쟁을 원한다면 어떻게 할 셈이오?”
“그럴 명분 자체를 주면 안 됩니다.”
어린애도 할 법한 대답을 하는 부르고뉴 공작의 모습에 필리프는 짜증을 담아 대꾸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언제는 바이킹들이 명분이 있어서 해안가를 약탈했소!?”
“바이킹들이라면 그렇지만 사자공과 용담공은 신성 로마 제국의 공작입니다. 그들도 제대로 된 명분 없이 무턱대고 저희와 전쟁을 벌이진 못할 겁니다.”
“잊으셨소? 지금 우리는 사자공의 병력을 건드린 것이오. 명분은 그걸로 충분하오.”
“명분이라기에는 빈약할 겁니다. 애초에 이런 상황에 처한 것은 저들이 먼저 저희에게 아무런 통보도 없이 노르망디를 점령하고 앙주와 부르고뉴의 땅을 통과해서 생긴 것입니다.”
인과관계를 따지는 부르고뉴 공작의 모습에 필리프 2세는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그렇지만 정상참작이 안 될 건 아니오. 앙주와 부르고뉴의 땅을 밟긴 했지만, 단순히 이동을 하는 과정에서 영토만 밟은 거고 약탈을 한 것도 아니잖소.”
“그건 그렇습니다만 저들이 노르망디를 강제로 점거한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 노르망디도 돌려준다 얘기하지 않았소? 실제로 노르망디를 약탈한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전진기지로만 쓰고 있던 모양인데.”
명분이라는 건 참 간악해서 나는 되지만 너는 안 되는 그런 내로남불적인 면이 있었다. 상황이 반대였다면 제국이 프랑스를 압박할 수 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이를 빌미로 제국을 압박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하는 얘기입니다. 서로 간에 오해가 있었던 듯하니 이 모든 일을 불문에 부친다고 하고 노르망디를 조차해주는 겁니다.”
앙주와 부르고뉴의 영주들도 실제로 전쟁을 원하기보단 그저 강하게 항의해줘서 자신들의 자존심을 세워주기를 원했던 것뿐이다.
그리고 의도치 않게 그 목적을 달성했으니 저런 태도를 취하는 거겠지. 그게 굉장히 아니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흠…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을 불문에 부치고 새롭게 관계를 구축한다는 말이오?”
“예. 저들도 잉글랜드를 때려잡기 바쁜데 굳이 이쪽에 신경 쓰고 싶지는 않을 겁니다. 물론 그 이후를 대비해 저희와 동맹…까지는 아니더라도 불가침 협정 정도는 맺어야 할 테지만요.”
부르고뉴 공작의 말에 필리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은 지금까지 서로를 소 닭 보듯 하는 관계였다.
제국이야 늘 내전과 내부의 알력 다툼, 그리고 동유럽 국가들 간의 관계 때문에 프랑스에 눈을 돌리기가 힘들었다.
프랑스는 프랑스대로 잉글랜드와의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고 그 때문에 다른 쪽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제국의 혼란이 끝나고 프랑스가 영국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러니 미래를 대비해 미리 관계를 구축해놓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물론 평화의 대가가 조금 비싸긴 할 테지만…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것밖에 방법이 없겠구려. 만약 협상 과정에서 약간의 조건 변화가 있더라도 그대들도 이해해 주시오.”
“최대한 선처하겠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존 왕과의 동맹을 깰 수밖에 없었지만, 원래 약속은 깨라고 있는 게 아니던가? 존이 이 상황에 처한다면 분명 그도 자신처럼 행동할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미안하지만 썩은 동아줄과 침몰하는 배를 붙잡고 있는 건 병신이나 하는 짓이었다. 구조선이 온다면 서둘러 손절하는 게 답 아니던가.
그렇게 행복회로를 돌린 필리프 2세는 서둘러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 * *
<잉글랜드 – 맨섬>
“노르망디가 함락당했다고? 프랑스에게?”
“예. 전하. 그래서 사자공 전하께서 전하의 의중을 물으셨습니다.”
어떻게 할지 내게 지침을 내려달라는 거겠지.
“흠… 일단 노르망디에 한번 가봐야겠군. 그쪽에 프랑스의 왕도 와 있다지?”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사안이 사안인 만큼 최대한 원만하게 처리하려는 것 같습니다.”
