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화
<스코틀랜드 – 에든버러>
“흐음….”
공성전에 임하는 병력들의 모습을 보던 하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공성 병기까지 동원해서 성을 넘어보려 했지만, 이번에도 힘들어 보였다.
“아버지. 적들의 저항이 생각보다 거센 것 같습니다. 병력들이 더 상하기 전에 일단 퇴각시키는 게 어떻겠습니까?”
차남인 스벤의 말에 하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날도 어두워지고 있었고 공성을 하는 꼴을 보아하니 시간 낭비에 병력 낭비였기 때문이다.
“퇴각 나팔을 불어라. 퇴각 후 적들이 성문을 열고 추격할지도 모르니 예비대를 끌고 나가 주의하는 것 잊지 말고.”
스코틀랜드의 왕인 카우산틴 2세는 라그나르가 경고했던 것처럼 제법 걸출한 인물이었다.
처음 스코틀랜드로 왔을 때 우선 적을 가볍게 도발할 생각으로 병력을 흩뿌려서 주변의 마을을 불태우거나 약탈을 했지만, 카우산틴 2세는 흔들리지 않고 철저하게 성을 지켰다.
이건 솔직히 의외였다. 영주의 의무는 영지민들을 지키는 것이었고, 굳이 의무 때문이 아니더라도 주변의 마을이 불타고 농민들이 포로로 붙잡히게 되면 영지 경영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렇기에 공성전은 수비 측이나 공격 측이나 최후의 보루에 불과하다. 성이라는 건 굉장히 제한된 공간을 돌로 둘러쌓아 둔 건축물에 불과하니까.
그렇기에 이길 것 같다, 적을 격퇴할 수 있을 것 같다 싶으면 병력을 끌고 나와 야전에서 맞서 싸우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그간 바이킹들에게 약탈당했던 기억이 영혼 속에 새겨졌는지 적들은 절대 야전에서 싸워주지 않았다. 설사 싸운다고 하더라도 카우산틴 2세는 철저하게 상황을 통제한 뒤에 맞서 싸웠다.
가령 마을을 급습할 때 병력을 매복시켜놓고 급습을 한다거나, 이동 경로를 파악한 뒤 복병을 숨겨놓는다거나 하는 등 자신들이 유리한 상황에서만 싸웠다.
그러다 보니 이쪽에서도 주변 마을을 약탈하는 건 부담스러웠다.
거기에 주변 지형에 익숙하지 않은 데다 내륙 깊숙이 들어가는 건 꺼려졌고 적들도 자경단을 만들어 저항하다 보니 처음처럼 재미를 보기 힘들어졌던 것이다.
“뭔가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데….”
하랄이 턱에 난 수염을 쓰다듬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옆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스벤이 가볍게 하랄의 의중을 떠보았다.
“내일은 상륙 거점을 지키던 병력까지 동원해서 새벽에 공성을 진행해볼까요? 최근에는 항상 아침을 먹고 난 이후에 공성을 진행했으니 적의 허를 찌를 수 있을 겁니다.”
그럴듯한 이야기였지만 하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랬다간 오히려 저쪽의 반격을 받을 거다. 너도 공성과 수성 중에 어느 쪽의 피로도가 더 높은지는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물론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리고 카우산틴 2세의 대처로 봐서 어지간한 공격은 전부 막아낼 거다. 굳이 모험을 해서 상륙 거점까지 잃을 필요는 없지 않느냐.”
현재 덴마크군의 보급은 현지 조달이 절반, 해상운송이 절반이었다. 현지 조달이야 그렇다 쳐도 상륙 거점까지 잃어버려서 고립되면 그땐 이쪽이 수성을 해야 될 처지가 될 거다.
“허면 차라리 병력을 우회시켜서 북부 일대를 공격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것도 불가능하다.”
지난번, 하랄 자신이 덴마크를 수복할 때 수도인 셀린섬과 쾨벤하운을 무시하고 유틀란트반도를 공격했던 것처럼 하자는 아들의 제안에 하랄은 고개를 저었다.
“그때는 셀린섬이 섬이었기에 한 번에 많은 병력을 출병시키는 건 불가능했고 유틀란트반도에는 내게 호의적인 야를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곳은 완벽한 적지가 아니더냐?”
왜 적진을 공격할 때 코딱지만 한 성을 무시하지 않고 일일이 다 함락시키면서 가던가. 바로 후방이 언제든지 끊어지고 교란당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모든 성들을 함락시킬 것도 아니고 이곳 전부가 자신에게 적대적인데 후방에 에든버러라는 거대한 성을 내버려 두고 북진하는 건 미친 짓이었다.