전령의 말에 나는 내심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가리며 근엄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노르망디의 함락은 내가 세워놓은 계획이었다. 일부러 적이 공격해왔을 때 내부에서 호응하게 만들어 놨는데 성공한 모양이다.
하긴, 켄트로 원정 간다고 수비 병력도 얼마 없었으니 성공할 수밖에 없었겠지. 노르망디는 꽤 큰 성이었고 적군이 외부를 둘러싼 상황에서 내부까지 감시하는 건 힘든 일이니까.
거기에 프랑스 입장에서 성안이 혼란에 빠지고 성문이 열리는 게 빤히 보이는데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을 거다.
이에 대해 사자공에게 따로 얘기하지 않은 이유는… 원래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사안이 사안인 만큼 얀에게만 몰래 얘기해뒀는데 생각 외로 잘 처리해준 것 같다.
덕분에 이쪽이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됐으니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던가. 그렇게 나는 곧장 도버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사자공을 만날 수 있었다.
“어서 오게. 라그나르.”
“오랜만입니다. 사자공 전하.”
“그래. 자네가 날 믿고 맡겨줬는데 일 처리를 엉망으로 하게 돼서 미안하네.”
그는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얼굴을 짓고 있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그 역시 내가 기획한 일에 휘말려서 피해를 보지 않았는가.
“그게 어찌 사자공 전하의 잘못입니까? 거기에 차라리 잘된 일 아닙니까? 이쪽에서 명분을 잡았으니 좀 더 유리한 위치에서 협상을 할 수 있을 겁니다.”
국가 간의 외교에서 중요한 건 결과다. 무슨 짓을 하든 원하던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 그게 외교의 기본이었기에 나는 지체하지 않고 즉시 내 기함인 궁그닐에 올라 노르망디로 향했다.
이미 내가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는지 수많은 병력이 항구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는데 말 위에서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사내가 나를 직접 맞이해주었다.
“만나서 반갑소. 용담공. 본인이 프랑스 왕국의 국왕. 필리프요.”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요. 프랑스 왕국의 아우구스투스를 만나게 되어 영광이오.”
황제에게만 사용이 가능하다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그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지지는 남달랐고 실제로 그런 칭호를 받을 정도로 능력도 뛰어난 사내가 눈앞의 필리프 2세였다.
“하하, 신성 로마 제국의 기둥께서 그리 말해주시니 민망하구려. 일단 들어갑시다. 그대를 위해서 내 진수성찬을 마련해놓으라 하였소.”
그는 최대한 내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식사를 하면서 분위기를 풀려고 노력했지만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비협조적으로 나왔고 그는 한숨을 쉬더니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용담공. 내 솔직하게 말하리다. 이번 일은 실수였소.”
“실수… 실수라. 참 좋은 변명 아니오?”
“물론 그를 부정하지는 않겠소.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하건대 우리가 노르망디를 공격할 이유가 없지 않소?”
“나도 그렇게 생각했소만 실제로 그대들은 노르망디를 함락시키지 않았소?”
음주운전을 할 생각이 없으면 뭐 하는가. 이미 술을 먹고 운전대를 잡은 것을.
“말했듯 그건 실수였소. 실제로 우리는 사자공의 병력들을 포로가 아닌 귀빈으로 대접하고 있으며 그대들의 물건에 손을 대지도 않았소.”
“하지만 그 과정에서 피가 흐른 것도 사실이지.”
“…전쟁을 할 생각이오?”
“필요하다면.”
“명분은 있소?”
“병사들의 핏값.”
“먼저 공격한 것은 그대들이오.”
“그게 중요한가?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닐 텐데?”
오만하기까지 한 라그나르의 말에 필리프는 침을 삼켰다. 그 말대로 중요한 건 저들이 프랑스를 짓밟을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대체 누가 저들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다른 선제후들? 자신의 이권이나 목숨, 가문이 달려있다면 기를 쓰고 맞서겠지만 고작 프랑스의 안위를 위해 용담공과 맞설 이가 어디 있겠는가?
교황? 칼리나 변경백과 제노바의 영향력 아래 둘러싸여 있는 그가 작금의 사태에 대해 뭐라 말이나 하겠는가?
결국 필리프는 고개를 떨군 채 패배 선언이나 다름없는 말을 내뱉었다.
“협상 조건을 말해보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