거기에 스코틀랜드는 그 크기에 비해 인구수 대부분이 에든버러와 그 서쪽에 있는 글래스고에 몰려있었기에 북부를 점령한다고 해도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자신의 차가운 대답에 스벤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고 그게 안타까웠던 하랄은 아들의 기를 살려줘야겠다는 생각으로 어깨를 두들기며 한마디 덧붙였다.
“하지만 결국은 네 말이 근본적인 해결책이겠지.”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푸는 대신 잘라버린 알렉산더 대왕의 이야기처럼, 이곳의 상황은 굉장히 복잡했지만 결국 지원병이 오면 해결될 문제였다.
압도적인 병력의 숫자로 에든버러를 제외한 전 지역을 초토화시키면 그만이었다. 저들이 자신의 신들이 부렸다는 오병이어의 기적이라도 일으키지 않는 이상 굶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용담공 전하가 오기를 기다릴 생각이십니까?”
“그래. 우리가 이곳에서 적의 주력을 붙잡고 있는 사이 라그나르가 에든버러의 후방을 책임지고 있는 글래스고를 공격해서 떨어뜨린다면 저쪽도 뭔가 반응이 있겠지.”
이미 아일랜드를 통일하고 맨섬을 점령했다고 하니 병력을 끌고 후방을 치는 건 쉬울 것이다.
물론 라그나르로서는 선택지가 여럿 있는 만큼 이곳에 먼저 온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결국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이다.
어차피 라그나르도 무리하지 말라고 했고 이곳에서 적들의 발을 묶고만 있으면 라그나르가 모든 걸 해결해주지 않겠는가. 늘 그랬듯.
* * *
<켄트 왕국 ― 캔터베리>
“징그러운 놈들이었군. 얀. 아군의 희생은 어떤가?”
시체들이 산을 이루고 있는 성문을 넘어 내성으로 들어온 사자공은 피를 뒤집어쓴 채 자신의 옆에 딱 붙어있는 사내를 향해 물었다.
“적들의 저항이 격렬하긴 했지만 피해는 생각보다 크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도버 쪽에 상륙한 고드프리 경이 시선을 잘 끌어주신 것 같습니다.”
“하긴, 생각보다 적의 병력이 너무 없더군.”
애초에 켄트 쪽에선 아군이 상륙을 못 하게 막을 생각이었는지 슬쩍 도버 상륙에 대한 소문을 흘리자 대부분의 병력을 빼내서 도버로 보냈다.
덕분에 자신들은 북쪽으로 몰래 돌아와 수월하게 공성을 진행할 수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맞서 싸웠다.
아무래도 한번 망했다 독립을 해서 그런지 병력들의 전투 의지가 굳건한 것 같았다. 이쪽에서 항복하면 살려주겠다고 해도 끝까지 싸운 걸 보면 앞으로의 전투도 쉬워 보이진 않았다.
“일단 부상병들은 제외한 병력들에게 치안 유지와 주변 안정화를 지시했습니다. 약탈을 금지했으니 혼란은 빠르게 안정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시키지 않아도 제 할 일을 딱딱 찾아서 하는 얀의 모습에 사자공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병력들이 지쳐있을 텐데 예비대한테 시켜도 되지 않겠나?”
“사자공 전하께서 따로 예비대를 쓰지 않으실 거면 병력을 끌고 고드프리 경을 도울 생각입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그래 주면 나야 고맙네만 힘들지 않겠나? 자네도 지금까지 잠도 못 자고 계속 공성전을 지휘하지 않았나?”
“물론 힘듭니다만 총사령관인 사자공 전하보다 더 힘들겠습니까? 또한, 제가 없어도 이곳은 전하께서 잘 정리해주실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푸하하, 누가 라그나르의 수하 아니랄까 봐 자네도 사람 다루는 게 제법 험하구만.”
말이야 자신을 치켜세우고 있지만 결국은 본인을 대신해 뺑이쳐 달라는 말이 아니던가. 하지만 딱히 기분 나쁘진 않았다.
남자다우면서도 호기 있고 할 말은 하는 패기 넘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사자공은 그를 스카우트하기로 했다.
“자네 혹시 내 밑으로 들어올 생각 없나? 기반이 부족한 오토에겐 자네 같은 인재가 필요하다네.”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혹시 라그나르와의 관계가 틀어질까 봐 그러나? 그게 걱정이라면 내가 잘 말해주겠네.”
“사자공 전하. 저는 라그나르 공작님께 목숨을 빚졌습니다. 그 이후로 제 목숨을 용담공 전하께 바치겠다 다짐했습니다.”
“…내가 돌려 말해서 잘 이해가 안 가나 보군. 나는 지금 자네를 황제의 직속부대로 넣어주겠다고 말하는 걸세.”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했습니다만 제 검은 오직 용담공 전하의 것입니다.”
“설사 그 검이 나를 향하더라도 말인가?”
“용담공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대답하는 얀을 보며 사자공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눈빛을 한 이들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자신의 밑에 저런 이들이 둘 정도만 있었어도 프리드리히에게 밀리지는 않았으리라.
“거 참 아쉽군.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다지만 인재란 인재는 라그나르가 싹 다 끌어모으는 것 같아.”
사자공은 남부의 도버에서 적의 대군을 상대하고 있을 고드프리를 생각하면서 입맛을 다셨다. 십자군을 이끌었던 사내답게 그의 지휘에는 군더더기가 없었으며 깔끔했다.
솔직히 사자공에 비해 가문, 명성, 능력 면에서 꿀릴 게 하나도 없는 그가 왜 이교도인 라그나르의 밑에 들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그의 실력은 진짜였다.
“아무튼, 고드프리의 지원은 내가 직접 가도록 하겠네.”
“예? 굳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자네가 나를 믿는 만큼 나 역시 자네를 믿는다네. 자네라면 이곳을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은데… 내 기대에 부응해줄 텐가?”
“물론입니다. 사자공 전하!”
물론 그 말대로 아무런 사심도 없는 건 아니었다. 고드프리는 부용의 영주였던 만큼 그곳에서 그의 영향력은 여전했고 그런 그와 친하게 지내서 나쁠 건 없었기에 지원군을 자처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자공의 원대한 계획을 무너뜨리는 전령이 도착했는데 말이 도착하자마자 쓰러질 정도로 급하게 달려온 전령은 사자공의 앞에서 울부짖듯 소리쳤다.
“사자공 전하! 노르망디가… 노르망디가 프랑스의 공격을 받아 함락당했습니다.”
“…뭐라고?”
“프랑스의 왕. 필리프 2세가 병력을 끌고 와서 노르망디를 공격했고 아군이 용맹하게 버텼지만 끝내 성과 항구를 넘겨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령의 말에 사자공은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이런 개자식들이!!!”
“전하. 진정하십시오. 이건 감정적으로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일단은 정확한 상황 파악부터 하셔야 합니다.”
자신을 말리는 얀의 목소리에 사자공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화를 가라앉혔다. 그의 말대로 이건 감정대로 행동할 사안이 아니었다.
“후우… 좋아. 자네 생각은 어떤가?”
“일단은 예정대로 고드프리 경을 도와 켄트부터 확실히 접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얀의 말에 잠시 생각에 빠진 사자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점령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노르망디는 자신들의 본진이었다.
물론 진짜 본진은 하노버였지만 이곳과 거리가 꽤 되는 데다 대부분의 물자를 노르망디에서 공급받고 있었기에 그곳을 잃어버린다는 건 본진이 날아간다는 말과 동일한 얘기였다.
본진이라고 할 수 있는 노르망디가 날아갔는데 떠돌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러니 일단은 예정대로 켄트 왕국부터 손에 넣고 그 이후를 생각해야 했다.
“좋아. 자네 말대로 하지. 그런데 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어떤 게 말씀이십니까?”
“필리프 2세의 행동 말일세. 다시 생각해보니 그가 노르망디를 공격할 이유가 없지 않나? 공격해서 얻을 것보다 잃을 게 많은데 왜 쓸데없이 공격을 한단 말인가?”
“아마 자존심에 상처를 입어서 감성이 이성을 이긴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 정도로 멍청한 것 같지는 않던데….”
확실히 라그나르가 주문한 대로 프랑스의 자존심을 짓밟아주긴 했지만, 필리프 2세가 고작 그것 가지고 전쟁을 할 정도로 멍청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도 아니면 일종의 무력 시위가 아니겠습니까?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무력 시위를 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닙니까?”
“그 추측이 제일 그럴법하군. 어쨌든 자세한 건 확인해보면 알겠지.”
빠르게 상황을 정리한 사자공은 말 위에 오르며 얘기했다.
“나중에 용담공에게도 편지나 한 통 보내놓게. 어쨌거나 이번 잉글랜드 원정의 총사령관은 라그나르니까.”
“알겠습니다.”